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76화 (176/508)

175. 내가 주인이다.

팽수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다들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거야? 게다가 주군이라니?”

“내 가신들이다.”

남궁천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팽수혁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말했다.

“야,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우리가 힘을 합해서…….”

“눈독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온 건 나야. 너희들은 어쩌다 굴러들어온 거고.”

“됐다, 됐어! 치사해서 안 먹는다!”

팽수혁이 괜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남궁천이 피식 웃어 넘겼다.

뭐, 봐가면서 나중에 소환단 정도는 줄까?

마교가 각종 귀한 영단을 다 모아둔 보고다. 소환단이나 그에 준하는 영단 정도는 한 알씩 나눠 줘도 부족하진 않다.

‘하여튼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베푼다니까. 이러다가 거지 되겠어.’

그런데 단상 아래쪽의 상자를 모두 덜어낸 창응대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주군, 여기 뭔가 있습니다!”

차무진의 목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과연 단상 아래쪽에 기다란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한눈에 딱 보기에도 영단 따위를 보관해둔 건 아닌 듯했다.

“꺼내 봐.”

“예, 주군.”

그러자 철운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뭐가 뭔 줄 알고 그렇게 막 함부로 꺼낸다는 거요? 여긴 까딱하다간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마단곡이라는 걸 모르는 거요?”

“위험한 건가?”

남궁천의 물음에 철운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건 꺼내도 괜찮소.”

따악!

“큭!”

“새끼가 괜히 긴장되게 분위기 잡고 있어.”

“아, 아니. 난 그저 조심하자는 뜻으로…….”

“시끄럽고. 꺼내.”

남궁천이 다시 턱짓을 하자 창응대원들이 기다란 상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교 새끼들 왕릉에 많이도 묻어놨네. 아주 왕릉을 창고로 썼어.”

“뭘 새삼스레…….”

무심코 말을 뱉던 철운이 뒤통수가 뜨끔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얼른 물러났다.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시선을 옮겼다.

눈치 빠른 새끼.

터엉. 터엉, 터엉……!

창응대가 수십 개의 상자를 내려두고 덮개를 열자 신병으로 보이는 무기들이 드러났다.

“오오오!”

“마병도 들어 있었군요.”

손우곤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궁천이 걸어와서는 검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검신이 온통 시커먼 묵검이었다.

휙, 휙휙! 쉬이잇!

남궁천의 손에서 가볍게 휘둘리던 검이 곧장 철운의 목으로 날아갔다.

“헉!”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춘 검봉.

꿀꺽……!

철운이 마른침을 삼키자 남궁천이 돌아서더니 손우곤에게 던졌다.

탁!

손우곤이 얼른 낚아채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법 괜찮은 검이야. 대주가 쓰는 것보다는 낫겠어.”

“하지만 마병이 아닙니까?”

“마병이 뭐지?”

“예?”

“그러니까 마병이 뭐냐고?”

“그야…… 사악한 기운이 깃들어 검의 주인을 자칫 주화입마에 빠트리기도 하는…….”

“그래서 그 검에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나?”

남궁천의 말에 손우곤이 움찔거리고는 손에 쥔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그런 게 느껴질 리가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날붙이가 아닌가?

물론 많은 피를 머금은 검신은 일종의 요기(妖氣)가 느껴지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나 무인이 곧바로 이성을 잃고 병기에 사로잡힌다는 마병은 들어보지 못했다.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 됐잖아.”

“하지만…….”

“세간의 눈이 그리 신경 쓰이나?”

“…….”

“신병이든 마병이든 결국 손에 든 자의 뜻에 달린 것. 손 대주에게는 검의(劍意)가 없나 보군. 이리 줘. 그냥 다른 사람 주지, 뭐.”

“아…….”

손우곤이 멈칫거리고는 다시 묵검을 내려다보았다.

‘검의라…….’

손우곤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남궁천이 다시 물었다.

