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너 내 누군지 아니?
“들어갑시다!”
적상방주 요충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흑선자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요충 곁으로 다가왔다.
“비량이 먼저 들어갔을 수도 있소. 조심해야 할 거요.”
“그야 이미 감안했던 부분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지요.”
“하면 먼저 가시겠소?”
“사양하지 않겠소.”
요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단곡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적상방 정예 무인 십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적상방 무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옥소공자가 흑선자와 적노파파를 돌아보며 웃었다.
“두 분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러지.”
곧이어 적노파파와 흑선자가 두더지 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옥소공자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후 좁은 틈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몇몇 무인들이 근처를 지나쳤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서로 사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을 뿐, 누구도 이 좁은 구멍을 신경 쓰진 않았다.
* * *
“잠깐, 잠깐만!”
팽수혁이 얼른 손을 들어 올리고는 남궁천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마단곡이란 거냐?”
“그래.”
“여기가 마단곡…… 마단곡이라니……!”
팽수혁이 연신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하아, 저 새끼 눈 돌아가는 것 같은데.’
어딘지 잔뜩 상기된 팽수혁을 향해 남궁천이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내 물건에 손대면 동료고 뭐고 다 뒈지는 거야.”
“야!”
“왜?”
“어째서 그게 네 거야?”
“내 거지.”
“그러니까 왜?”
“내가 찾았으니까.”
“아직 찾은 건 아니지! 네가 숨겨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어이 숟가락을 얹으시겠다?”
“어차피 여긴 왕릉이라며? 기관 장치를 헤쳐 나가려면 혼자 힘으로는 어려울 텐데.”
“그래서?”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지. 암! 그렇고말고!”
저 새끼, 내 저럴 줄 알았다.
역시 안 되겠다.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찌감치 저놈을 제거해야…….
남궁천이 투기를 일으키며 다가서려는데 그 앞을 백무극이 불쑥 막아섰다.
“차라리 날 때려다오.”
“넌 왜 자꾸 헛소리야? 저리 안 꺼져?”
“제발 그때처럼 날 대해다오.”
아니, 이게 자꾸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그때였다.
지켜만 보던 유현이 갑자기 고개를 꺾어 들고는 나직이 외쳤다.
“잠깐! 누군가 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생도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는 기감을 활짝 펼쳤다.
후드득……!
아니나 다를까, 천장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더니 아스라이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조금 있자니 역시나 시커먼 인영이 천장의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입이 달린 천장이 사람들을 툭툭 뱉어내는 것만 같다.
슈우우우욱!
쿠웅! 쿵! 쿠쿠쿠쿵!
천장에서 사람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것들은!”
팽수혁이 화들짝 놀라서 남궁천 옆으로 달려왔다.
스르르릉!
그가 대도를 뽑아 들고 경계하며 헛기침을 했다.
“커흠! 절대 널 의지하겠다고 옆으로 온 게 아니다. 이왕 구하러 온 것이니 옆에서 지켜주려고 그런다.”
“어련하실까?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네.”
“흥!”
남궁천이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낯선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지상에서는 목숨을 건 혈투가 한창일 거다. 게다가 자욱한 연무 때문에 암벽 구석에 난 작은 구멍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설사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몸을 밀어 넣을 생각을 하는 이는 더욱 없을 테고.
그럼에도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 놈도 아니고, 여러 놈이다.
‘애초에 이곳을 찾던 자들이란 뜻일 테지.’
어디 보자.
동일한 무복을 갖춰 입은 자들이 열댓 명. 그리고 각각 개성에 맞게 옷을 걸친 자들이 세 명.
묘한 분위기다.
죄다 한통속인 것 같긴 한데 따로 노는 느낌도 없지 않다.
마침 제일 먼저 떨어졌던 요충이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곧 생도들을 발견하고는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웬 애기들만 있군.”
“이 애송이들은 뭐지?”
흑선자가 차갑게 중얼거리자, 적노파파가 코웃음을 쳤다.
“애들만 있을 리가. 얘들아, 너희 교관은 어디 있느냐?”
“……?”
“비량 말이다. 좋은 말로 물을 때 대답하는 게 좋을 게다. 우리는 그리 마음이 넓지 못하니까.”
적노파파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묻자, 생도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도 남궁천만 별 동요 없이 흑도인들을 빤히 쏘아보았다.
‘흑선자와 적노파파라. 오랜만이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저 두 사람은 전생에 짧은 인연이 있었다.
흑선자와는 잠깐 손을 섞은 적이 있었고, 적노파파는 얼굴만 보고 지나쳤었다.
뭐, 깊은 인연은 아니지만 구면이지.
‘저들은 날 몰라볼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흑선자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어이, 거기 꼬마야.”
흑선자가 남궁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까딱거렸다.
“이리 오너라.”
“나?”
“그래, 너. 어른이 묻는데 빤히 노려보는 그 눈알이 참 예쁘구나. 이리 와 보아라.”
남궁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갔다.
흑선자가 입매를 비틀고는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자 흑선자가 뒷짐을 지고는 물었다.
“비량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몰라. 위에 있겠지.”
남궁천의 뻣뻣한 태도에 흑선자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가 되물었다.
“그래? 그럼 여기엔 너희들밖에 없다는 뜻이렷다?”
“그래.”
“그 말을 믿으란 소리냐?”
