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차선의 차선책
도지백이 채선일을 따라 걷는데, 강상도가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한참 떨어지게 한 다음 낮게 속삭였다.
“대체 어쩔 생각이오?”
도지백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조용히 대꾸했다.
“뭐가 말이오?”
“장흥표국을 만나면 우리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다 까발릴 텐데 어찌 감당하려고?”
도지백이 피식 웃었다.
“증거 있소?”
“뭐요?”
“당신과 내가 손을 잡았다는 증거 말이오.”
“으음.”
도지백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장흥표국은 포로를 잡아두지도 않았소. 뭐, 표행에서 습격을 당했다고 포로를 잡아서 질질 끌고 다니는 일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나 그게 가장 큰 실수가 된 셈이지. 증인이 없는 셈이니까.”
“하지만 상단주가 그들의 말을 믿으면?”
“방금 채 단주의 표정을 보지 못했소? 벌써 표행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또 실패한 표국의 말을 신뢰할 것 같소? 이미 채 단주의 마음은 반 이상 내게 넘어온 상황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채 단주요.”
강상도가 침음을 흘리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도지백의 말이 옳다.
애초에 도지백은 물건만 건네주고 미련 없이 떠나려고 했을 뿐이다. 모든 판을 깔아준 건 채선일이 아닌가?
도지백이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기호지세(騎虎之勢)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지금 물러나면? 다 잃는 거외다. 채주야 다시 산채를 꾸려서 약탈이나 일삼으면 된다지만, 본 파는 계림에 발을 붙이지 못할 수도 있소. 아시겠소? 우린 지난 습격을 실패하면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상황이란 말이오.”
하긴.
강상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위험이 높을수록 얻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이리 망하나, 저리 망하나.
이왕이면 한탕 해먹을 수 있는 기회라도 가지는 편이 나으리라.
각오를 다진 강상도가 다부진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 * *
“손님 접대가 늦네.”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는 중얼거리는 남궁천.
견습생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기가 찰 정도로 거만하지만, 표행에 참여한 사람들 중 누구도 남궁천을 나무라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이사흠은 빙그레 웃으며 그런 남궁천을 달래주었다.
“그래도 광서성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이라네. 단주께서 많이 바쁘신 모양일세.”
“그래도 표물을 이렇게 안전하게 가져왔는데 어느 정도 환대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아마 상단주께서 그리하실 걸세. 오늘은 다들 모처럼 푸짐한 먹거리와 편한 잠자리가 제공될 걸세. 그동안 먼 길, 궂은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비단 남궁천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표사들과 쟁자수를 포함해 모두에게 전한 말이다.
‘그렇다곤 해도 상단주께서 조금 늦으시긴 하군.’
이런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예전에는 늘 표행이 도착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아랫사람들까지 일일이 챙겨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월문주를 곁에 두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대접이 소홀한 상황.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테지?’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는데 마침 저만치 채선일이 들어섰다.
“아, 저기 오시는……!”
말을 꺼내던 이사흠이 흠칫거리고는 채선일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저자가 왜 여기에!”
이사흠의 눈썹이 격하게 떨렸다.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연추량도 마찬가지.
“저, 저……!”
채선일 뒤에서 뻔뻔한 얼굴로 걸어오는 자는 다름 아닌 상봉파 문주 도지백이 아닌가?
협곡에서 사생결단을 낼 만큼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사흠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채선일을 보고 따지듯 물었다.
“단주님, 저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채선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잖아도 계림의 텃세에 대해서 듣고 왔던 터라 그가 보기에는 이사흠이 괜히 삼봉파를 견제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허! 국주께선 내가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구려. 본 단에 객으로 오신 분에 대해서 더 궁금한 걸 보니.”
목소리가 냉랭하기 짝이 없다.
그제야 이사흠이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사죄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제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셨을꼬? 그만하면 이젠 놀랄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예?”
“됐고. 물건은?”
목소리가 시종 쌀쌀맞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표물을 운반해 온 이사흠으로서는 영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정문 앞에서 정비 중입니다.”
“정비 중이라. 정비할 만큼 물건이 남아나긴 한 모양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됐소. 나는 들을 준비가 됐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말해보시오.”
“표행 중에 있었던 일 말씀이신지요?”
“그럼 뭐겠소?”
“아, 예…….”
이사흠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연추량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자 연추량이 포권을 하며 나섰다.
“단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늘 어쩐지 단주님의 기분이 영 언짢아 보이는데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으음. 표행 중에는 다소 마찰이 있었습니다만 무사히 잘 넘겼습니다.”
그러자 채선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무사히 잘 넘겼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아아, 듣고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못 참겠네.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귀를 파며 짝다리를 짚고 선 남궁천이 눈살을 잔뜩 구긴 채 서 있었다.
“넌 누구냐?”
“강호신룡, 남궁천인데요.”
“강호신룡……?”
별호인가?
아니, 보통 저런 별호를 자기 입으로 내뱉는가?
헛웃음이 나온다.
“어른이 대화를 나누는데 불쑥 끼어들다니. 버르장머리가 없…….”
“거, 먼 길 온 사람에게 까탈스럽게 이러쿵저러쿵 쏘아붙이는 것도 버르장머리가 있는 건 아니죠.”
“뭐, 뭣이?”
“아, 그러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요. 먼 길 온 사람에게 이게 뭐예요?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궂은 길 뚫고 안전하게 표물을 가져왔으면 차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건 너무 기본 아닌가?”
