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62화 (162/508)

161. 아니, 왜 안 나타나!

흑산채 신입 철운은 주변을 한 차례 스윽 둘러보았다.

산채 주변으로 산적 같은 무인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딱히 철운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걸음을 놀려 숲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어이, 신입.”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철운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귀에 익은 목소리.

‘시부럴.’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철운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휙 돌아섰다.

“예, 형님. 부르셨습니까요?”

“형님은 지랄. 네가 내 동생이냐?”

“에이,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먹고 살면 형제죠.”

철운이 넉살 좋게 대답했지만, 콧수염이 팔자로 자란 무인은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따악!

순간 뒤통수에 불이 난 철운이 발끈해서는 눈을 부라렸다.

‘이런 씨발!’

“어쭈? 눈깔에 근육이 짱짱하다? 힘 안 풀어? 뭘 야리고 있어, 이 새끼야!”

따악! 딱!

“크읍!”

“새끼가 신입 주제에 선배가 어?”

따악!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면 어?”

따악!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눈깔에 힘을 줘?”

“죄, 죄송합니다!”

철운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그제야 손찌검을 멈춘 사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슬쩍 젓는다.

“하여튼 요즘 신입 새끼들은 빠져가지고.”

“죄송합니다, 형…… 선배님.”

“잘 좀 하자? 너 내가 지켜보고 있다.”

“예, 선배님.”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삼 개월입니다.”

“그런데 벌써 어디 그늘 찾아가서 잠이나 처잘 생각하면 되겠어?”

“그럴 생각…….”

반박을 하려던 철운이 사내의 눈치를 살피고는 얼른 말을 바꿨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새끼야. 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냐. 어디 갈 곳 없는 놈들이 모여서 산채나 짓고 지내는 곳이 본 채가 아니란 말이다. 본 채는 야망이라는 게 있다. 그게 뭐냐면…….”

사내가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하자 철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새끼, 또 시작이네. 확 죽일 수도 없고.

그렇게 한참이나 장광설을 늘어놓은 사내가 다시 한번 철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따악!

“큭!”

“알아들었냐? 그러니까 처신 똑바로 해라. 본 채는 여느 산채와 다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가자, 그제야 철운은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한숨으로 토해내고는 상대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개새끼. 언젠간 넌 내 손에 뒈질 줄 알아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사내가 뒤를 휙 돌아보자, 철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속없는 미소를 방긋 지으며 인사했다.

‘그만 쳐다보고 꺼져, 병신 새끼야.’

마침내 사내가 보이지 않자, 철운은 다시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즈음이 되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처음에는 조금 빠른 수준이었으나, 그는 곧 산새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빨라졌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바위 언덕을 넘고, 장송을 뛰어넘으며 바람처럼 달렸다.

만약 이 모습을 조금 전의 팔자수염이 보았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일개 산채의 신입으로 들어오기에는 경공 실력이 절대 범상치 않았으므로.

그렇게 순식간에 꽤 먼 거리까지 날아간 그가 재빨리 바위 언덕을 뛰어올랐다.

“후우…….”

긴 숨을 토해내는데, 마침 머리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철운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는 깍듯하게 대답했다.

부드러운 실바람이 불어오더니 어느새 철운 곁으로 한 여인이 내려섰다. 새하얀 고양이 가면을 쓴 여인. 바로 백묘였다.

그녀가 쥘부채를 펼쳐 들고는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물었다.

“진전은?”

“죄송합니다. 아직…….”

“벌써 삼 개월이 흘렀어.”

“죄송합니다.”

순간 위기의식을 느낀 철운이 두 눈을 부릅뜨자, 어느새 다가온 백묘가 부채를 내질러 왼쪽 어깨를 베었다.

“크읍!”

하얀 부채에 핏물이 스며들었다.

“알고는 있어? 원래대로 처리하자면 넌 지금 팔 하나를 대가로 치렀어야 해.”

“……!”

“하나 지금 네 팔을 자르면 산채에서 이상하게 여기겠지. 뭐, 상관없이 잘라 버려도 되지만 굳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최대한 빨리 찾겠습니다.”

“그래야지. 이 근방인 건 확실해.”

“서두르겠습니다.”

“기관 지도는?”

“완벽히 암기하고 태웠습니다.”

“그건 잘했네. 비록 반쪽짜리 지도일지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철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도절귀 쪽은……?”

“주화입마에 빠졌다더군.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지. 맹주 그 능구렁이가 곶감만 빼먹고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으니까.”

“손을 썼다면 맹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널 만나러 온 거잖아? 아니면 내가 이런 변방까지 직접 왔을까?”

“그렇군요.”

“맹이 이례적으로 이곳에 지원 인력을 파견했어. 견습생도들일 뿐이지만. 그 녀석들을 통솔하는 자가 비량이라는 게 걸리는 부분이지.”

“아……! 그럼 오히려 잘됐군요.”

“잘되다니?”

백묘가 돌아보며 묻자 철운이 대략의 사정을 설명했다.

“삼봉파가 흑산채에 정보를 흘려주었는데, 장흥표국이 귀물을 싣고 오늘 표행에 나섰다고 합니다. 비월문이 함께 나선 것 같은데, 흑산채의 표적이 될 겁니다.”

“비월문이라면 무림맹이 지원을 보낸 문파군.”

