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너 내 누군지 아니?
일촉즉발의 상황.
누구 하나라도 움직이면 살검이 날아가고 피가 튀리라.
대치 상태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비량이 정말 은신 중이라면 언제 어느 때 나타날지 알 수 없거니와 조금 전 남궁천의 무위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끄음……!”
마침 기절했던 흑선자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더니 생도들과 대립 중인 흑도인들을 보았다.
제 손으로 눈알을 찌르는 바람에 시야가 희뿌옇게 보인다.
차츰 초점이 맞으면서 남궁천이 보이자, 그가 대번 눈알을 희번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저 개 같은 놈이 감히……!”
“자중하시오. 비량이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오.”
요충의 주의에도 흑선자는 분기탱천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자중은 개뿔! 저 애송이 새끼가 감히 나를 고자로 만들 뻔했는데! 내가 저놈을 묵사발로 만들지 않으면…….”
그 순간 갑자기 지면이 떨리는가 싶더니 천장에서 흙가루가 떨어졌다.
그그그긍……!
‘또 누가 들어오는 건가?’
생도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어 들었다.
한데 이번엔 조금 다르다.
쿠구구구궁……!
떨림은 천장보다 바닥에서 더 심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분명 뭔가 변수가 생긴 것이리라.
흑도인들도 뭔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는 서로 등을 맞대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찰나,
쩌억! 쩌저억!
“엇, 조심!”
팽수혁이 뒤로 성큼 물러나며 소리쳤다.
쩌적……! 쩍! 쩍!
놀랍게도 바닥에 기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번개 모양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게 아닌가?
공교롭게도 바닥에 생긴 균열은 흑도인과 생도들을 정확히 갈라놓았다.
“이거 왠지 느낌이 싸늘한데?”
팽수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반 한쪽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게 아닌가?
“으아악!”
“으헉!”
순간 균형을 잃은 생도들이 우왕좌왕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흑도인들도 잔뜩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했다.
쿠구구궁! 쿠웅!
“으헉!”
“뭐, 뭐야? 이거!”
하필이면 생도들이 서 있는 곳의 지반만 쩌적 균열이 생기면서 마구 내려앉는 게 아닌가?
흑도인들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는 순간!
꽈르르르릉!
천지가 격동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생도들이 서 있던 곳의 지반이 거짓말처럼 쑥 꺼지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긴 비명을 내지르며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생도들.
그 모습을 본 흑도인들이 가장자리까지 달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생도들을 보았다.
“쯧…… 직접 죽였어야 하는 건데.”
흑산자가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한편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생도들은 연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이렇게 뒈질 순 없는데!’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남궁천이 최대한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을 높였다.
그렇게 얼마나 떨어졌을까?
마침 그의 시야에 검은 공간에 뭔가 보였다.
‘줄……?’
분명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무언가가 있었다.
좀 더 집중해서 보니 쇠사슬처럼 보인다.
남궁천이 버럭 소리쳤다.
“사슬이다! 다들 정신 차리고 사슬을 잡앗!”
“제길, 사슬이 어디 있는데!”
“곧! 셋, 둘, 하나!”
“우아아아악!”
“이여어어업!”
생도들이 악착같이 팔다리를 놀렸다.
남궁천 역시 얼른 손을 뻗어 쇠사슬을 낚아챘다.
철컹!
철컹, 철컹!
유현과 백무극도 연이어 쇠사슬에 매달렸다.
추락하는 힘이 그대로 적용되니 사슬을 움켜잡은 손바닥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팽수혁이 매달려…… 야 하는데?
철컹……! 미끌!
‘응? 미끌……?’
팽수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그 순간, 반동으로 잠깐 튀어 오른 그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 어어? 우아아아악!”
팔을 세차게 허우적거렸지만 사슬에는 닿지 않았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데…….
탁!
“헉!”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팽수혁의 손목을 낚아챈 게 아닌가?
