192. 비겁해질 용기
“호오, 기개가 좋군.”
진천랑이 입매를 길게 찢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비량은 심호흡을 하고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선공을 당해서는 가망이 없다. 무조건 먼저 쳐야 한다!’
눈앞의 대살성은 그야말로 괴물이다.
지금껏 많은 적들을 상대해 봤지만 이렇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단순히 실력 차이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아니다.
뭐랄까?
인간 자체의 결이 다른 느낌이랄까? 살기가 아닌 사기(死氣)가 느껴진다.
말 그대로 죽음의 기운이다.
마치 시체더미에서나 느낄 만한 서늘한 감각.
‘이것이…… 대살성의 기운인가?’
협곡을 가득 메운 장대비 속에서 처벅처벅 걸어오는 진천랑.
그의 두 눈이 맹수처럼 시리게 빛나고 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에서는 광기마저 풀풀 휘날린다.
척.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비량이 움찔거렸다.
‘내가…… 물러나?’
완전히 압도당했다.
처음이었다.
기세에 눌린 것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한데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앞에 둔 기분.
헛웃음이 나온다.
“칫, 기분 더럽네.”
“클클. 사람 앞에 두고 하는 말이 글러먹었구나.”
“네가 사람이냐?”
비량이 최대한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진천랑은 입매를 비튼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워낙 많이 들은 소리라 이제는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로 호흡만 했다.
들숨과 날숨이 느껴진다.
전신을 두드리는 빗방울도 느껴진다.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니 빗줄기 하나하나의 무게가 엄청나다. 이렇게 땅으로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초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자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그래, 생에 마지막 순간 이 정도의 상대와 겨룬다는 건 나쁘지 않으리라.
각오를 다진 순간!
번쩍!
벼락이 치면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슈파파파파!
쩌저어엉!
후우우우우웅!
콰파파파파파!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가면서 협곡이 갈라지고 고인 물이 사방으로 튄다. 쓰러진 시체들도 피범벅이 된 채로 밀려난다.
‘무슨 힘이 이렇게나……!’
비량이 어금니를 까득 가는 사이 진천랑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두 번째 검격을 펼쳐왔다.
따아아앙!
“크흡!”
비량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조금 전 죽은 비선향주가 익힌 무공 투신검이 아닌가?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자 비량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난다.
촤르르르륵!
떠어어엉!
“끄읍!”
반격할 기회는 없다.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한데 진천랑이 펼치는 검격이 하나같이 비량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도 역시……!’
제일 먼저 죽었던 부향주가 익힌 중청신검이다. 그리고…….
’쩌어엉!
‘이건 조장님의 철심검! 그리고 이건……!’
쩌저엉! 떠어엉! 까아앙!
‘조 선배의 한유장격! 이 형의 칠현검! 정 선배의 파검세까지……! 이런 개 같은……!’
쏟아지는 검격을 정신없이 막아내면서 비량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놀랍게도 진천랑은 비량과 동고동락했던 비선향 동료들의 검법을 하나씩 번갈아 가며 쓰고 있었다.
그래 봐야 오늘 처음으로 몇 번 손을 섞어봤을 뿐일 텐데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흉내 내지 않는가?
이래서야 마치 죽은 동료들과 싸우는 기분이다.
야밤에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와중에 동료의 검격을 연신 받아내는 기분이란.
“빌어먹을! 엿 같잖아!”
비량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암벽을 발로 차고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꽈아아앙!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이었다.
물론 진천랑은 어렵지 않게 비량의 검을 쳐냈다.
대신 또 한 번 향주의 검법을 펼치면서 비량에게 쇄도했다.
쒸에에에엑!
“오냐, 죽어보자! 이 미치광이 살인마야!”
비량이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면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순간 진천랑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검격이었다. 아니, 뼈를 내주더라도 살은 베어보자는 심정에 더 가까우리라.
하지만 검이 서로 스치는 순간, 비량은 뼈를 내주고도 살을 베지 못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림없구나.’
아니나 다를까, 뜨끈한 감각이 복부를 관통하면서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푸욱!
“커억!”
챙그랑!
비량이 힘없이 검을 놓쳤다.
검신이 고인 물에 금방 잠겼다.
그 위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비틀……!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데, 쓰러지진 않았다.
죽어도 서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버텼다.
마주 선 진천랑이 귓가에 쓴웃음을 흘렸다.
“클클. 제법이었다, 애송이.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어.”
“귀신이 되어서도 네놈을 쫓아 다녀주지.”
비량이 표독스럽게 말을 뱉었지만 돌아온 반응이 뜻밖이었다.
“귀신은 나중에 되고.”
“……?”
“어린 패기를 보니 형이 급 기분이 좋아졌거든. 보내줄 테니 다신 쫓아오지 마라.”
“……!”
비량이 눈을 부릅뜨는데, 진천랑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더니 저벅저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짓이냐? 나를 모욕 줄 생각인가!”
“모욕? 살려주는 것도 모욕인가?”
“천하대살성이 살려준 목숨 따위는 그 자체로 모욕이다!”
“거참, 사람 말이라는 게 참 묘하단 말이야.”
진천랑이 피식 웃더니 빙글 돌아섰다. 그가 입매를 비틀고는 다시 저벅저벅 걸어온다.
한 걸음 한 걸음의 무게가 남다르다.
코앞에 다다른 진천랑이 눈을 깔고 비량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천하대살성이라는 소리 지겹도록 들었는데 말이지.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들으니까 기분이 또 더럽네.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하대살성을 그럼 다른 이름으로 부를까?”
“말해봐라. 내가 왜 천하대살성이냐?”
“뭐?”
