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차선의 차선책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쟁자수가 소리치자 표사들이 우르르 달려간다.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신음과 비명, 고함과 울음소리가 마구 뒤섞인다.
“이봐! 이쪽도 들것이 필요해!”
“여기도 급하니까 서둘러!”
정말이지 혼이 쏙 빠져나갈 것처럼 분주한 현장.
비월문주 연추량이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렸다.
“아군 부상자들을 빠짐없이 살펴라! 위급한 환자는 표행에서 제외시키고 곧장 제일 가까운 의원으로 이송해라!”
“살아남은 적들은 어쩔까요?”
“죽든 살든 내버려 두어라!”
연추량이 차갑게 일렀다.
원래 그의 성품이라면 적일지라도 치료를 해주겠지만, 이번에는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저들에게 명분이라곤 없지 않던가? 숨이 붙은 자들을 죄다 찾아내서 확인 살인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꾹 참는 중이었다.
‘애써 찾아내 죽일 것까지야 없지만, 위독한 자들을 살려줄 만큼 정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냉담한 표정을 지은 연추량이 다시 목청을 높였다.
“다시 말한다! 부상당한 아군을 치료하고, 위독한 환자는 곧장 가까운 의원으로 이송한다! 삼봉파와 흑산채 놈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전력 이탈이 심한 상황.
부상자들을 포로로 데리고 다닐 수도 없다.
딱히 써먹을 데도 없을뿐더러, 밥만 축내고 이동 속도만 늦어질 뿐이다.
연추량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무인들을 재정비하는 동안, 장흥표국주 이사흠은 수레마다 일일이 확인하며 잃어버린 표물이 없는지 점검했다.
마침 마지막 수레를 맡은 쟁자수들에게 다가가자 상자수가 다가와 허리를 굽실거리며 보고했다.
“제육조, 이상 없습니다.”
“알겠네. 수고했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다행히 가벼운 상처 정도입니다.”
“그렇군. 곧 떠날 것이니 준비하게.”
“예, 국주님.”
이사흠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연추량에게 다가왔다.
“전력 이탈이 심한 만큼 곧바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괜찮소. 가벼운 부상자는 그대로 합류할 것이고, 정도가 심한 자들은 의원으로 보낼 거요. 인력이 줄어든 만큼 속도가 다소 느려지겠지만, 그래도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 같소.”
연추량의 대꾸에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없어진 표물은 없소?”
“예, 다행히 몇 가지 사라졌던 표물을 근방에서 다시 찾았습니다.”
“다행이오.”
연추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주변 상황을 둘러보았다.
마침 저만치 생도들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사실 지금 생도들은 과연 남궁천을 비롯한 몇몇 생도들이 전투 내내 협곡에 있었는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정말 계속 싸우고 있었다고?”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는 사람은 바로 윤종승.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니까. 목숨 걸고 싸웠지.”
“그런데 어떻게 전혀 안 보였을까?”
이번엔 진소홍이 순수한 궁금증을 드러냈다.
한 쪽에서 팔짱을 낀 채 뚝 떨어져 있는 모용강이 무심한 듯 말을 뱉었다.
“흥! 어디 달아났다가 돌아온 건지도 모르지.”
“어허, 사람 말을 그리 못 믿나? 너희들이 그저 내 움직임을 눈으로 쫓지 못했을 뿐이다.”
남궁천이 턱을 치켜들고 대꾸하자, 모용강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다 못한 팽수혁도 나섰다.
“야야! 우리 몰골을 봐라! 뒈질 정도로 고생한 게 안 보이냐?”
아닌 게 아니라, 남궁천을 비롯해 왕릉에 들어갔다가 나온 생도들은 하나같이 뽀얀 먼지와 핏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확실히 몰골만은 어디 딴 세상에서 싸우다가 온 것 같소.”
“어허! 딴 세상이라니! 우리가 뭐 어디 죽은 자들하고 싸우기라도 한 줄 알아?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니까!”
