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63화 (163/508)

162. 아니, 왜 안 나타나!

이사흠이 이끄는 표행은 이제 협곡으로 들어섰다.

표물을 잔뜩 실은 수레들의 뒤를 따르는 남궁천은 자꾸만 뒤를 힐끔거렸다.

‘이상하네. 올 때가 됐는데…….’

남궁천이 날카로운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 근처다.

도절귀가 그린 지도!

마단곡의 위치!

마단곡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표행이 어느 순간 발이 묶여 있어야 할 터인데…….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이 병신들은!’

혹시나 삼봉파가 멍청해서 뒤를 쫓아오지 못할까 봐 일부러 길에 표식을 남겨두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비월문이나 장흥표국이 안다면 난리가 날 테지만.

고개를 꺾어 들고 위쪽을 보아도 흑산채가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어……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되는데…….’

조금 전 마단곡으로 빠졌어야 할 길은 지났다.

‘이런 멍청한 놈들! 이렇게 굼떠서 산적질로 잘도 먹고 살겠다.’

남궁천은 팔자에도 없는 산채 걱정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계속 표행을 이어갈 수는 없는 상황.

뭔가 수를 써야 한다.

주변을 한 차례 슬쩍 둘러본 남궁천이 수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달그닥…… 달그닥…….

남궁천의 속도 모르는 수레가 야속하게 굴러간다.

“날씨 차암 좋다아.”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기지개를 늘어지도록 켠 남궁천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아, 아무도 안 보지?’

순간 남궁천이 검집을 수레바퀴 쪽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덜컹!

콰작!

검집이 끼어 버리자 수레가 거칠게 흔들리더니 이내 바퀴가 부서져 나갔다.

쿠궁……!

이히히히힝!

수레가 기우뚱 쓰러지면서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난리가 났다.

“워어! 워!”

쟁자수들과 표사들이 얼른 달려와 말을 진정시키는 사이 연추량이 남궁천에게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어…… 그냥 걸어가고 있었는데 바퀴가 제 검집에 걸렸어요.”

“뭐?”

연추량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바퀴가 검집에 걸려? 그 반대겠지, 인마!

연추량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표국주 이사흠이 다가와서 상황을 살폈다.

“흐음. 바퀴가 완전히 부서졌군요.”

“미안하오, 국주. 저 생도 녀석 때문에…….”

“아닙니다. 여분의 수레바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잖아도 낯선 길로 들어선 터라 쟁자수들이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고요.”

“끄음. 너는 제발 좀 조심해라!”

연추량이 남궁천에게 버럭 소리 지르자, 남궁천이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바퀴가 갑자기 검집으로 굴러들어온 건데.”

“거, 말 같잖은 소리 좀 그만하고!”

“죄송합니다. 저도 좀 지쳤나 봐요.”

지치긴 개뿔……!

연추량이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경험이 일천한 생도라지만 남궁천의 무위가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는 그였다.

무연회에서 우승을 한 데다 삼봉파 소문주와 호신위까지 박살 낼 정도면 운으로만은 불가능할 것이기에.

그런데 고작 이 정도 걸었다고 지친다?

‘말이 안 되지. 그냥 잘못을 시인하면 될 것을.’

혀를 찬 연추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돌아섰다.

국주의 지시에 따라 쟁자수 몇 명이 부지런히 수레바퀴를 갈았다.

남궁천이 다가가서 괜히 한마디 덧붙였다.

“많이 힘드실 텐데 쉬엄쉬엄하세요.”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자니, 윤종승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뭘 그렇게 힐끔거려? 누구 기다리는 거야?”

“기다리긴 뭘 기다려! 내가 그렇게 간악한 놈으로 보이냐?”

순간 발끈해서 따지니 윤종승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간악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속내를 갈무리한 윤종승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그냥. 계속 뒤를 돌아보니까.”

“주변 경계다.”

“어…… 그래.”

윤종승이 어딘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지나온 길을 빤히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 새끼들. 더럽게 늦게 나타나네. 덜 처맞았나? 역시 그날 삼봉파를 찾아가서 아주 제대로 설쳐줬어야 했나?’

그랬다면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악착같이 쫓아오지 않았을까?

삼봉파든 흑산채든 나타나면 남궁천은 대피를 빌미로 마단곡 쪽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단곡 근처에서 혼선이 벌어진 틈을 타서…….

‘나 혼자 슬쩍 마단곡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 남궁천이 괜히 웃음을 실실 흘렸다.

하지만 한 식경이 다 지나가도록 표물을 덮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협곡을 완전히 빠져나가서 마을에 도착할지도 모를 일.

그렇게 되면 마단곡과 점점 멀어지게 되리라.

‘그러면 곤란한데…….’

남궁천이 턱을 괴고 있다가 윤종승에게 불쑥 물었다.

“흑산채가 왜 안 나타날까?”

“응? 글쎄…… 평소 다니던 길로 안 갔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산채가 표행을 알고 있으면서도 놓칠 리가. 게다가 내 감에 의하면 흑산채는 삼봉파와…….”

“삼봉파와?”

“아니다. 뭐 확실한 건 아니니까. 삼봉파는 왜 안 쫓아올까?”

“그것도 역시 표행이 평소 가던 길로 가지 않았으니까 쫓아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야! 그 정도로 멍청하면 강호에 발을 디디지 말아야지!”

남궁천이 갑자기 버럭 소리치자, 윤종승이 자라목이 되어서는 대꾸했다.

“왜 나한테 그래? 그리고 이건 네가 낸 의견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흐음…… 이상하네.”

“누가 보면 덮쳐주길 바라는 줄 알겠다.”

