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82화 (182/508)

181. 차선의 차선책

“삼봉파 장문인이?”

채선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아닌가? 일면식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삼봉파에서 왜?”

“물건을 전해주려고 왔답니다.”

총관도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보고를 올리면서도 그 역시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삼봉파가 오주상단에 전할 물건이 뭐가 있단 말인가?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을 터. 오주상단이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러잖아도 삼봉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터라 더욱 공교롭게 느껴진다.

“허참. 일단 직접 만나보지. 지금 어디에 계신가?”

“지객당으로 모셨습니다.”

“가세.”

“예, 단주님.”

총관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앞장섰다. 총관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채선일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혹시 장흥표국이 실패해서 삼봉파를 보냈나?’

말이 안 된다.

삼봉파 사람을 보내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문인이 직접 올 일이 아니다.

‘뭐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이 기회에 삼봉파가 표국 사업에 관심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이왕 길을 여러 곳으로 뚫어두면 좋은 일.’

어차피 상인에게 사람 만나는 일이란 결국 사업의 일환이다.

삼봉파가 그리 날로 강성해지고 있다면 언젠간 한 번 만났어야 할 인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두 사람은 지객당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내가 몸을 일으키고는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단주님.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봉이라는 보잘것없는 문파를 이끄는 도지백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오주상단 채 모입니다. 이리 귀한 손님을 대접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허허,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인사치레에 가까운 덕담이 잠시 오갔다.

하나 채선일은 상인이었다.

실리도 없는 덕담만 주야장천 떠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적당한 순간에 본론을 꺼냈다.

“먼 길을 오신 것 같은데 어찌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오신 건지요?”

“허허, 누추하다니요. 광서성에서 오주상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물론 처음부터 이곳으로 올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마침 오주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귀 문에 전할 물건이 생겨서 말입니다.”

“전할 물건이라면……?”

“일단 보시지요.”

말을 마친 도지백이 옆에 선 강상도에게 눈짓을 보냈다.

물론 강상도는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도지백의 수행인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가 탁자 위로 커다란 상자를 올려놓더니 덮개를 열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순간 채선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삼연좌불상!”

“과연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주인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로군요.”

“아, 아니. 이게 어떻게 여기에……?”

채선일이 도지백과 삼연좌불상을 연신 번갈아 보았다.

도지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말씀 어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다 주웠습니다.”

“오다 주워……?”

채선일이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그치듯 물었다.

“장문인,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예, 사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오주로 내려오던 길이었는데, 도중에 흑산채와 맞닥뜨리게 되었지요.”

“허어. 흑산채의 악명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더니…….”

“그들은 이미 저보다 일찍 그곳을 지나가던 표행을 덮쳐서 많은 전리품을 챙긴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저를 또 덮친 것이지요. 참으로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그러자 곁에 묵묵히 서 있던 강상도가 영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하나 채선일은 강상도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물론 장문인께서 여기에 멀쩡히 계신다는 건 그들이 습격에 실패했다는 뜻일 테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제가 수행인만 데리고 있어서 방심했을 겁니다. 가능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지만, 먼저 걸어오는 시비를 피할 수도 없었지요. 뭐, 사실 제 성격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탓도 있었고요.”

“허어! 그럼 장문인께서 그들을 꺾고 이 물건을……?”

“그렇습니다. 제가 흑산채의 전리품을 압수했지요. 그때 이 삼연좌불상을 본 겁니다.”

“아……!”

채선일이 탄식을 터뜨렸다.

이렇게라도 잃은 물건을 되찾은 게 다행이지만, 장흥표국이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소리니 시름이 절로 깊어졌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총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장문인께서는 그 물건이 본 단의 것이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놈들을 추궁했습니다. 그랬더니 오주상단으로 가던 표행을 습격해서 탈취한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걸 전해주려고 일부러 와 주었군요.”

채선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하자, 도지백이 포권하며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 몸담은 자로서 어찌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이왕 나선 김에 잃은 물건을 애타게 찾고 계실 단주님께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거 참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별말씀을요.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요.”

도지백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면서 담담하게 대꾸했다.

옆에 선 강상도는 그런 도지백의 뻔뻔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도지백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저는 물건을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순간 강상도가 움찔거리고는 도지백을 보았다.

응? 이대로 간다고?

한데 채선일이 얼른 나서서 말렸다.

“이대로 가시다니요? 본단이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장문인께 사례를 해야 할 일입니다.”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 세상에는 공짜란 없는 법입니다. 제가 만약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그만큼 손해 볼 일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갚도록 해주시지요.”

“허참, 은혜라니요. 살다 살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했을 뿐인데 은혜라고 하시는 분은 또 처음입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허, 장문인. 이렇게 그냥 가시면 제가 서운합니다.”

