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84화 (184/508)

183. 처맞을 준비는 됐고?

다급해진 도지백이 다시 한번 채선일을 채근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단주님!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펴보시면……!”

“그만하시오!”

채선일이 전과 달리 목소리를 높이더니 냉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 내 눈을 의심하는 거요?”

“그게 아니라…….”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소. 해서 도 문주가 가져온 물건이 진짜라고 생각했소! 한데 이제 보니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군! 그야말로 저잣거리에서 푼돈 몇 푼이면 살 수 있을 물건이 아닌가!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지만, 이런 물건을 진품이라고 착각한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눈알을 파 버리고 싶은 심정이오!”

“그럴 수가……!”

주춤주춤 물러나던 도지백을 노려보며 이사흠이 말을 이어갔다.

“단주님, 이제 제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 저자는 흑산채와 손을 잡고 표행을 습격했던 비열한 자입니다. 텃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만약 비월문주님과 견습생도들이 아니었다면 이번 표행은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표물을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가짜 표물을 대비책으로 마련해 두자는 것도 사실 남궁 소협의 제안이었지요.”

“끄음. 이 국주. 정말 미안하게 됐소. 내가 큰 오해를 했소. 용서하시오. 자네에게도 사과하겠네.”

채선일이 남궁천을 돌아보며 정중히 사과했다.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에이, 뭐 그 정도로요. 이제라도 오해를 푸셨다니 다행입니다. 이게 다 중간에서 농간질을 한 저 비열한 놈 때문이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

채선일이 식은땀을 닦고는 휙 돌아서서 도지백을 노려보았다.

“도 문주!”

“예, 예?”

“이제 그쪽이 설명해야 할 차례 같소만.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정말 흑산채와 손을 잡고 내 물건을 노렸던 거요? 그러고도 지금 뻔뻔하게 상단을 찾아와서 농간질까지?”

“아, 그, 그건 오햅니다. 그러니까 그게 저어……!”

“오주상단이 그리도 우스워 보였단 말인가!”

채선일이 목소리를 높이자 추상 같은 위엄이 전해진다.

순간 장내의 오주 상단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아앙!

“헛!”

도지백이 헛바람을 삼키며 물러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순간 검을 뽑아 든 상단 무인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채선일 역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비월문주 연추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끌끌 차고, 보기도 싫은 남궁천은 연신 이죽거리며 한심한 눈초리를 보낸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절망감 끝에 고개를 쳐든 것은 모종의 분노.

‘오냐, 이 개 같은 것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어금니를 뿌득 간 도지백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춤의 도를 뽑아 들었다.

차앙!

“엇!”

“단주님!”

도지백의 도신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상단주 채선일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상단 무인들은 물론, 연추량과 이사흠도 화들짝 놀라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차차아앙!

검을 뽑아 든 연추량이 날카롭게 외쳤다.

“도 문주! 이 무슨 짓이오?”

“보면 모르겠나? 인질을 잡은 거지!”

상황이 급박하게 흐르자, 인피면구를 쓰고 있던 강상도 역시 뒤로 돌아서며 칼을 뽑았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찬다.

“쯧쯧. 가지가지 한다.”

“노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네놈이라는 걸 모르느냐?”

도지백이 버럭 소리치자 남궁천이 귀를 후빈다.

“와아, 남 탓 오지고.”

“뭐, 뭐?”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앞날이 창창한 놈이 상황 좀 꼬였다고 이렇게까지 막 나가?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무림맹 뇌옥에서 콩밥 좀 처먹어야 정신 차리겠다.”

“어어? 가까이 오지 마라! 인질이 보이지 않느냐!”

도지백이 도신을 들어 올려 채선일의 목에 바짝 붙였다.

졸지에 인질 신세가 된 채선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지백을 달랬다.

“이, 이보시오. 도 문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닥쳐! 어차피 다 잃은 마당에 내 한 몸은 빠져나가야 할 것 아닌가!”

“여길 어찌 빠져나가려고…… 이미 본 단 무인들이 겹겹이…… 헛!”

도신이 목젖을 압박하면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지경.

연추량과 이사흠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진정하시오, 도 문주! 더 이상 실수하지 마시오!”

“단주님을 어서 풀어주시오!”

하나 강상도와 등을 진 도지백은 채선일을 순순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으로선 몸을 안전하게 빼내기 위해서라도 채선일이 필요했다.

“닥쳐라!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면 단주의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아, 그럼 그냥 죽이든지.”

“뭐, 뭐……?”

도지백이 입을 쩍 벌리고 소리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어어? 오지 말라니까!

도지백이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등이 부딪친 강상도가 짜증스럽게 외친다.

“아, 왜 자꾸 밀어대는 거요?”

“저, 저놈이……!”

저도 모르게 대꾸하던 도지백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버럭 외쳤다.

“거, 거기 안 서? 단주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글쎄, 죽일 거면 죽이라니까.”

남궁천의 거침없는 말에 도지백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추량과 이사흠도 핼쑥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 소협…… 그건 좀…….’

가장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채선일.

‘아니, 지금 저 소협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심리전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거침없이 다가오는 것 아닌가? 정말 자신의 목숨 따윈 상관도 하지 않는 것처럼.

“크읏!”

도지백이 도신을 더욱 바짝 끌어당기자 칼날이 목을 파고들어온다.

이제 도신을 타고 흐르는 피가 방울져서 바닥에 뚝뚝 떨어질 지경이다.

채선일이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남, 남궁 소협! 잠, 잠깐……!”