팽수혁이 고개를 들어 보니 남궁천이 손을 뻗어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뭘 멍청하게 보고만 있어? 얼른 기어 올라오라고!”
남궁천이 짜증스럽게 소리치자, 그제야 팽수혁이 정신을 차리고 얼른 남궁천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가까스로 쇠사슬에 매달린 팽수혁이 남궁천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사슬 한쪽 끝으로 가면 제법 너른 공간이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생도들이 그 공간으로 몸을 던져 놓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후욱……!”
“정말 죽을 뻔했군요.”
“아오, 정말 싫다! 내가 왜 이런 곳에 기어들어 와서는……!”
대자로 널브러진 팽수혁이 어둑한 천장을 보면서 잔뜩 성질을 부려댔다.
남궁천이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가서는 위아래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위쪽으로도 까마득한 어둠이 차지하고 있었고, 아래쪽도 끝 모를 낭떠러지다.
그리고 반대편 벽까지 이어져 있는 쇠사슬.
“다들 무사한가?”
어둠 속을 향해 던진 질문에 생도들이 저마다 대답했다.
“예, 덕분에.”
“커흠!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무사하다.”
하나 남궁천이 질문을 던진 상대는 사실 따로 있었다.
창응대.
[예, 무사합니다.]
어디선가 창응대주 손우곤의 전음이 들렸다.
창응대원들은 남궁천이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는 곧장 몸을 던져 뒤를 따랐던 것.
흑도인들 배후에서 은신하고 있던 그들은 절벽에 검을 꽂아 넣고 미끄러지듯이 추락하느라 비교적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생도들로서는 그런 창응대의 존재까지 눈치채기에는 제 목숨 건사하기에도 너무 정신이 없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보니 어두컴컴한 통로가 보였다.
‘어쩌면 여기가 진짜?’
남궁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고로 인생사 새옹지마지.”
* * *
한편 생도들이 구사일생한 줄 모르는 흑도인들은 어둠 속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생도 중 하나는 쓸 만한 재목으로 보였는데 아쉽게 됐구려.”
“흥, 쓸 만한 재목은 개뿔. 어차피 내 손에 뒈졌을 놈이지.”
흑선자가 악에 받쳐 씨근거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천장 구멍에서 시커먼 인영이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으아아아아!”
긴 비명을 내지르면서 떨어진 인영이 그대로 생도들의 뒤를 따라 곧장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흑도인들이 서로를 멀뚱멀뚱 보았다.
“쟤는 또 뭐야?”
“비량……?”
하나 그들의 추측과 달리 어둠을 가르며 떨어져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철운이었다.
‘제길! 알고 떨어져도 정말 싫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끝 모를 추락이라니.
정말이지 두 번은 겪고 싶지 않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철운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아래쪽 어둠을 응시했다.
‘보인다!’
분명 어둠 속에 거미줄처럼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쇠사슬이 보였다.
마단곡으로 들어갈 첫 단계.
파팡!
허공에서 공력을 발출한 철운이 적당히 착지하기 좋은 위치를 잡고는 발끝에 공력을 모았다.
슈우우우욱, 철컹!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이었기에 쇠사슬이 거친 소리를 내며 한 차례 출렁거렸다.
그 반동으로 위로 튕겨 오른 철운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고는 다시 부드럽게 사슬 위로 착지했다.
착!
정말이지 누군가 보았더라면 박수라도 칠만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그가 무영마라는 별호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투둑……!
“응?”
철운이 서늘한 기분에 고개를 휙 돌렸다.
쇠사슬이 느슨해지고 있다?
‘그럴 리가. 현철로 만들어진 사슬이다. 끊어질 리는 없을 텐데…….’
투둑……!
다음 순간 철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쇠사슬이 끊어지는 게 아니다.
암벽 쪽에 박힌 쇠사슬 끝부분이 빠지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도들과 창응대원들의 무게까지 모두 지탱해야 했으니 예상 인원을 훨씬 초과한 셈.