팽수혁의 아슬아슬한 발언에 남궁천과 유현이 움찔거리고는 생도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 저 단순한 놈 입을 꿰맬 수도 없고.’
다행히 운경도 팽수혁의 말을 그냥 하는 소리로 받아넘기는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연추량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다가오는 자는 이사흠.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뭐지? 저 둘도 따지려고 그러나?’
한데 가까이 다다른 연추량의 반응은 남궁천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척!
돌연 연추량이 포권을 취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남궁 소협!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정말 고맙네!”
“아…….”
“내가 자네를 과소평가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번 싸움에서 패배한 건 아마도 우리 쪽이 되었을 테지! 내 오늘 자네를 통해서 많은 걸 깨닫고 배웠다네. 그간의 내 실수를 용서해다오!”
괜히 긴장했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원래 사람이 살다 보면 옆에 기인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죠. 이제라도 아셨다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하하!”
남궁천이 호탕하게 웃자, 연추량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만약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겸손을 모르는 광오함이라고 여겼을 터다.
하나 연추량은 이 순간 남궁천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예쁘게만 보였다.
마침 연추량 옆에 다가선 이사흠도 포권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남궁 소협. 나 역시 사과드리겠네. 나도 자네를 과소평가했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한참 부족했네. 부디 용서하시게. 그리고 오늘의 큰일을 막아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네.”
“별말씀을요. 잃은 물건은 없습니까?”
“우선 없는 것으로 보이네. 자네의 계략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 맞아 들어간 것 같으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뭐랬습니까? 길이 좋다니까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암벽 안쪽 왕릉이 있던 곳을 보았다.
* * *
“젠자앙!”
콰아아앙!
흑산채주 강상도가 욕지거리와 함께 주먹을 내지르자 커다란 바위에 균열이 쩌억 생기더니 이내 갈라지면서 쓰러졌다.
쿠구웅!
어깨까지 들먹이던 강상도가 어느 순간 느껴진 기척에 휙 돌아섰다. 그의 뒤로 내려선 자는 다름 아닌 삼봉파 문주 도지백.
도지백이 깨진 바위를 보고 혀를 찼다.
“쯧…… 거, 애꿎은 바위는 왜…….”
“바위를 부수지 않았더라면 다른 걸 부쉈을 거요!”
강상도가 도지백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지백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강 채주. 우리 선은 넘지 맙시다.”
“흥! 그러기엔 선을 이미 많이 넘어 버린 것 같소만! 이 막대한 피해를 어찌할 거요? 본 채 무인 사 할이 이탈했소!”
“본 문도 그 정도로 잃었소.”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애초에 이 계획을 세운 건 당신 아니오?”
“강 채주!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요?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끼질 말든가!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손해를 봤다고 내게 책임을 물으려 하오?”
도지백이 표정을 굳히자, 강상도도 물러서지 않고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최소한 저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했어야 할 일 아니오?”
“모든 계획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그동안 흑산채가 본 문의 도움을 받아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텐데?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남 탓인가?”
“도 문주우!”
“함부로 부르지 마라! 어디 도적 떼나 끌고 다니는 주제에!”
“뭣이? 죽고 싶은가!”
파파아아앙!
순간 두 사람의 전신에서 공력이 폭발했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선 자세로 두어 걸음 정도를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장삼은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구오오오!
살기마저 뒤 섞인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뒤얽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처럼 팽팽하던 기 싸움은 강상도가 한발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칫! 그간 본 채가 귀 문의 덕을 본 건 사실이나, 귀 문 역시 본 채의 덕을 받은 것도 사실! 오늘의 손실은 어떻게 해서든 만회해야 할 거요!”
“그래서 내가 놈들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 아니오?”
“그래서? 아직 방법이 있긴 있소?”
도지백이 강상도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가 품에서 팔뚝만 한 조각상을 꺼냈다.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이었는데, 등 뒤로 연꽃 세 송이가 피어 있었다.
강상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요?”
“삼연좌불상(三蓮坐佛像). 장흥표국이 운반할 표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거요.”