“아, 걱정 마세요. 혹시 돌아가시면 제가 복수는 확실하게 해드릴 테니까. 저놈 모가지를 비틀어서 얼굴이 등으로 가게 만들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나도 살고 봐야지? 응?

하지만 남궁천은 채선일의 속내를 파악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남궁천이 어깨를 빙글빙글 잡아 돌리며 말한다.

“뭐 하고 있어? 죽일 거면 빨리 죽여. 단주님도 네놈 손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굴욕을 느끼기 싫으실 거야. 우리가 불의에 굴복하는 걸 보기 싫으시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장렬히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으실 거란 말씀.”

아니, 그런 각오 전혀 안 되어 있다고! 나도 살고 싶다고, 미친놈아!

남궁천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도지백이 그만큼 물러났다.

“이 미친놈이……!”

“상단에 쳐들어와서 상단주 목에 칼 들이댄 놈이 미친놈이지, 왜 내가 미친놈이냐?”

“너 이 새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못 죽일 줄 아는 것이냐?”

“아니라니까? 시원하게 그냥 죽여보라니까?”

이쯤 되자 채선일의 마음이 더욱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아니, 아까부터 뭘 자꾸 죽이래, 이 미친놈아! 나 살고 싶다고!

연추량과 이사흠도 안절부절못하면서 상황만 지켜보았다.

하나 남궁천만은 여유가 흘러넘친다.

‘내가 궁지에 몰린 놈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지.’

이런 경우는 전생에 숱하게 겪었다.

물론 지금과는 반대의 입장이었지만.

즉, 자신이 도지백처럼 인질을 잡고 무림맹 놈들과 대척한 경우였다. 이럴 땐 무조건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높은 자리에 있는 놈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도지백의 이 같은 대응은 십 점 만점에 십 점!

하지만 이때도 가장 난감한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인질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때다. 혹은 인질이 제 목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공격하길 원할 때.

이럴 땐 진짜 짜증 나고 난감하다.

쓸모도 없는 인질을 죽이자니 눈이 뒤집혀 달려들 놈들이 신경 쓰이고, 살려두자니 인질의 역할을 못해 걸리적거리기만 할 때.

‘환장하겠지?’

아닌 게 아니라 도지백의 마음이 딱 그랬다.

‘이런 니미럴! 뭐 저런 게 다 있어? 단주를 죽여 버리라니?’

진짜 성질대로 확 죽여 버려?

하지만 그랬다간…….

“그것만 알아둬. 단주가 죽는 순간 너도 뒈지는 거야.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테니까.”

남궁천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하다.

무슨 애새끼 웃음이 저렇게 살 떨리는가?

한낱 견습생에게서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거야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와 마주친 기분이 아닌가? 남궁천 주위로 수십, 수백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은 환상이 펼쳐진다.

도지백이 얼른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스스로를 타이르고는 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남궁천이 다시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어? 오지 마! 죽인다고 했지! 오지 말라고!”

“아 글쎄 빨리 죽이라고!”

저 미친 꼴통 새끼는 정말로 단주가 죽든 말든 상관없는 모양이다.

오냐, 그렇다면 이리 된 이상 자신에게도 독기가 있다는 걸 보여주리라.

치욕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발악을 하며 죽는 쪽을 택하리라.

결심이 선 도지백이 남궁천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뇌까렸다.

“남궁천이라고 했나? 너는 나를 너무 우습게 봤다. 이 모든 건 네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순간 그가 도파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연추량과 이사흠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아앗!”

“안 돼!”

안 되긴 개뿔!

그럼 애초에 저 건방진 애송이가 설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지! 이젠 단주를 죽이고 결사항전의 각오로 싸워주마!

찰나지간 도지백이 가차 없이 칼을 그었다.

서걱!

공력을 실은 도신이 섬뜩한 파육음을 일으키며 뼈째 잘라 버린다.

지켜보던 연추량과 이사흠이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린다.

“어엇!”

툭! 츄아아아아!

살덩어리가 떨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도지백이 입매를 비틀었다.

“애송아, 이제 알겠느냐? 도발도 함부로 하면 골로 간다는 걸? 네놈이 과연…… 응?”

저 녀석 표정이 왜 저리 무심하지?

지금쯤 놀라 자빠져야 할 일이 아닌가?

단주의 목을 그어 버렸으니 경악해서 나자빠져야 할 터인데.

가만…… 그런데 왜 내 손이……?

순간 움찔거린 도지백이 눈을 내려깔고 잘려 나간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헉!’

분명 채선일의 목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잘려 나간 건 자신의 왼손이 아닌가?

상황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지독한 통증이 뇌리를 들쑤셨다.

“크억!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에 가득 차올랐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왕좌왕할 때, 백무극만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환술……?’

이전에 남궁천과 비무를 치를 때도 환술이 아닌가 싶었던 경우가 있긴 했지만, 다시 보니 정말 환술 같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이 쓰는 수법과 몹시 유사하다.

대체 남궁천이 어떻게?

백무극의 어림짐작은 정확했다.

남궁천은 도지백과 눈이 마주친 순간 공력의 흐름을 바꾸어 환술을 걸고 착시를 유발시켰다.

극도의 긴장 상태였기에 환술이 더욱 잘 통했다.

짧은 순간 도지백은 자신의 손목을 채선일의 목으로 착각하고 그어 버린 것이다.

하나 이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도지백으로서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

도지백이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틈을 타서 채선일이 얼른 몸을 빼내자, 남궁천이 성큼성큼 다가서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거, 처맞을 준비 오래도 걸렸다.”

도지백이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드니, 남궁천이 귀신처럼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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