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67화 (167/508)

166. 너 내 누군지 아니?

비월문과 장흥표국이 생사를 걸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그 시각. 백여 장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리가 있었다.

“호오, 연막탄을 뿌렸군. 이래서야 비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겠는데.”

전신이 시커먼 흑선자가 잔뜩 쉰 목소리를 흘리자, 곁에 선 옥소공자가 부채를 살랑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일단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다니 어딜?”

옥소공자가 부채를 착 접고서는 연무가 자욱한 협곡을 가리켰다.

“저기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적노파파가 피식 웃더니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지금 봐서는 호랑이굴이 아니라 여우 굴 수준이군.”

“여우 굴에 호랑이 가죽이 있으면 더 좋은 거죠.”

“어디 한번 확인해 보지. 과연 호랑이 가죽을 보게 될지, 여우 똥을 보게 될지.”

말을 마친 적노파파가 바닥을 차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러자 적상방주 요충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중얼거렸다.

“저 할망구가 좋은 건 혼자 다 처먹으려고 하는군! 이래서 나이 들면 욕심이 더 많아진다니까. 가자!”

요충이 바닥을 차며 날아가자, 그 뒤를 적상방 수하들이 ‘복명!’을 외치며 뒤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는 흑선자가 조소를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초짜도 아니고 애기들 데리고 와서 설치는 꼴이라니. 쯧.”

“하하. 뭐,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거겠죠. 그럼 가시죠.”

파앗!

옥소공자가 먼저 몸을 날려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흑선자가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저마다의 방식이 있겠지. 그리고 저마다의 꿍꿍이도 있을 테고.”

타앗!

마지막으로 흑선자가 바닥을 차며 검은 바람 줄기가 되어 날아갔다.

가장 선두에 섰던 적노파파는 연무 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앞을 가로막던 흑산채 무인의 목을 손가락으로 움켜잡았다.

콰직!

“크어어억!”

“아이야, 내 앞길을 막지 마라.”

푸아아악!

목이 통째로 뜯겨 나간 무인이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걸레 조각처럼 널브러졌다.

마침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산채 무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적노파파를 보았다.

‘누, 누구……?’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전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생긴 노파가 아닌가?

한데 손톱은 피처럼 새빨갛고,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손 역시 온통 시뻘겋다.

그 소름 끼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검을 앞세우는데, 적노파파가 괴이한 미소를 짓는다.

“너는 앞길을 막은 게 아니니 용서하마.”

슈팟!

순간 적노파파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한참이나 눈을 끔뻑이던 흑산채 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

하나 그는 다음 순간 생각이 끊어지고 말았다.

슈컥!

한 줄기 빛살이 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사내의 목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

머리가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터지면서 사체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도를 도집에 갈무리한 요충이 쓰러진 시체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부하들에게 일렀다.

“난전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출입로가 있다면 암벽 근처일 가능성이 높을 테니 가장자리부터 훑어간다.”

“복명!”

대답과 동시에 적상방 무인들이 빠르게 연무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뒈져어엇!”

낫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들었다.

쉭쉭쉭쉭!

허공에서 회전하는 낫의 파공성만 들어도 섬뜩할 지경.

하나 비량은 느긋하게 허리를 젖혀 낫을 피하더니 얼른 검을 들어 고리에 걸었다.

카라라랑!

검에 걸린 낫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휘릭!

비량이 순간적으로 회전하면서 바로 서더니 낫을 날아왔던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쉭쉭쉭쉭!

이번에도 빠르게 회전한 낫이 제 주인의 가슴 깊숙이 처박혔다.

푸우욱!

“어억!”

가슴을 움켜쥔 사내가 천천히 쓰러지자 비량이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렇게 연무가 자욱한데 혼자 살겠다고 이런 걸 막 날리면 동료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크윽…… 개새……!”

사내가 포기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힘겹게 뽑아 들었다.

하나 그는 행동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비량이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으면서 전에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읊조렸기에.

“쯧…… 이왕 가시는 길 편하게 가실 것이지.”

“끄으어어아악!”

퍼억!

둔탁한 소리에 이어 사내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져 나가자, 비량이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흐음.”

꽤나 긴 싸움이 될 듯하다.

적들의 무공 수위가 엄청난 수준은 아니지만, 몇몇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 섞여 있긴 하다.

무엇보다 적의 머릿수가 너무 많다.

삼봉파와 흑산채를 합하면 수백 명에 이르니 싸움이 일찍 끝나진 않으리라.

“뭐, 견습은 확실히 되겠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린 비량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을 키우자 자욱한 연무 속에서도 어느 정도는 가시거리가 확보됐다.

마침 저만치 유현이 적들과 어울려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유현은 화산파의 제자답게 현란한 검술을 보이고 있었다.

