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아니, 왜 안 나타나!
어쨌거나 날아드는 화살을 낚아챈 남궁천의 실력만큼은 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강궁은 도지백의 특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계림신궁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였으니까.
한데 그 화살을 남궁천이 한손으로 낚아챈 것이다.
도지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저 애송이는 뭔…… 아니, 애송이라 할 수도 없겠군!’
마침 옆에 선 무인이 나직이 보고했다.
“저 아이가 바로 남궁천인 것 같습니다.”
“그래. 저놈이 남궁천……!”
도지백이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강호신룡이자 무연회 우승자.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호신위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못된 놈!
“과연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월문주인 연추량조차 자신의 화살을 낚아챌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한편 연추량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길로 남궁천을 보았다.
‘방금 그 화살을 맨손으로……?’
자신이라면 잡았을까?
아니다.
잡지 못했으니 눈앞에 잡힌 화살을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했겠지.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향해 남궁천이 말한다.
“이제 달리시죠?”
“응?”
“앞뒤가 막혔으니까 우선 좀 더 싸우기 편한 곳으로 가자고요.”
“거기가 어딘데?”
이미 협곡으로 들어서서 양쪽 길목이 다 막힌 상태였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상태.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한데 남궁천이 엉뚱한 말을 한다.
“조금 지나오긴 했는데 아직 완전히 늦진 않았어요. 달려요! 어서!”
“그러니까 그게 어디…… 응? 어…… 야!”
연추량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궁천이 벌써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뭘 알고 달리는 건가?
하나 연추량은 더 이상 남궁천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낚아챈 녀석이다. 게다가 조금 전 단호하게 말하던 그 표정은 왠지 모르게 신뢰를 가지게 했다.
마치 이런 궁지에 몰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태연했던 말투.
짧은 망설임 끝에 연추량이 버럭 소리쳤다.
“다, 달려라! 남궁천의 뒤를 따른다! 국주, 어서!”
“예? 아, 우리도 달린다! 남궁천의 뒤를 따라라!”
마지막 남궁천의 표정을 바로 옆에서 보았던 이사흠이었다.
그 역시 왠지 모르게 남궁천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 확신에 찬 표정. 그건 객기나 오만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뭔지 모르지만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겪어본 강호 고수의 분위기였어.’
이사흠은 거상이다.
금룡만큼은 아니더라도 한평생 표국을 운용하면서 나름의 눈치와 생존 본능이라는 것이 생겼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본능은 남궁천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한편 남궁천은 표행을 이끌고는 앞장서서 달려가며 소리쳤다.
“비켜, 이 새끼들아아아!”
질풍처럼 달려오는 남궁천과 그 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표행!
뿌연 구름먼지까지 이끌며 정면으로 달려들자 오히려 삼봉파가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저것들이 미쳤나?’
도지백이 눈살을 푹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삼봉파는 모든 문도들을 끌고 온 셈이었다.
이미 계림에서 최대 문파가 된 그들은 머릿수부터 비월문과 표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데 맹랑한 생도 하나가 표행을 잔뜩 이끌고 삼봉파로 향해 돌진을 해?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구나. 저 간덩이 부은 놈에게 본 때를 보여주어라!”
“예! 문주님!”
제일 먼저 삼봉대주가 대답과 동시에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삼봉대주가 우렁차게 외쳤다.
“노옴! 본 문을 우습게 보는……!”
“시끄럽고 비키라고 했지!”
퍽! 퍼퍼퍼퍽!
놀랍게도 남궁천은 달려오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며 검집채로 휘둘러댔다.
삼봉대주가 순간 입을 딱 벌리고 허공을 보았다.
남궁천을 막으려고 달려간 대원들이 일제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저, 저게 사람인가? 뭔 생도 놈이 저리도 강한……?’
뒤를 따르던 연추량과 이사흠도 마찬가지로 놀라서 입을 척 벌렸다.
‘저, 저놈은 진짜구나.’
‘강호신룡이라는 소문이 허명이 아니었어!’
하나 제아무리 신룡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휘몰아치는 인해전술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악에 받친 도지백이 목청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뭣들 하느냐! 죄다 달려들어서 저놈을 막앗!”
“존명!”
삼봉파 문도들이 일제히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우르르 달려 나갔다. 협곡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뛰쳐나가니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노오옴! 나를 넘어서진 못할……!”
삼봉대주가 기합성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데, 순간 남궁천이 바닥을 차고 튀어 올랐다.
타앗!
“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지른 남궁천이 단숨에 삼봉대주 눈앞까지 날아들었다.
‘뭔 애새끼 경공술이 어디 평생 도망만 다닌 놈처럼……!’
그는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남궁천이 발바닥이 그대로 그의 얼굴을 찍어 눌렀기에.
퍽, 콰앙!
그대로 땅으로 꺼진 삼봉대주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문 채로 기절해 버렸다.
동시에 하늘로 튕겨 날아오른 남궁천이 허공을 부웅 가로질렀다.
“저, 저……!”
그 가공할 만한 경공술에 후미에서 지켜보던 도지백이 손가락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장문인, 조심하십시오!”
“장문인! 저희가 막겠습니다!”
순간 일봉대주와 이봉대주가 도지백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이 근접전을 방어하는 동안, 도지백이 화살을 재워 쏘는 방식은 이미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구도이기도 했다.
한데…….
“어……? 방향이……?”
파바밧!