“그게 어째서 여기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나는 일봉대주에게 곧장 이 표물부터 확보하라고 했소. 필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니 그곳을 집중 공략하라 일렀지.”
“하면 그걸 일봉대주가…….”
도지백이 입매를 씨익 비틀었다.
“그렇소. 놈들은 오히려 연막탄을 터뜨린 게 실수였다는 걸 모를 거요. 지금쯤 놈들은 삼연좌불상이 사라진 줄도 모르거나, 사라진 좌불상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거요.”
“허허!”
“이제 아시겠소? 모든 계획은 어긋날 수밖에 없는 법이오. 그래서 차선의 차선책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지.”
그제야 강상도도 어느 정도 속이 풀린 것인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하면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이오?”
“어쩌긴. 이 길로 곧장 오주상단을 찾아가야지.”
오주상단은 남쪽 오주 지역에 있는 상단으로 광서성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상단이었는데, 장흥표국의 표물이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도지백이 강상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말고 잘 풀어가잔 말이오. 아직 우리가 진 게 아니란 말이외다. 만약 이 차선책이 성공한다면 수익의 절반을 떼어드리지.”
“흐음. 알겠소. 하지만 이번엔 나도 같이 갑시다.”
“같이? 대체 어쩌자고?”
“난 옆에서 지켜만 보겠소.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소?”
“강 채주의 정체가 발각되면…….”
“인피면구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니겠소?”
“흐음.”
도지백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소이다. 강 채주라면 그 정도 자격이 있지.”
도지백과 강상도가 서로를 마주 보며 비열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 * *
오주상단주 채선일은 연신 부채질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이었지? 장흥표국이 도착하는 날이.”
“예,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도착해야 합니다.”
“역시 다른 표국에 의뢰를 할 걸 그랬나? 어째 영 불안하군.”
“마땅히 맡길 표국도 없지 않습니까? 일단 믿고 기다려보시지요.”
총관이 정중한 목소리로 달랬다.
하나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벌써 두 번이나 표물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 장흥표국이었다. 당시 장흥표국과 손을 끊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도 자신이었다.
다만 마땅히 의뢰를 맡길 표국이 없었다. 장흥표국이 계림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곳이었으니까.
“차라리 우리가 표국을 하나 내는 게 어떻겠나?”
채선일의 말에 총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기엔 흑산채라는 위험 요소가 너무 큽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계림에 신흥 문파가 생겼는데, 그곳이 그래도 믿을 만하다는군요.”
“신흥 문파라면……?”
“삼봉파라고 들었습니다. 최근 세력을 많이 확장해서 토박이인 비월문보다 커졌다고 합니다.”
“하면 표국의 호위를 그쪽에 맡기는 게 안전하겠군.”
“그게 또 간단치만은 않은 게 장흥표국주와 비월문주가 돈독한 사이라…….”
“허참! 장사치가 돈보다 정에 이끌리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구먼! 이건 실리를 따져야 할 일이 아닌가?”
“뭐 이번에도 실패하면 장흥표국도 정신을 차릴 테지요.”
“정신을 차리긴 무슨! 그땐 장흥표국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세! 아니, 차라리 장흥표국을 인수해서 그 삼봉파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것도 방법이 되겠군요. 세력을 키우는 삼봉파 입장에서도 환영할 것으로 보이고요.”
“하나 그건 차후의 이야기. 오늘은 물건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날이 더워서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지도 모르니 먹거리를 충분히 준비해 두게.”
실리를 따질 때만큼은 가차 없는 채선일이었지만, 적어도 상도를 지킬 줄도 아는 그였다.
“예, 준비해 두겠습니다.”
총관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돌아나갔다.
채선일이 빈방에 홀로 서성이는데, 나갔던 총관이 다시 돌아와 보고했다.
“단주님. 잠시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으음?”
채선일이 돌아보니 총관의 표정에 황망함이 깃들어 있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라니? 장흥표국이 벌써 도착했는가?”
“아닙니다. 그게…….”
“……?”
“삼봉파 장문인이 찾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