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회자정리(會者定離)
쩌어엉!
요란한 금속성이 울리고 남궁천이 눈을 부릅떴다.
“기생오라비……?”
“이왕이면 옥소공자로.”
옥소공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남궁천의 검봉이 적노파파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옥소공자가 나타나 부채를 펼쳐 든 것이다.
부채와 검봉이 부딪쳤음에도 금속성이 일어난 걸 보면 보통 부채가 아니거나 내공이 막강하거나. 아니면 둘 다일지도.
촤르르르륵!
미끄러지며 물러난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두 사람을 보았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파바바밧!
옥소공자와 적노파파가 동시에 합을 맞춰 공격해 왔다.
‘부채가 먼저!’
남궁천은 옥소공자의 단전에서 혈맥을 따라 빠르게 치솟아 오르는 공력을 확인했다.
저 정도의 속도로 손끝까지 전해진다는 것은 분명 부채를 던질 요량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새하얀 쥘부채가 활짝 펼쳐지면서 팽그르 회전하며 날아든다.
쉬쉬쉬쉬익!
남궁천이 얼른 허리를 젖히자 부채가 앞섶을 살짝 스치면서 지나갔다. 곧이어 몸을 벌떡 일으킨 남궁천이 그대로 팽이처럼 회전하며 적노파파를 향해 날아갔다.
파바바밧!
쩌까앙!
손톱과 검이 부딪치면서 다시 한번 금속성이 울린다.
‘과연 나이를 헛먹진 않았다는 거군!’
어떤 방식으로 쌓은 내공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공력이 상당히 심후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별도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지공 같은 경우는 심후한 내력이 필수이리라.
휘리리리릿!
찰나 남궁천은 뒤통수로 날아드는 부채를 인식하고는 얼른 몸을 비틀었다.
조금 전 스쳐갔던 부채가 허공을 선회하고는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촤아아악!
이번엔 부채가 어깨를 얕게 베며 지나갔다.
하지만 바로 뒤에 있던 적노파파의 팔뚝도 깊게 베며 지나쳤다.
촤아악!
“크읏!”
펄럭!
적노파파가 신음을 터뜨리며 물러났고, 남궁천은 앞섶이 완전히 풀어 헤쳐지면서 상의가 바람결에 펄럭였다.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자 적노파파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노파를 유혹하는고?”
“할망구, 늙어서 주책바가지군.”
남궁천이 냉소를 짓자, 적노파파가 도끼눈을 뜨며 달려들었다.
팟!
“네놈은 그 주둥아리에 예절 좀 박아야겠구나!”
“지금껏 내 주둥이에 예절 물린 사람이 없는데 할망구가 무슨 재주로?”
남궁천이 다시 바닥을 차고 적노파파에게 날아들었다.
하나 상대는 둘.
옥소공자가 측면에서 불쑥 끼어들자, 남궁천은 다시 보법을 밟으면서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쩌엉!
검과 부채가 부딪치면서 금속성이 울리고,
까라라라랑!
손톱과 검신이 부딪치며 불꽃을 터뜨린다.
두 사람 사이를 누비는 남궁천의 신형은 마치 한 마리 나비를 보는 듯하다.
창공을 불규칙하게 누비는 나비.
좀처럼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움직임만큼은 벌처럼 빠르다.
싸움이 조금 길어지자 옥소공자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무공이지?’
어느 때는 남궁세가의 검법을 보는 듯하고, 또 어느 때는 무당의 태극검을 보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화산의 매화검처럼 화려해진다.
그러다가도 종남의 중검처럼 무거워지기도 하고, 때론 흑도의 검법처럼 사이한 기운이 퍼지기도 한다.
어떤 무공이든 하나의 결이 있게 마련인데, 남궁천에게서는 그 결이 보이지 않는다.
남궁천의 입가에 광기가 스며들었다.
“왜? 헷갈려? 이게 바로 미친 나비춤이다. 이름하여 광접무(狂蝶舞)!”
쩌깡! 깡! 깡! 쩌캉!
정신없는 공방이 이어진다.
이제는 적노파파와 옥소공자마저 초식이니 뭐니 잊은 채로 본능에 이끌려 싸우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뜻.
반면 남궁천은 정말로 미친 나비가 되었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다가 벌처럼 쏘고, 다시 너풀너풀 날아다닌다.
‘이 아이…… 즐기고 있군!’
적노파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뭐 이런 아이가 다 있나?
이게 한낱 약관도 지나지 않았을 아이가 펼치는 검법이란 말인가?
내공은 그리 대단치 않다.
내공만 따지자면 자신이 훨씬 심후하다.
한데 이 어린 아이의 광접무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
초식이 없는 것 같은데 또 수많은 초식이 들어 있는 것 같고.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이 세상의 모든 무공을 죄다 쓸어 담은 것 같기도 하다.
“할망구! 좀 더 거칠게 달려들어야지!”
남궁천이 광기에 찬 고함을 내지른다.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은 진천랑으로 돌아가 있었다. 피에 절은 도망자 시절로. 수많은 적을 도륙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쩌저어엉!
한 차례 격돌이 일어나고, 남궁천이 잠시 물러나자 적노파파가 독문무공인 섬전지홍(閃電指紅) 초식을 펼쳐왔다.
붉은 빛줄기 열 가닥이 남궁천의 전신 요혈로 날아든다. 거기에 옥소공자가 부채를 휘둘러온다.
‘음?’