얼핏 흩날리는 꽃잎이 보이는 것만 같다.

유려한 검식은 검로 하나하나가 아름답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매화는 적의 요혈 곳곳으로 날아든다.

그 변화무쌍함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매화는 치명적이지 못했다.

요혈에 다다른 매화는 결정적인 순간 바람이 멎어 버리고 갈 길을 잃는다.

그렇게 바닥으로 흘러내리던 매화가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그럴 때마다 유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아직도……!’

유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화무쌍한 검초가 펼쳐질 때마다 적들은 기겁을 하며 물러나지만 매번 통하지는 않았다.

‘남궁천이 그리 말했건만!’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면서도 상대의 목숨을 끊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적을 살리면서 싸우는 것은 고수들도 힘든 법.

그러니 살검을 펼치지 않은 채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유현은 지금 어쩔 수 없이 몇 배의 공력을 사용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캉! 카캉!

슈팟! 촤아악!

“치잇!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어차피 겉보기만 화려할 뿐이다! 한꺼번에 덮쳐!”

삼봉파 무인들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유현의 무공에 움찔거리고는 경계를 했으나, 실속 없이 현란하기만 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공격이 더욱 과감해졌다.

서너 명이 합격술을 펼쳐오니 유현은 조금씩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적들 중에는 무공 수위가 꽤 높은 자들도 섞여 있었다.

‘어째서……!’

카앙! 촤앗!

검을 튕겨내고 살을 벤다.

핏물이 튀어 오르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다.

‘어째서 나는 아직도……!’

깡! 까앙! 촤앗! 샤악!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튕겨내고는 옆구리와 어깨를 각각 베어냈다.

하나 역시 잠시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각오가 안 되었단 말인가!’

쩌엉!

촤르르르르륵!

육중한 타격음이 울리면서 유현이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크읏!”

손이 저릿저릿 울리고 팔이 뻐근해져온다.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미약하나 내상을 조금 입어 버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전력을 다해 살검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공력이 지나치게 넘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내상을 입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하물며 유현은 강호초출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때마침 등 뒤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파공성이 이어졌다.

“설치지 마라! 애송이!”

쒸에에에엑!

순간 뒤를 돌아본 유현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막상 죽음을 목전에 두자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들을 상대로 손속에 사정을 둔 의미가 무엇인지 회의감도 든다.

그런데 묵직하게 떨어지던 대부가 유현의 이마를 쪼개기 직전,

까아아아앙! 피츗!

청명한 금속성이 고막을 울린다.

촤르르르르륵!

튕겨 나간 상대가 대부를 든 채로 석 장이나 미끄러졌다.

유현이 눈을 부릅떴다.

“교, 교관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교관님! 괜찮으십니까?”

유현이 비량의 말을 가로지르며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일격을 막아낸 비량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간발의 차이로 유현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무겁게 떨어지는 대부를 완벽하게 걷어내진 못한 것이다.

“괜찮…….”

철썩! 철썩!

비량이 대답을 끝맺기도 전에 유현이 돌연 제 뺨을 세차게 후려치는 게 아닌가?

비량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어? 왜 그래?”

하나 유현은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분한 표정으로 제 뺨을 한 대 더 때리더니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고개를 숙인 그의 두 눈에는 이제 독기가 그득 담겨 있었다.

일순간의 망설임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동료의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게 아닌가?

어찌 이런 마음으로 강호인이 되겠다는 건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만한 결단력도 있어야 하는 것을!

비량이 유현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살짝 스친 거야. 사실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난 한때 비선향 출신으로…… 어?”

타닷!

유현이 비량의 말을 더 듣지도 않은 채 바닥을 박차며 튀어 나갔다.

곧이어 유현의 입에서 기합성과 함께 살검이 펼쳐졌다.

“하아앗!”

매화가 날카롭게 흩날리며 적의 요혈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 끝에 목숨을 잃은 적이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파바밧!

유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상대를 노리면서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량이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어깨 조금 내어준 것치고는 좋은 효과네.’

그런데…… 마무리는 짓고 갈 것이지.

흐뭇하게 웃는 비량의 뒤로 다시 대부가 반월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슈우우우우웅!

창졸지간 비량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뻗더니 대부의 날을 잡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콱!

“헛……!”

대부를 휘두른 거구의 사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찌……?’

비량이 고개를 꺾어 들고는 거구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비록 마무리를 떠넘기고 달려간 녀석이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녀석이죠. 안 그래요?”

“무, 무슨……?”

비량이 싱긋 웃었다.

“내 제자를 각성시켜 준 대가로 편히 보내 드리죠.”

슈컥!

순간 빛줄기가 수직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거구의 사내가 정확하게 좌우로 갈라지며 넘어갔다.

쿵, 쿠웅!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비량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천이는 어디 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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