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너 내 누군지 아니?
삐잉!
가느다란 소리가 고막을 벨 듯이 스친다.
피츗!
“커억!”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목을 부여잡더니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익! 어디냐!”
공포에 휩싸인 흑산채 무인이 만도를 콱 움켜쥐고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벌써 세 명째다.
공기를 에는 가느다란 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한 사람이 쓰러져 갔다.
말로만 듣던 유성추다.
실제로 강호 생활을 하면서 유성추를 사용하는 적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사용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이 적은 유성추를 제법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제길! 숨어 있지 말고 나와랏!”
흑산채 무인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쓰러진 동료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목이 길게 찢어진 동료가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젠장, 미안하다.’
어금니를 뿌득 간 흑산채 무인이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는 쓰러진 동료의 칼을 다른 손으로 쥐었다.
“후욱, 후욱……!”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조금씩 자제하면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조금 전 동료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재빨리 칼을 집어 던졌다.
쒸에에에엑!
칼이 파공성을 길게 이끌며 연무 너머로 사라진다.
흑산채 무인이 눈을 크게 떴다.
쓰러진 동료가 죽어가면서 가리킨 방향이 얼마나 확실할지는 알 수 없다.
재수 없으면 또 다른 동료가 칼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하나 지금은 뭐라도 해야만 한다.
눈 깜빡할 사이에 어디에서 유성추가 날아들지 모르니.
따아앙!
불꽃이 잠깐 일어나면서 방금 던졌던 칼날이 튕겨 나가는 걸 보았다.
‘여자?’
분명 불꽃이 터진 순간 연무 너머로 비친 그림자는 남자가 아닌 여인이었다.
“잡았다, 이년!”
파바밧!
흑산채 무인이 곧장 불꽃이 터졌던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팍!
순간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그가 여인을 향해 떨어지면서 만도를 수직으로 내려쳤다.
쒸에에엑!
삐잉!
순간 섬뜩한 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 스쳐 지나갔다는 소리는 적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뜻.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만도를 내려쳐야 하는데……?
“어……?”
휘리릭!
순간 양손이 뭔가에 묶인 것처럼 휙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뭐, 뭐……!’
피잉!
슈우우우욱!
이번엔 뭔가에 묶인 두 손이 곧장 바닥을 향해 잡아당겨졌다.
콰다앙!
그대로 땅바닥까지 추락한 사내는 얼굴이 짓뭉개지면서 무참히 고꾸라졌다.
“끄으으……!”
신음을 터뜨린 사내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드는 비도 한 자루를 보았다.
“으아아아압!”
그가 비명 같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만도를 들어 올렸지만, 그보다 앞서 날아든 비도가 목을 베며 지나갔다.
피츗!
“……!”
츄아아아아!
선혈이 생긴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지면서 사내가 고꾸라졌다.
털썩!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사내 앞으로 여인이 사박사박 걸어왔다.
“후우. 살짝 위험했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비도를 거둬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진소홍이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금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괜찮겠지?”
적이 너무 많다.
연무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인간들은 대부분 적이었다.
한 번쯤은 생도들이나 아군을 만날 법도 한데 하나같이 적이었다.
그만큼 적의 머릿수가 많다는 뜻이다.
그래도 여전히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국은 아니리라.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남궁천 덕분이다.
적에게 포위되자마자 이런 배수의 진을 치고 연막탄까지 터뜨렸으니까.
강호 경험이 나름 풍부한 표국주와 비월문주조차 적들의 연합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만이 발 빠르게 대책을 내세웠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확실히 잠룡이다.
이제 진소홍은 웬만한 고수들보다 남궁천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납치 사건 때도 자신을 구한 건 남궁천이 아니던가?
게다가 지나가듯 한마디씩 툭툭 던져주는 말들이 의외의 깨달음을 줄 때마저 있다.
‘만약 남궁천이 정말 천하제일룡이 되고…… 내가 회주가 되어서 혼인을 하면……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진소홍이 괜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달콤한 망상에 너무 빠져들었던 것일까?
쒸에에엑!
문득 뒤통수에서 서늘한 감각과 함께 파공성이 터졌다.
“헛!”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얼른 돌아서며 본능적으로 유성추를 뿌렸다.
삐이잉!
하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일까?
푹!
적에게 날아간 비도가 옆구리에 박혀 들었지만 치명상을 주진 못했다.
대신 놈은 옆구리에 비도를 박은 채로 진소홍을 향해 창을 내질러왔다.
“헉!”
진소홍이 헛바람을 삼키며 얼른 물러서려는데, 놈은 동귀어진을 각오한 것인지 은잠사를 움켜쥐고는 확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악!”
반사적으로 끌려 나간 진소홍의 가슴으로 장창이 쇄도했다.
쒸에에엑!
‘죽는……!’
푸욱!
섬뜩한 파육음에 진소홍의 전신이 전율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 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춘 창끝을 보았다.
“아…….”