“그 검을 들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지?”

“베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그래서 마병이라고 생각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좋아, 그럼…….”

남궁천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벽라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손우곤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남궁천이 벽라검을 휙 집어던졌다.

탁!

손우곤이 얼른 벽라검을 받아 들었다.

“어때? 무슨 기분이 들어?”

벽라검이다.

남궁세가의 보검.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묵검도 예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지만, 벽라검은 그보다 더한 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 그런 것인가!’

손우곤은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 입을 딱 벌렸다.

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베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그래. 그게 당연하겠지. 예기 가득한 검을 쥐고 있으니까. 날카로운 칼을 손에 들면 뭐라도 베어보고 싶은 게 당연한 거야. 인지상정이지. 그렇다고 벽라검이 마병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남궁천이 저벅저벅 다가와서 손우곤의 손에 들린 벽라검을 회수해 갔다.

“그럼 알아서 해. 그 묵검을 가질지 말지는.”

손우곤이 묵검을 콱 움켜쥐고는 허리춤에 찔러 넣고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별말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창응대원들 중 몇몇이 괜찮은 검을 찾아서 옆구리에 패용했다.

상자 안에 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종류별로 다양한 무기가 있었는데, 어떤 건 쓸 만했고, 어떤 건 보관 상태 때문인지 영 부실해 보였다.

마침 팽수혁은 상자 하나에서 자신이 차고 있는 것처럼 커다란 도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호오! 이거 물건이군!”

스르르릉!

잔뜩 녹이 묻은 도신이 야명주의 빛을 받으며 드러났다.

따아앙!

팽수혁이 도면으로 바닥을 한 번 후려치자 도신에 묻었던 녹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형형한 예기를 뿜는 칼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오오.”

주변인들이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긴 했지만 확실히 보도임이 틀림없었다.

팽수혁이 남궁천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야, 너네는 검가잖아. 도는 필요 없지?”

“왜 필요 없어?”

“아니, 욕심도 작작 부려! 검가가 도를 왜 탐내냐고!”

“도 팔아서 검 사려고 그런다.”

“헛!”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다.

팽수혁이 짐짓 애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결국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던지듯 말했다.

“그건 별로 값도 못 받겠군. 너 가지든지.”

“정, 정말? 고맙다! 남궁천! 정말……!”

반색하며 소리치던 팽수혁이 뭔가 비굴한 기분에 멈칫거렸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굽실거려야 해? 이게 저놈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여기 물건을 정말 남궁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세뇌가 이렇게 무섭다.

‘젠장, 계속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인정하고 있었어!’

그렇게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데, 이번엔 백무극이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촤르르륵.

‘사슬낫?’

백무극이 꺼내 든 것은 두 자루의 낫이었는데 낫자루가 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백무극이 허공을 향해 사슬낫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촤르르륵! 촤르르륵!

마치 한바탕 현란한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한참동안 몸을 푼 백무극이 사슬낫을 양손에 쥐고는 무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든다.”

“그럼 가져라.”

남궁천이 시원하게 말해주자, 백무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외쳤다.

“아니, 저놈은 왜 그냥 주고, 나한테는 온갖 생색을 다 내는 거냐?”

“낫자루를 얻다 팔아? 저런 취향 타는 무기는 팔기도 어렵다.”

“제길, 핑계는!”

“유현 도장은 뭐 가지고 싶은 검 없어?”

남궁천의 질문에 유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흐음. 확실히 욕심이 없네. 무소유를 실천하는 마음 아주 훌륭해. 누구랑 비교되는군.”

남궁천이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외친다.

“아니, 날 왜 쳐다봐? 여기서 욕심 제일 많은 게 누군데!”

“너지.”

“뭐?”

“남의 물건을 탐내는 너. 욕심 많은 하북팽가 놈.”

“저, 저, 저……! 쳐 죽일……! 이게 어째서 네 거냐? 애초에 마교 놈들이……!”