채선일이 끝내 소매까지 잡고 놔주질 않자 지켜보던 강상도가 오히려 똥줄이 탈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지백은 정말로 저 혼자 착한 척만 하고 돌아갈 기세처럼 보였기에.

그만큼 도지백의 연기는 완벽했다.

이쯤 되자 도지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주님, 정말 사람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러지 말고 혹시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삼연좌불상은 이번 표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그걸 장문인께서 찾아주셨으니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흐음. 정 그러시다면…….”

이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갈 모양이군.

강상도가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짓는데, 도지백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에 도착할 장흥표국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응? 그건 왜…….”

“흑산채는 계림 일대에서 무서운 조직입니다. 장흥표국도 용맹하게 싸워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같은 계림의 무인으로서 마음이 쓰이는군요.”

“허어……!”

도지백의 아량에 채선일이 입을 딱 벌렸다. 물론 옆에 선 강상도도 그 뻔뻔함에 입을 쩍 벌렸다.

“하나 상인으로서 거듭된 실수를 마냥 묵인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장흥표국에 더 따지지는 않겠지만, 그들과 더 이상 거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아. 정말 안타깝군요.”

도지백이 진심이 넘쳐흐르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와, 이 새끼는 진짜! 진짜 개새끼다!’

강상도가 다시 혀를 내둘렀다.

때마침 채선일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도지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문인.”

“예, 단주님.”

“하면 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이라 하시면?”

“그러잖아도 흑산채가 기승을 부려서 곤란하던 차였습니다. 장흥표국은 이걸로 벌써 세 번째 표행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흥표국과 완전히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지요.”

“예, 오주상단의 입장도 있을 테지요. 제가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장문인의 그 아량에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해서 내게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오주상단이 거래를 끊으면 어차피 장흥표국은 쇠망의 길로 걸어가게 될 겁니다. 하니 차라리…….”

“차라리?”

“본단이 표국을 인수하고 그 관리를 삼봉파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예에?”

도지백이 진심으로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만 옆에 선 강상도는 이것도 연기인지 진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도지백은 진짜로 놀랐다.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나올 줄은 그 역시 생각지 못했으니까.

이거야말로 미끼를 던졌더니, 물고기가 곧바로 어망으로 뛰어든 꼴이 아닌가?

이쯤 되자 도지백도 욕망이 꿈틀거린다.

당장 계약서부터 쓰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그런 중책을…….”

“장문인! 나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도지백이 채선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긴 급할 테지.

계림에서 오는 건 장흥표국이 도맡고 있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으니 차선책이 필요하리라.

옆에 선 강상도가 뭘 고민하냐는 듯 바라본다.

“흐음.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정신이 없군요.”

“원래 삶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법이지요.”

채선일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듯이 바라본다.

과연 오주상단주의 추진력이 남다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거침없을 줄은 몰랐다.

도지백이 한참 만에야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하하하! 고맙습니다! 그간의 근심이 싹 해결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요? 먼 길 오신 김에 계약서도 작성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원시원해서 좋네.

도지백이 내심 미소를 숨기고는 잠시 망설이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지요. 어차피 다시 오기엔 거리가 있으니.”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이리로 오시…….”

때마침 시종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단주님! 장흥표국이 도착했습니다!”

“……!”

순간 장내의 사람들이 모두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특히 도지백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장흥표국이 벌써? 생각보다 빨리 왔군.’

전력 이탈이 심해서 꽤 늦어질 줄 알았는데, 용케도 서둘러 온 모양이다.

한편 채선일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잃은 게 많아서 짐이 가벼웠나 보구나. 이리도 빨리 도착한 걸 보니.”

“예?”

“아니다. 내 직접 가마.”

“예, 단주님.”

시종이 물러가자 채선일이 도지백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시지요.”

“예? 저도요?”

“예, 장흥표국이 잃은 물건을 찾아주신 분 아닙니까? 또 앞으로 표국 관리를 맡으실 분이기도 하고.”

“그렇긴 한데…….”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라기보단…… 사실 본 파가 신흥 문파이다 보니 계림에서 견제를 좀 받고 있습니다.”

“아, 텃세로군요.”

“뭐, 그런 셈이지요. 이해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최근 비월문의 텃세가 사뭇 심해서…… 며칠 전에는 제 아들이 비월문을 방문했다가 부상을 당해 돌아온 적도 있고요.”

“허어! 그런 일이! 제가 못 참겠군요. 장문인께서는 그래도 같은 지역이라고 이리도 신경을 쓰시는데!”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갑시다. 가서 그들의 낯짝을 봐야겠습니다.”

채선일이 씨근거리며 말하자, 도지백이 얼른 다짐을 받았다.

“하면 단주님께서는 그들이 뭐라고 저를 모함한들 흔들리지 말아 주십시오. 어차피 증거도 없는 모함들일 뿐일 테지만요.”

“걱정 마십시오! 표물을 잃은 자들이 뭐라 농간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채선일이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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