“저, 저……! 저 싹수가 노란 놈은 대체 뭐요?”
채선일이 발끈해서 묻자, 이번엔 이사흠과 연추량도 물러서지 않았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단주님. 저 소협은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파견 된 견습생입니다. 무연회에서 우승하여 강호신룡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지요.”
“강호신룡 덕분에 표행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남궁 소협의 말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추량의 표정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뭐요?”
이쯤 되자 채선일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좋소! 단도직입적으로 갑시다. 나는 조금 전 놀라운 소식을 들었소.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지. 바로 당신들이 표행 중에 흑산채를 만났고, 표물을 탈취당했다는 소식 말이외다.”
“예? 그게 대체 무슨……?”
이사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한편으로는 채선일 뒤쪽에 선 도지백을 바라보았다.
“그 잃어버린 물건을! 바로 여기 계신 도 장문인께서 가져왔단 말이오! 아시겠소?”
“아…….”
그제야 대략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는 듯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데 그 반응이 어째 영 미적지근하다. 그래서 채선일은 더 기가 찼다.
‘허! 이젠 표물을 잃어버리고도 예사로 여기는구나!’
한데 이사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단주님께서 속으신 겁니다.”
“뭐라?”
“저자는 흑산채와 손을 잡고 표행을 덮쳤습니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셨지요? 저자와 흑산채를 상대로 사투를 벌이긴 했으나 잃은 물건은 없습니다.”
그러자 도지백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국주. 그렇게까지 말씀하셔야겠습니까? 저는 굳이 귀하와 척을 질 생각이 없습니다. 비월문도 마찬가지고요.”
“척을 질 생각이 없는 자가 흑산채와 손을 잡고 표행을 덮치…….”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이렇게까지 절 모함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계림에서 떠나길 바라는 겁니까?”
“허!”
도지백이 순간 채선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단주님. 계림에서 터를 잡은 저의 잘못이 큰 것 같습니다. 오늘 나눈 얘기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소. 나도 더는 못 봐주겠군. 이 국주! 아무리 비월문과 사이가 돈독해도 그렇지 그대들이 잃은 물건을 되찾아준 이에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오? 실망이 크군!”
“단주님, 이들은 정말로 흑산채와 손을 잡고…….”
그러자 도지백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너무하는군! 이 국주! 내가 흑산채 놈들과 손잡았다는 증거가 있소?”
그때 다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
“있으면?”
“뭐라?”
도지백이 뺨을 씰룩이면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있으면? 처맞을 준비는 됐고?”
“네 녀석은 도대체 뭘 믿고…….”
“단주님.”
남궁천의 부름에 채선일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날 불렀나?”
“예. 혹시 사라졌다는 물건, 이겁니까?”
남궁천이 말을 마치자 마침 윤종승이 상자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남궁천이 덮개를 열어보자 놀랍게도 그 안에 삼연좌불상이 떡하니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게 어떻게……?”
채선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곁에 서 있던 도지백도 마찬가지.
‘뭐, 뭐야? 삼연좌불상이 왜 여기에도!’
혹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나?
아니다. 분명 삼연좌불상은 하나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뜻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지백이 발끈해서 외쳤다.
“단주님! 분명 저놈들이 가짜를 구해온 것일 겁니다! 잃은 물건을 가짜로 채운 게 틀림없습니다!”
“흐음.”
채선일이 진중한 표정이 되어서는 상자로 가까이 다가가 삼연좌불상을 꺼내 들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삼연좌불상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총관!”
“예, 단주님.”
“도 문주님이 가져온 삼연좌불상을 가져와보게.”
잠시 후 총관이 또 하나의 삼연좌불상을 들고 왔다.
똑같은 모양의 삼연좌불상.
하지만 둘 중 하나는 가짜다.
도지백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켜보았다.
반면 이사흠과 연추량은 느긋한 표정이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만약 남궁천이 아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구나!’
표행을 막 떠날 때였다.
“이대로 출발하려고요?”
“왜 또?”
“흑산채가 노릴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런데?”
“뭔가 최소한의 대비책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대비는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겠지. 넌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라.”
어휴, 그때 정말 그냥 떠났더라면 지금쯤 웃는 건 저 뻔뻔한 도지백이 되었을 테지.
다행히 이사흠은 남궁천의 말을 마냥 흘려듣진 않았다.
그는 출발 직전 혹시 생각해 둔 게 있느냐고 물었고, 그때 남궁천이 꺼내 든 것이 바로 가짜 삼연좌불상이었다.
“이번 표행에서 제일 중요한 표물이라고 들어서 구해봤어요. 만약을 대비해서 이 가짜를 진짜처럼 취급한다면 나름 눈속임이 되지 않을까요? 뭐, 써먹을 일이 없으면 더 좋은 거고.”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은 법.
남궁천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함께 이송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지백이 그 가짜 삼연좌불상을 탈취한 것이다.
한참 후에야 채선일이 눈자위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이게…… 가짜였군.”
순간 그가 더없이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도지백을 노려보았다.
졸지에 상황이 역전되자 도지백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단, 단주님! 다시 한번 확인해주십시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저게…….”
“자자, 시끄럽고.”
불쑥 들린 목소리에 도지백의 시선이 돌아갔다.
‘또 저놈인가!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남궁천이 이죽거리며 걸어왔다.
“이제 처맞을 준비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