허공에서 발을 구른 남궁천이 방향을 비틀더니 엉뚱한 곳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일단 허공에서 보법을 펼치듯 방향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수준이었다.
경공에 도가 텄다는 곤륜파의 제자들이 아니고서야 저 어린 나이에 허공답보를 비슷하게 흉내 낼 만한 자가 어디 있을까?
어쨌거나 새처럼 날아간 남궁천이 벽라검을 휘두른 건 엉뚱하게도 남측의 암벽이었다.
열심히 뒤를 쫓아 달리던 연추량과 이사흠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쟤 어디 가는 거야?’
‘혹시 뛰어올랐다가 균형을 잃은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흐아아아아앗!”
순간 천지가 격동할 만한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오더니 남궁천이 그대로 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창벽뇌검(蒼碧雷劍)!’
남궁천은 머릿속에서 창벽검의 초식 한 구결을 떠올렸다.
짙푸른 공기가 검을 중심으로 응축하더니 형형한 검기를 생성하며 암벽을 향해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꽈광! 짜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아앙! 쿠구구궁!
놀랍게도 단단하게만 보이던 암벽이 육중한 굉음을 터뜨리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연추량과 이사흠, 그리고 그들을 쫓던 강상도와 앞을 막아섰던 도지백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암, 암벽이……!’
‘무너지고…… 있다!’
‘저놈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나 그들은 곧 남궁천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뒤에…… 길이 있어?’
놀랍게도 암벽은 얇은 막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니 또 다른 협곡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 것이었다.
처억!
바닥에 착지한 남궁천이 뒤를 돌아보고는 소리쳤다.
“뭐 해요? 어서 달려야지!”
“응? 아, 그, 그래!”
“달려라! 남궁천을 따라가라!”
두두두두……!
표행이 다시 속도를 올리면서 무너진 암벽 사이로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악으로 잠시 몸이 굳어 있던 도지백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쳤다.
“뭐, 뭣들 하느냐? 이것들아! 쫓아야 할 것 아냐! 강 건너 불구경하고만 있을 거냐!”
“아, 쫓아라! 놈들을 잡앗!”
삼봉파와 흑산채도 표행을 쫓아 우르르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도지백과 강상도는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저 어린 녀석이 이런 길을 어찌 알고 있었던 거야?’
‘우연인가? 그럴 리가…….’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 사태를 날카롭게 눈여겨보는 이가 있었으니.
‘역시 맹이 지도를 입수한 건가? 하나 반쪽짜리 지도. 기관진식에 대한 지도가 내게만 있는 이상 마단곡은 본 교가 되찾는다!’
철운이 박도를 콱 움켜쥐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다만 비량이 아닌 남궁천이 전면에 나선 것은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하긴. 비량이 맹에서 부리는 극비 인물이라면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고 할 터.
생도가 설치는 것도 그리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리라.
나름의 결론을 내린 철운이 흑산채 무인들과 섞여서 달렸다.
한편 협곡 끝까지 달린 남궁천이 막다른 길이 나타나자 그제야 경공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그를 쫓아왔던 표행도 깎아지른 듯 치솟은 암벽에 당황하면서 멈췄다.
“이, 이게 어찌 된 것이냐? 막다른 길이잖느냐!”
연추량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외치자 이사흠도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인가? 이래서야 빠져나갈 수가 없지 않나?”
두 사람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자 뒤를 따르던 표행은 길 잃은 양처럼 우왕좌왕거렸다.
하지만 남궁천은 태연한 표정으로 들어왔던 길을 저벅저벅 되돌아갔다.
차아앙!
돌연 검을 뽑아 든 남궁천이 저만치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적들을 보며 차갑게 일렀다.
“그만 좀 징징대쇼!”
“뭐, 뭐라?”
“양쪽에 끼어서 전멸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배수의 진을 치는 게 낫잖아. 안 그래요?”
“그, 그야 그렇지만……!”
“길이 막히면 뚫고 간다. 그게 강호의 방식. 도망자의 철학, 궁지에 몰린 쥐의 본능. 이제 불리한 지형은 벗어났으니 싸워 이기면 그만입니다.”
“싸워 이기라니. 그게 말처럼 쉬운…….”
“평생 도망만 다닐 생각입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정이 나아지겠지? 아뇨. 시간이 흐를수록 더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할걸요? 그러다가 후회의 길목에 들어서면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어지는 겁니다.”
“……!”
“늦기 전에 싸우세요. 싸워서 이겨내란 말입니다! 최악의 지형은 피했잖아요? 최악은 아니구나, 싶을 땐 싸우는 겁니다!”
후우우우웅!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남궁천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끈질기게 늘어졌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의 등이 넓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보는 연추량과 이사흠은 내심 뜨끔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연추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지. 어느새 내가 이렇게 나약해졌던가? 오로지 살아서 달아날 생각만 하다니. 죽기 살기로 부딪칠 생각은 애초에 저 버렸으니 일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을.’
이사흠도 연추량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고도 안락만 추구했구나. 그러니 매번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남궁천이라 했던가? 저 아이의 말이 백번 옳다. 한낱 생도가 저런 결의를 보여주다니. 내 나이가 부끄럽구나.’
남궁천이 검을 척 들어 올렸다.
“인해전술도 먹히지 않을 지형이다! 이제는 동등한 조건! 저 비열한 것들과 싸워서 짓밟아 버리자! 이 강호에 아직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자!”
“우와아아아아!”
기적처럼 사기가 오른 일행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