비량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천하대살성이냐니?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이 협곡에 널브러진 시체만 해도 수백 구에 달하는데?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진천랑이 턱짓을 하며 말한다.
“아, 저것들은 날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고.”
“무슨 개소리를……!”
“너는 네 목숨 노리고 달려드는 놈 살려줄 아량이 있나?”
“……!”
“나는 있다. 그러니 널 살려준 거지. 하나 아주 가끔일 뿐이다. 그러니 운 좋은 줄 알라고, 어린 친구.”
“나를 죽이지 않는다고 천하대살성이 아니게 되는 건…….”
“좋을 대로 생각해. 하지만 가끔은 생각이라는 걸 해보란 말이야. 너 스스로 판단해 보란 말이다. 네가 귀신이 되어서도 쫓겠다는 내가 정말 천하대살성인지. 저렇게 떼로 몰려다니면서 목숨 걸고 죽여야 할 놈인지. 자, 어떤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놈인가?”
진천랑이 두 팔을 활짝 펼치고는 묻는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흠뻑 젖은 진천랑의 모습은 어딘지 처연해 보인다.
왜일까?
왜 여기서 비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처음이었다.
무림맹의 칼자루가 되어 살아왔다.
잘 벼른 칼날이라며 칭송을 듣고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었다.
한데 갑자기 마음이 흔들린다.
진천랑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비량의 뺨을 툭툭 친다.
“전신 요혈을 피해서 찔렀다. 대단하지? 내가 좀 그렇다. 때론 이 대단한 능력 때문에 이유 없이 공적이 되기도 하는 게 세상이다. 널 왜 살려주었는지 궁금한가?”
“…….”
“평소라면 그냥 내 마음이다, 씹새야, 하고 말했겠지만. 글쎄…… 널 보니 내 모습이 보였다. 나의 젊은 모습이. 물론 너는 젊은 나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제법 재능이 있어 보이거든. 나름의 독기까지. 그래서 궁금해. 너처럼 재능을 가진 놈이 나처럼 배척당하지 않고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 현혹시키려고…….”
“하하하하! 내가 널 현혹시켜서 얻다 쓰겠나? 믿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하나는 명심해라. 또 쫓아오면 죽는다. 내가 알고 보면 참 인정이 많지만, 또 냉정하기도 한 놈이니까. 아무튼 좋고 멋진 건 다 하는 게 이 몸이시다.”
“미친놈.”
“그래, 그것도 나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가면 나에 대해서 알아봐.”
“너야 당연히 알지. 천하대…….”
짜악!
순간 진천랑이 양 손바닥으로 비량의 뺨을 거세게 맞잡았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린다. 진천랑이 비량의 얼굴에 바짝 다가서며 소리쳤다.
“세상이 말하는 진천랑 말고! 네 눈으로 네 머리로 보란 말이다! 알겠나? 살려주는 이유 하나 더 추가! 너는 앞으로 나에 대해서 공부해! 파고, 파고, 파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알겠나? 그래도 공부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를 해야만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공력이 담긴 고함 소리였기 때문일까?
한 차례 폭풍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다.
비량이 한참이나 멀뚱히 서 있자, 진천랑이 혀를 차고는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죽여야 할 자라면?”
진천랑이 멈칫 선다.
“와라. 얼마든지 죽여줄 테니. 하나 제대로 공부한다면 내게 미안해질걸? 그땐 대가리 박고 충성 맹세하라고.”
진천랑이 낄낄거리며 걸어갔다.
비량은 그렇게 배에 검을 쑤셔 박은 채로 목석처럼 한참이나 서 있었다.
* * *
“그날 네 아버지가 왜 날 살려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평생을 도망자로 지내셨으니 일종의 광기였을 지도 모르고.”
긴 이야기를 마친 비량이 시선을 내려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호오, 이렇게 들어보니…… 나 전생에 꽤 멋있었네. 그나저나 내가 살려준 녀석 중 한 놈이었구나.’
사실 이따금씩 살려준 놈들이 있다. 그런데 유독 살벌한 전투가 벌어져서 적들을 전멸시켰을 땐, 무조건 한 놈 정도는 살려주었다.
아마 비량도 그 한 명이리라.
‘뭐, 막상 살려줄 때는 이런저런 멋들어진 말을 갖다 붙인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컸지. 흠흠.’
그 죽음의 현장을 최대한 생생하게 무림맹에 전하라고 살려둔 거니까.
어차피 늙은 구렁이 맹주는 자신을 뒤쫓는 걸 숙명처럼 여기는 인간이니 포기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무림맹에 공포심이라도 꽉꽉 채워줄 생각이었다. 그편이 추격자들과 조우했을 때 싸우기도 편하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비량은 그걸 조금 더 특별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살려준 놈들이 제법 되다 보니 기억을 못 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렇게 비가 내린 날이었지. 기억이 좀 날 것도 같네.’
비량의 말대로 정말 이런 재능 있는 청년이 평범한 길을 걷는다면 어떤 삶을 살지 궁금하긴 했었다.
다만 그 후로도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남의 삶을 관찰할 생각은 못했지만.
“그날 이후 나는 정말로 네 아버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날 내게 말을 건네던 네 아버지는 도저히 천살성 같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내렸습니까?”
비량이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쏴아아아.
비가 다시 침묵을 채운다.
“그래. 네 아버지는 천살성이 아니더구나.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네 아버지를 만났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대살성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군요.”
“놀라지 않네.”
“이미 누군가에게 들어서요.”
“할아버지?”
뭐야? 이미 영감하고도 한 번 만난 사이인가?
하긴, 뭐 이상할 건 없겠지. 아니, 이상한가? 아니지. 나에 대해 공부하느라 만났을 수도 있겠군.
아무튼.
“그래서 대가리 박았어요?”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