원래 마단곡은 극소수의 마인이 이런 식으로 들어와서 왕의 처소까지 가면 제대로 된 출입구를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땐 출입구를 통해 마인들이 영단 등이 든 상자를 여유 있게 옮길 수 있다.
그리고 무영마 철운은 바로 그 왕의 처소까지 가서 출입구를 여는 역할이었다.
한데…….
’투둑, 툭!
“이런 젠장!”
암벽에 박힌 쇠사슬이 완전히 빠지면서 철운의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촤르르륵!
얼른 쇠사슬을 움켜쥔 철운이 그대로 반원을 그리면서 절벽으로 날아가서 거칠게 부딪쳤다.
콰다앙!
“크윽!”
툭, 투둑……!
가까스로 쇠사슬을 잡았지만 나머지 한쪽도 빠지기 직전.
‘올, 올라가야 해!’
철운이 얼른 쇠사슬을 잡고는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그렇게 절벽 가장자리까지 거의 다 왔을 때였다.
툭!
‘아, 안 돼!’
겨우 박혀 있던 한쪽 쇠사슬마저 완전히 뽑혀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몸이 가벼워진다고 느낀 철운이 끝 모를 낭떠러지로 추락하려는 찰나,
철컹!
누군가 쇠사슬을 감아쥐며 끌어당겼다.
철운이 눈을 크게 뜨는데, 쇠사슬을 쥔 남궁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뭐 해? 어서 올라와!”
“아……?”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철운이 남궁천의 손을 잡는 순간,
휘익!
무지막지한 힘에 이끌린 철운이 절벽 가장자리로 단숨에 올라섰다.
콰당!
겨우 단단한 지면에 등을 붙인 철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커헉, 헉, 헉, 헉!”
겨우 이 정도로 많은 공력을 소모한 것은 아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심력 소모가 심했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철운이 무심코 남궁천에게 말을 건넸다.
“고, 고맙……! 엇?”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철운이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후다닥 물러났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다.
모두 네 명.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다.
‘누구? 생도들인가? 비량도 있나?’
한데 남궁천이 다가와서 히죽 웃는다.
“왜 이렇게 놀라고 그러실까? 영 의심스럽게.”
“누, 누구……?”
“누구긴 네 은인이지. 기껏 구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서운해.”
“생도인가?”
“그렇지.”
“너희들이 전부인가?”
“뭐, 그런 셈이지.”
남궁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철운이 피식 웃었다.
“웃어?”
“너는 날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왜?”
“왜긴. 네놈들이 죽을 테니까!”
파밧!
순간 철운이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렸다. 어둠을 가르며 뻗어간 손이 그대로 남궁천의 목을 움켜쥐고…….
‘응?’
놀랍게도 철운이 움켜쥔 것은 남궁천의 손이었다.
졸지에 남궁천과 깍지를 끼게 된 것.
우두둑!
“끄아아아악!”
남궁천이 힘을 주자 철운이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철운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개새……!”
철썩!
순간 철운의 뺨이 휙 돌아간다. 어둠 속에서 별이 보이는 것만 같다. 여전히 꺾인 손목에서는 지독한 통증이 올라온다.
“이, 이것 놔……!”
짜악!
다시 뺨이 휙 돌아간다.
‘제길!’
짜악! 짜악! 짜악!
연이어 세 번이나 뺨이 돌아가면서 목이 빠질 것 같고 얼굴은 터질 것만 같다.
남궁천이 여전히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사람이 말이야. 목숨을 구해줬으면 대가리 박고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 물에 빠진 걸 건져줬더니 보따리까지 뺏으려고 해?”
짜악! 짜악!
“크윽! 그, 그만!”
“왜?”
“잘, 잘못했소.”
남궁천이 무심히 쳐다보다 묻는다.
“너 내 누군지 아니?”
“누, 누구요?”
남궁천이 마치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여기 주인이다, 새끼야.”
짜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