“믿지도 않을 거면서 묻긴 왜 물어?”
흑선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놈이 말이 짧구나. 게다가 아까부터 노려보는 그 눈알이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군!”
팟!
흑선자가 시커먼 손을 불쑥 뻗어갔다.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이미 흑선자의 단전에서 공력이 운기되는 걸 확인한 그였다.
‘하여튼 못된 버릇은 여전하네. 불쑥불쑥 손부터 나서기는!’
탁!
“응?”
찰나지간 흑선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전력은 아니었다지만 한낱 생도가 막기에는 제법 빠른 속도였다.
한데 그걸 남궁천이 막아낸 것이다.
흑선자의 손목을 낚아챈 남궁천이 씨익 웃는다.
“눈알이 그리 좋으면 네 눈알이나 파고 놀 것이지, 왜 남의 눈알을 탐내나?”
“뭐라……!”
파박!
남궁천이 순식간에 금나술을 펼쳐 손목을 꺾어 쥐더니 곧장 흑선자의 눈을 향해 밀어냈다.
푹!
제 손으로 두 눈을 찌른 격이 된 흑선자가 비명을 터뜨리며 허리를 숙였다.
“아악!”
창졸지간 남궁천이 그대로 발을 내질러 흑선자의 낭심을 걷어찼다.
퍼억!
“끄어억!”
슈우우욱, 콰다앙!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무참히 튕겨 나간 흑선자가 공동 한쪽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자 흑도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차차차앙!
“어린 새끼가 겁대가리가 없구나!”
“뒈지고 싶어 환장을 한 것이더냐?”
하나 남궁천의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죽고 죽일 상황에서 겁대가리 집어먹어봐야 좋을 것도 없잖아?”
“저, 저 어린 새끼가……!”
요충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짓는 사이 생도들도 저마다 병장기를 앞세우고는 경계했다.
“야, 남궁천. 저것들 도대체 뭐야? 흑산채야? 아니면 삼봉파?”
대답은 유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쪽 같진 않습니다. 짙은 사기를 뿜는 걸 보면 흑산채와는 또 다른 흑도인들 같군요.”
팽수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도파를 고쳐 쥐었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유현 말대로 진득하게 뿜어내는 살기에는 사기가 그득 담겨 있다. 한 명 한 명이 실전으로 날카롭게 단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나 흑도인들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았다.
생도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곳 어딘가에 비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낱 생도들이 저리도 당차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 * *
‘찾았다!’
시커먼 구멍 앞에 선 철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변 흔적을 보니 벌써 몇 명이 굴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비량이라는 자인가?’
뭐, 누구라도 상관없다.
굴이 아직 그대로 유지되는 걸 보면 이곳으로 다시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하나 마단곡은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그리고 반드시 입구를 무너트려야만 영단이 있는 곳까지 갈 수가 있다.
“그럼 이제 들어가…….”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등을 때렸다.
“야, 신입!”
“……!”
철운이 흠칫거리고는 뒤를 돌아보자, 산채에서도 시시때때로 자신을 갈구던 팔자수염이 아닌가?
‘저 새끼가 또…….’
팔자수염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암벽 아래의 구멍을 보고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 맹랑한 신입 새끼 보소. 지금 동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판에 쥐구멍 찾아서 숨을 궁리부터 해?”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냐? 새끼야. 여기에 쥐구멍 파서 숨으면 살아남을 것 같았어? 이 새끼는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탁!
팔자수염이 손찌검을 하려는데 철운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팔자수염의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어쭈? 이젠 하극상까지? 너 이 새끼 진짜 혼나 봐야 정신 차리지? 이거 안 놔?”
“어이.”
“뭐?”
“너 내 누군지 아니?”
“뭐 이 새끼야?”
“내가 마교 서열 백서른…… 아, 됐고. 나 무영마(無影魔) 철운이야.”
“이 병신이 뭐라는 거야? 뒈질 때가 되니 대가리가 처돌아……!”
짜악!
순간 팔자수염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는 믿기 힘든 상황에 눈알을 부라리며 철운을 노려보았다.
“크윽, 이런 씹새끼! 감히 나를……!”
짜악!
“으윽! 너 이 새끼, 당장 이 손……!”
짜악!
“컥!”
짜악!
“억!”
짜악! 짝! 짝! 짝! 휙!
“자, 잠깐…… 잠깐!”
짜악!
“크윽! 잠깐만요! 잠깐만요!”
철운이 그제야 손찌검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렸다.
눈물까지 핑 돈 팔자수염이 심호흡을 하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순식간에 부푼 그의 뺨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그가 쥐어짜듯 말한다.
“용서해…… 주십시오.”
“싫어, 이 새끼야.”
우둑! 빠악!
한순간에 손목이 꺾이고 얼굴이 휙 돌아간 팔자수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그래도 제 죽을 자리는 알아서 찾아오네. 개새끼.”
철운이 무심한 눈길로 쓰러진 팔자수염을 보더니 냅다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저만치 튕겨 나간 팔자수염에게 일별도 주지 않은 철운이 다시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는 방해할 사람은 없다.
팟!
순간 그가 마단곡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두더지 굴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쿠구구궁……!
그러잖아도 한 사람이 겨우 미끄러질 정도로 좁은 구멍이었기에 입구는 순식간에 바위와 돌덩이로 메워졌다.
그리고 철운은 좁은 통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