“자자, 진정하시고. 이제 그만 정리하고 가시죠.”

유현이 웃으며 뜯어말리자 팽수혁이 연신 씨근거린다.

“아니, 비켜 봐! 내가 억울해서 진짜…….”

“조용!”

순간 남궁천이 버럭 소리쳤다.

그 분위기가 너무 엄중해서 바락바락 소리치던 팽수혁도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벙어리가 됐다.

“뭐, 뭐야? 너…….”

“쉿!”

남궁천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그제야 다른 생도들도 뭔가 느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척이다!

차차차앙!

생도들과 창응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가 들리는 방향이 점점 명확해졌다.

단상을 등지고 왼쪽으로 나 있는 석문!

촤르르르르!

사슬이 당겨지면서 연결된 빗장이 올라간다.

찰나, 철운이 버럭 소리쳤다.

“엇! 막, 막아앗!”

철운의 목소리가 터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남궁천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파바박!

하지만 이미 빗장이 고리를 벗어나 한참이나 올려진 상태!

콰아아아아앙!

순간 폭음과 함께 석문이 활짝 열리면서 남궁천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촤아아악!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착지한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흑도인들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전신 여기저기가 베이고 갈라지거나, 불에 그슬린 자국이 가득하고, 옷가지는 거지꼴처럼 너덜너덜했다. 요충을 따르던 적상방 정예들은 이제 한 명밖에 살아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왕의 처소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생도들과 창응대를 보더니 눈알을 부라렸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과연 공자 말이 틀리지 않았군! 기어이 이놈들이 우리 물건에 손을 댔군!”

“하아, 여기나 저기나 전부 내 거래. 썅.”

팽수혁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리자, 흑선자가 눈을 부라렸다.

“이놈들! 그 상자 제자리에 내려두지 못하겠느냐?”

“못하겠다면?”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자, 흑선자가 코웃음을 친다.

“흥! 네놈은 분명 내가 방심한 틈에 공격한…….”

“됐고. 오느라 고생은 했는데, 한 발 늦었어. 땅에 떨어진 건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지. 이건 다 내 거야.”

“뭣이? 하하하! 맹랑한지고. 이제 보니 비량이 문제가 아니었구먼. 비량은 보이지도 않고 웬 애새끼가 겁도 없이 설쳤구나!”

“기어이 한번 해보자는 건가?”

남궁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 모습에 흑선자가 저도 모르게 움찔 거렸다.

‘뭔 놈의 애새끼 눈빛이……!’

산전수전 다 겪어본 강호 고수의 분위기를 품고 있지 않은가?

하나 산전수전이라면 자신도 만만치 않게 겪었다.

게다가 상대는 이제 약관에 다다랐을 법한 애송이들!

“주운 놈이 임자라 했느냐? 하나 세상은 그놈을 두드려 패고 뺏은 놈을 임자로 쳐주는 법이지. 그 욕심이 너희들을 죽이리라.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차아앙!

흑선자가 칼을 뽑아 들었고, 적노파파의 손가락은 독수리 발톱처럼 변하면서 붉게 물들어갔다. 요충과 옥소공자도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흑도인들이 천천히 다가서자, 철운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트, 틀렸다. 다 죽을 거야……!”

그러자 팽수혁이 코웃음을 치며 새로 얻은 대도를 앞세웠다.

“걱정 마라. 내 태도(太刀)가 놈들을 다 쓸어버릴 테니!”

태도는 새로 얻은 무기에 그가 지은 이름이었다.

한데 철운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그, 그게 아니란 말이오! 우린 이제 끝장이란 말이오!”

“뭔 소리를…….”

찰나였다.

쿠콰콰아앙!

갑자기 측벽을 둘러싼 금빛 관 덮개가 거칠게 튕겨 나가는 게 아닌가?

철운이 낭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우린 전멸할 거요.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자들이여, 왕과 그 신하들의 분노를 받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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