“누가 그래? 어떤 새끼가?”

이번에도 남궁천이 괜히 발끈하자, 윤종승이 얼른 진정시켰다.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그렇게 일각이 더 흐르자 수레바퀴도 교체가 끝나서 이사흠이 소리쳤다.

“자, 다시 출발한다!”

“잠깐만요!”

남궁천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치자, 이사흠이 눈살을 구겼다.

“뭔가?”

“어…… 음…… 수레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는지 확인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충분한 기술을 갖추고 있으니.”

“어……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라는 말이 있듯이…….”

“출발한다!”

이사흠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덜그덕…… 덜그덕…….

수레가 다시 출발하면서 표행이 이어졌다.

‘젠장, 이 굼벵이 새끼들 왜 안 와?’

남궁천은 이러다가 직접 산채까지 찾아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십여 장 정도를 이동했을까?

“장흥표국이로구나! 길을 돌아가면 본 채가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공력이 담긴 음성이 협곡에 쩌렁쩌렁 울렸다.

표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서는 고개를 꺾어 들자 언덕 위로 흑산채 무인들이 수두룩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마침내 남궁천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흑산채가 나타난 것이다. 머릿수도 표행 인원의 세 배가 훌쩍 넘을 듯했다.

“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반색하자, 표사들은 물론 흑산채 무인들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새끼는 뭐지?’

잠깐 떠오른 생각을 무시한 채 흑산채주 강상도가 입매를 비틀며 소리쳤다.

“본 채를 우습게 본 저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주어라!”

“복명!”

산채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더니 활을 쏘기 시작했다.

쒸쒸쒸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화살 떼가 새카맣게 날아들었다.

“막아랏!”

표사들과 비월문 무인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쏟아지는 화살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생도들 역시 망설이지 않고 나서서 화살들을 쳐냈다.

그래도 모두들 한 번의 실전을 겪어서 그런지 제법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사흠이 내심 안도했다.

‘짐은 아니었구나.’

그때였다.

후방의 표사 한 명이 달려와 외쳤다.

“국주님! 삼봉파가 쫓아온 것 같습니다!”

“삼봉파가 기어이?”

연추량이 화들짝 놀라서 반문하는데, 이사흠이 그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삼봉파가 정파를 표방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러는 사이 어느새 언덕을 달려 내려온 흑산채가 전방을 가득 메워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침내 저만치 삼봉파 무인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표국을 확인하자마자 느긋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비월문주! 내 비무를 회피하고 달아나면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소?”

사자후로 외친 말에 연추량이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비무를 회피한 것이 아니외다! 표행 날짜가 겹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이 자리에서 염치불고하고 삼봉파 장문인께 부탁드리겠소! 본 문과 장흥표국은 지금 흑산채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으니, 비무를 잠시 미루고 우리를 돕는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소!”

“하하하하!”

도지백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딘지 야비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뭐요?”

“물론 내가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는 비월문을 도와 장흥표국을 구하기 위해서요.”

“오오! 고맙……!”

“하나 본 문은 실패했지.”

도지백의 이해 못 할 말에 연추량과 이사흠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서로를 보았다.

도지백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본 문은 두 분을 도와드리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조금 늦게 도착하여 구할 수 없었던 거지. 대신 흑산채를 물리치고 계림에 새로운 표국을 만들겠다고 천명할 수밖에 없었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마치 과거처럼 말하고 있다.

그 속내를 눈치챈 연추량과 이사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다 못한 이사흠이 나서서 버럭 소리쳤다.

“어찌 그런 망발을!”

하지만 도지백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게 왜 그러셨소?”

“뭐요?”

“굳이 비월문을 찾아가서 세 번씩이나 의뢰를 맡긴 당신 잘못이오.”

“그런……! 인두겁을 쓰고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이 사람인가!”

“어이, 국주. 뭘 모르나 본데. 내가 이러는 건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서가 아니야. 사람이라서 이러는 거지. 아직도 사람을 그리 모르나?”

“……!”

연추량과 이사흠의 표정이 팍 굳어지는데, 이번엔 등 뒤에서 흑산채주 강상도가 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얘기는 다 끝나셨나? 그런 이유로 너희들은 여기 묻혀야겠다.”

“치잇!”

연추량이 검을 고쳐 쥐고는 혀를 찼다.

아무 일 없이 표행을 마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흑산채든 삼봉파든 어디서든 방해가 들어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사흠의 말을 듣고 나서는 약간의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삼봉파가 정파를 지향하는 만큼 일단은 힘을 합쳐서 함께 흑산채와 싸워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 헛된 기대였다.

지금 보아서는 이미 삼봉파와 흑산채가 서로 손을 잡은 형국이 아닌가?

언제부터 이들이 손을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동안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두 조직의 합작은 아니었을까?

‘제기랄! 최악이로구나. 이왕 이리 되었으니, 생도들만이라도 살릴 수 있으면 좋겠…….’

쒸에에엑!

그 순간 화살 한 자루가 파공성을 이끌며 연추량 이마로 날아들었다.

파앙!

곧이어 후끈한 바람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화살이 연추량 눈앞에 딱 멈추는 게 아닌가?

‘이, 이건…… 도대체?’

놀랍게도 화살을 낚아챈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천이었다.

연추량은 물론 곁에 있던 이사흠과 화살을 쏜 도지백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궁천이 한손으로 화살을 뚝 부러뜨리더니 입매를 치켜 올렸다.

“아아, 괜히 긴장했네. 나는 또 삼봉파가 우리랑 힘을 합쳐서 싸워줄까 봐 잔뜩 쫄았잖아.”

아니, 그건 쫄 일이 아닌데. 환영할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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