안도와 공포가 뒤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창을 내지른 자의 가슴을 뚫고 검신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촤아아악!
검신이 횡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몸을 베어내자, 적이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넘어갔다.
쿠당!
쓰러진 적 너머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비량이었다.
분명 적이 쓰러지던 그 순간만 해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던 그가 진소홍을 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미소 지었다.
“괜찮니?”
“아…… 네…….”
“전투 중에 딴생각을 하면 안 돼요.”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하는 비량.
이 사람이 바로 조금 전에 적의 심장을 뚫고 상반신을 절반 정도 찢어 버린 사람이 맞나 싶다.
“다친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다른 생도들은?”
“모르겠어요.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에서 누가 싸우고 있는지…….”
“그래. 너무 걱정 마. 그래도 다들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니까.”
“네. 그런데 이대로 가면 싸움이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으음. 괜찮아. 우리에겐 비밀병기가 있으니까.”
“비밀병기요?”
진소홍이 움찔거리고는 비량을 돌아보았다.
‘역시 교관님은 알고 계셨던 걸까?’
하긴.
남궁천은 무연회 우승자가 아닌가?
그 재목을 알아본 게 자신뿐만은 아니리라.
어? 그런데 잠깐! 조금 전에 저기 지나간 사람은 남궁천 같은데?
진소홍이 얼른 몸을 날리는 사이, 비량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이젠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사실은 내가 무림맹 비선향 출신으로…… 어? 소홍아? 어디 가니?”
연무 속으로 사라지는 진소홍의 뒷모습을 보며 비량이 애처롭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진소홍은 조금 전 근처를 지나갔던 남궁천을 찾느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등 뒤에 선 누군가와 툭 부딪쳤다.
깜짝 놀라서 휙 돌아서니 전신이 시커먼 노인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게 아닌가?
‘흡!’
순간 진소홍은 숨도 쉬지 못했다.
상대의 전신에서 진득하게 우러나오는 사기!
흑도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누구지……?’
저런 고수가 적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가?
마치 독사 앞에 쥐가 된 기분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순간이었다.
흑선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소홍을 힐끔 보더니 피식 조소를 지었다.
“아이야, 내 앞을 막은 건 아니니 넘어가 주마.”
“아…….”
팟!
다음 순간 흑선자가 진소홍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너무나 감쪽같이 사라지니 잠깐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조금 전의 그런 고수가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지? 혹시 남궁천, 너와 관련된 일이야?’
방향을 잃은 진소홍의 눈길이 연무 속을 어지럽게 헤맸다.
* * *
“여깁니다, 주군!”
차무진을 따라온 곳을 보니 과연 암벽과 바닥이 맞닿은 부분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두더지 굴 같은 게 있었다.
손우곤을 비롯한 창응대원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손우곤이 입구를 관찰하고는 말했다.
“경사가 져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들어가자.”
“주군, 저희들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기관장치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됐어. 말했지? 난 아무도 안 믿는다.”
“저희들은 믿어도 된다니까요. 그러니…… 어? 주군!”
손우곤이 말을 더 잇기도 전에 남궁천이 몸을 휙 날리더니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깜짝 놀란 손우곤이 얼른 좁은 입구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우리도 뒤따른다!”
“존명!”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차례대로 좁은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한 명 정도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었지만 조직력이 탄탄한 자들답게 순차적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한편 먼저 들어간 남궁천은 어두컴컴한 두더지 굴 같은 곳을 끝도 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촤르르르르륵!
‘제기랄, 뭔 놈의 입구를 이딴 식으로 만들었어?’
이건 정말이지 예상 밖이다.
아무리 마교가 어려운 시기에 비상시를 대비해서 만든 마단곡이라지만, 천마에게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한데 천마가 이렇게 흙 칠갑을 하면서 두더지 굴을 미끄러져 간다고?
땅굴에서 미끄러지는 천마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욕심 앞에서는 개뿔, 체면도 없는 법이구나.’
한데 또 가만히 생각하니 천마라면 굳이 직접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하를 부려먹겠지.
뭘 믿고?
보나마나 고독을 심어놓거나 하겠지.
미끄러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별생각을 다 하는 남궁천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끄러지더니 어느 순간 발밑이 허전해지면서 붕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어……?”
이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진다아아앗!”
남궁천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추락이 시작된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슈우우우우, 콰다아앙!
단단한 땅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친 남궁천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야……! 제기랄, 무슨 입구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놨어! 적어도 마단곡이면 품위가 있어야지! 품위가! 천마의 품위는 다 어디에 팔아먹고……!”
“우아아악! 주구우우운!”
머리 위에서 메아리치는 애절한 목소리.
남궁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시커먼 그림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크!”
콰다앙!
남궁천이 얼른 옆으로 피하니 손우곤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 너무하십니다…….”
“내가 네 아래에 깔려 죽길 바란 거냐? 고얀지고.”
“그, 그건 아니지만…….”
손우곤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쿵쿵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컥!”
“으악!”
창응대원들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창응대원들의 앓는 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