한데 옥소공자의 공력 흐름이 다소 기이하다. 손끝까지 집중된 공력이 실처럼 가늘게 갈라지면서 십수 가닥으로 나뉘는 게 아닌가?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남궁천이 얼른 태을신공을 펼쳤다.
후우우웅!
방어에 특화된 태을신공을 운기하면서 태을검법을 펼쳤다.
우우우우웅!
검기의 파도가 넓은 면적으로 굵직하게 일어난다.
찰나지간 열 가닥의 섬전지홍과 옥소공자의 부챗살을 타고 뻗어 나온 세침이 검기의 파도에 부딪히며 휩쓸린다.
따다다다다다앙!
촤촤르르륵!
남궁천이 미끄러지듯 물러서며 중심을 잡자 회심의 공격을 퍼부었던 적노파파와 옥소공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옥소공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그건 종남의 태을검법?”
“도대체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적노파파가 콧잔등에 주름을 가득 잡으며 묻는다.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나? 강호신룡, 남궁천.”
“이노옴!”
적노파파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순간,
촤아악!
남궁천이 벽라검으로 바닥을 훑자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면서 적노파파를 덮친다.
“크읏! 이 비겁한……!”
“거, 듣기 거슬리네. 둘이 생도 하나를 공격하면서 모래 좀 뿌렸다고 비겁해? 저기 부챗살에 세침 숨겨서 공격하는 놈도 있는데?”
“이익!”
적노파파가 힘겹게 눈을 뜨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어느 샌가 바로 앞에 다가선 남궁천이 씨익 웃는 게 아닌가?
“남의 물건을 탐하면 안 돼.”
서컥!
순간 적노파파는 목 아래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다가 세상이 기우는 걸 보았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
머리를 잃은 적노파파의 몸통이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천천히 넘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푸욱!
“어?”
적노파파의 복부를 뚫으며 무언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적노파파의 몸에 가려져 초견파공안이 통하지 않았다.
적노파파의 배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로 곧게 접은 부채!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채가 그대로 남궁천의 단전을 향해 날아드는 찰나,
쉬이이이이잇!
한 줄기 질풍이 불어 닥치더니 남궁천과 옥소공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촤르르륵!
“…….”
“비량……?”
남궁천과 옥소공자가 동시에 움직임을 뚝 멈추고는 거짓말처럼 나타난 비량을 돌아보았다.
비량이 생긋 웃는다.
“뒤에 ‘교관님’이라고 붙여야지?”
“아…… 예…….”
남궁천이 멍하니 대답하는 사이, 옥소공자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커억!”
츄아아아아아!
순간 그는 왜 자신의 상체가 사선으로 미끄러지면서 갈라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철퍼덕!
옥소공자가 고깃덩이 같은 모습으로 쓰러지자, 남궁천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우. 무식하게 싸우시네요.”
“생도를 구하겠다는 급한 마음에.”
“아, 예.”
“너야말로 멀리까지도 왔구나. 도중에 갈림길이 있어서 찾느라 애 좀 먹었다.”
“안 오셔도 괜찮았을 텐데.”
“그럴 수야. 생도가 위험에 빠지면 응당 스승으로서 구할 책임이 있는 것을.”
“뭐,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사실 나는 네 생각보다 거칠게 살아온 몸이다. 웬만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나는 원래…….”
“쉿!”
“으응?”
비량이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자,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협곡의 어두운 곳을 빤히 노려보았다.
비량이 표정을 굳혔다.
“빠르게 말하마. 난 원래 무림맹 비밀…….”
“조용히 좀 하세요!”
“아, 그래.”
비량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았지만, 남궁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제야 비량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서 어둠을 향해 말을 던졌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모습을 드러내고 대화로 풉시다.”
“후후후.”
어둠 속에서 탁한 웃음소리만 흘러나온다.
순간 비량이 움찔 놀라더니 남궁천 옆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어우씨, 깜짝이야. 진짜 있었어?”
“예?”
남궁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자, 비량이 속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말한다.
“난 또 네가 괜히 분위기만 잡는 줄 알았지.”
“뭐라고요?”
“자자, 대충 넘어가고.”
비량이 얼른 손을 젓는다.
남궁천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지? 이 인간?’
분명 조금 전 보여준 신위를 보면 엄청난 고수임이 틀림없을 텐데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능력과 기감이 이렇게 따로 놀 수도 있는 건가?
그러는 사이 협곡의 그늘진 곳에서 한 인영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특히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은 그의 인상을 더욱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적노파파와 옥소공자가 부곡주라고 불렀던 사내다.
“나를 눈치채다니. 제법이구나, 꼬마.”
그러자 비량이 남궁천 앞으로 스윽 나섰다.
“누구신지?”
지금까지 낭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비량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뜻.
“그쪽이 비량이군.”
“그쪽은?”
사내가 대답 대신 남궁천과 비량을 번갈아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그건 더 이상 여기에 없는 거군.”
남궁천이 움찔거리고 바라보는데, 사내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걸어가며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하여튼 미덥지 못한 것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찰나, 비량의 신형이 귀신처럼 날아갔다.
쉬이이이익!
쩌어어엉!
협곡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촤르르르르륵!
사내와 비량이 십여 장이나 미끄러지며 간신히 멈췄다.
어느새 비량의 얼굴에서는 예의 그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 비량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통성명은 하고 가셔야지.”
잠시 욱신거리는 손을 바라본 사내가 피식 웃는다.
“재미있군. 과연 방심은 허용하지 않는 상대인가?”
구오오오오.
어느새 사내의 표정도 굳어지더니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비량이 입매를 슬쩍 비튼다.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드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