“예, 만약 맹이 정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거라면 흑산채가 습격할 때 대략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백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네. 아무튼 마단곡의 위치만 알면 기관 진식을 파훼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찾아서 결과를 가져오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지원이 필요할까?”

“은밀한 일은 은밀하게 진행해야지요.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좋아. 네 능력을 믿어보지.”

말을 마친 백묘가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 * *

표물을 실은 수레가 부지런히 이동했다.

연추량은 문도들을 이끌면서도 연신 뒤쪽을 힐끔거렸다.

혹시나 삼봉파에서 표행을 방해하려고 뒤쫓을지나 않을지 염려된 탓이다.

그간 자신이 보고 겪은 삼봉파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었다.

그렇게 계림을 거의 벗어날 때쯤 갈림길이 나타났다. 으레 그래왔듯이 이사흠이 남동쪽 길로 들어서는데, 돌연 남궁천이 이사흠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요!”

그 모습을 본 연추량이 괜히 불안해져서 이사흠에게 다가갔다.

‘저놈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이사흠이 남궁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남서쪽으로 가시죠.”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 이사흠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서쪽으로 가면 길을 훨씬 돌아서 가게 된다네. 남동쪽으로 갈 걸세.”

“아직 날짜는 여유가 있지 않나요?”

“표행은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법. 여유가 있다 하여 먼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지.”

“삼봉파가 비월문에 비무 요청한 사실은 알고 있나요?”

“삼봉파가 비무를?”

이사흠이 미간을 좁히자 옆에 다가섰던 연추량이 내심 발끈했다.

‘저놈이 또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는구나!’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사흠에게 해명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이사흠도 더는 묻지 않았다.

삼봉파라면 어떤 식으로든 비월문을 견제하기 위해 수를 썼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남궁천 때문이라는 건 몰랐지만.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삼봉파가 비무를 받지 않고 달아난 비월문을 노리고 쫓아올 수도 있어요.”

“이놈아, 달아나긴 누가 달아나? 표행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더냐! 그리고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된 게 누구 탓인데!”

“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 이놈 죽이면 안 될까? 격하게 묻어 버리고 싶다.

연추량이 내심 부글부글 끓는데, 남궁천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삼봉파가 뒤에서 쫓아오고, 또 흑산채가 어디에서 덮쳐올지 모르는데 늘 다니던 길로 가는 건 위험하지 않겠어요?”

“흐음.”

나름 일리 있는 지적이었기에 이사흠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연추량은 괜히 비월문 때문에 표행의 길이 달라지는 게 부담스러웠다.

“국주, 너무 신경 쓰실 것 없소. 괜히 길을 둘러가다가 날짜를 지키지 못하면 오히려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가던 길로 갑시다.”

“그러다가 삼봉파랑 흑산채를 만나면요?”

“너 어딘지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그냥 삼봉파나 흑산채가 제발 덮쳐주길 바라는 것처럼?”

연추량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남궁천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기분 탓입니다. 흐흥. 제가 왜 굳이 삼봉파와 흑산채를 이용해서 제 배나 채울 생각을 하겠어요? 저는 표행이 안전하도록 돕기 위해 지원을 온 건데요.”

어……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남궁천이 자꾸 나서는 게 마음에 걸린 연추량이 비량을 돌아보았다.

“교관, 생도 관리를 좀 부탁드리오.”

“견습의 가장 큰 목적은 생생한 현장실습입니다. 제가 생도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하면 견습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나서도 너무 나서니까 문제잖소!

내심 치미는 반박을 가슴으로 삼키고는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튼 이건 생도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너는 그저 방해나 되지 않도록 따라다니면서…….”

“아니, 저 아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장문인.”

뜻밖에도 이사흠이 남궁천의 말을 무게 있게 받아들였다.

“국주. 괜히 무리해서 계획을 변경하는 것보다는…….”

“무리하는 건 아닙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빠듯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차라리 더 안전한 길을 도모하는 게 좋겠습니다.”

“끄응. 국주 생각이 정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인 이사흠이 표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남서쪽으로 간다!”

명령이 떨어지자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표물을 이끌고 천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다시 생도들 곁으로 돌아온 남궁천이 내심 콧노래를 불렀다.

‘좋다, 좋아. 모든 게 잘 흘러가는구나.’

그런데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바로 곁에서 백무극이 나직이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와씨, 깜짝이야. 너 언제부터 있었어?”

“방금 옆으로 온 건데.”

“아니! 계림에 온 게 언제부터냐고!”

“…….”

“…….”

“처음부터.”

“미안. 너무 존재감이 없다 보니.”

역시 비무 때 죽였어야 했나?

무극이 잠깐 떠올린 생각을 일극이 반박했다.

‘병신아, 네 실력으로? 잊었냐? 우린 이미 이놈한테 졌다는 걸.’

‘시끄러워.’

일극을 무시한 백무극이 다시 남궁천에게 물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뭐긴. 표물을 지키기 위해서지. 흐흐흐.”

“그러기엔 이상하다. 너의 행동.”

“아, 몰라. 이 길이 더 안전해 보이는 걸 어쩌라고? 너 이 새끼, 설마 너도 내 걸 노리는 거냐?”

“네 거?”

“아니면 말고.”

“이 병신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순간 거친 말이 튀어나오자, 남궁천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냐?”

“방금은 일극.”

“아, 새끼…… 교묘하게 피해 가네.”

남궁천이 구시렁거리며 표행을 뒤따랐다.

한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입매를 슬쩍 틀어 올리고는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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