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진짜 무례한 놈
수천 개의 석회암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는 계림.
그중 한 봉우리 위에 네 명의 흑도인이 고고한 자태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기만 해도 아찔했지만 네 명의 무인들은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흑선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곁에 선 옥소공자가 예의 그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굳이 오실 필요까진 없었는데.”
“흥! 확실히 이 근처에 마단곡이 있는 것일 테지?”
“에이, 강호 일에 ‘확실’을 찾으시면 안 되죠. 강호초출도 아니시면서.”
옥소공자가 능글맞게 웃어넘기자, 흑선자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외면했다.
옥소공자의 말대로 강호의 일에 확실한 것은 없다.
지난 수백 년간 기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강호는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던가?
하나 그중 정말로 기물이 나타난 적은 손에 꼽힐 정도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변방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건 나름 근거가 있다는 뜻.
요충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아니면 말고라는 식은 곤란하오, 옥소공자.”
“흐음. 물에 가라앉으려는 배를 겨우 띄워놓았더니 이런 협박이라니. 가슴이 아프군요.”
“협박이 아니라…….”
“애초에 흑혈대가 일 처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제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겠지요?”
“끄응.”
요충이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본 옥소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굳이 지나간 일을 새삼 따지자는 건 아닙니다. 워낙 제게 추궁하듯 말씀하시니. 하하.”
“…….”
보는 이가 절로 기분이 좋아질 것만 같은 시원한 웃음을 보인 옥소공자가 곧 진중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저는 왜 이곳에 와야 하는지 나름의 추론을 말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제 뜻에 동의를 했고요.”
“그 비량이라는 교관이라는 자가 맹주의 비밀조직원이었다는 건 틀림없을 터?”
“그렇습니다. 비선향(秘線向)이라고 하지요.”
“본 방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량이라는 교관은 확실히 무인으로서 천부적인 자질을 갖췄으나, 지방 한직으로 발령받고…….”
“그 지방 한직에 발령받은 것이 사실이 아닌 거죠. 실제로는 비선향 소속으로 발탁된 것이니까요.”
비선향.
무림맹주의 직속 비밀 타격대다.
무림맹에서도 비선향의 존재에 대해서는 극소수만 알고 있을 정도로 은밀한 타격대.
당연히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꾸려진다.
그런 조직을 옥소공자가 어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견습생들을 이끄는 비량 교관이 바로 그 비선향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옥소공자가 금빛 부채를 살랑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선향 출신이 한낱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그게 사실이면 확실히 이상하지.”
지금껏 잠자코 있던 적노파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하나. 흑혈대주는 절정의 영역에 올라선 고수입니다. 한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생도에게 당했다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량이라는 그 교관의 짓일 테지.”
“그렇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
“이런 변방 지역에는 딱히 관심도 두지 않던 무림맹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견습생들을 파견했지요. 그 어떠한 조직에 편입시키지도 않은 채. 공교롭게도 도절귀가 바보가 되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흐음.”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저는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인데요.”
어느새 옥소공자의 얼굴에는 어딘지 괴이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한껏 흥분했다는 증거다.
평소에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그였지만, 희열을 느끼는 순간에는 어딘지 모를 광기가 스며드는 웃음을 짓는다.
옥소공자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도절귀를 바보로 만든 것은 사실 비량이고, 그 비량은 마단곡의 위치를 알아냈으며, 맹주는 비량을 마단곡으로 보냈다. 하나, 우리가 예의주시하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견습생 파견 임무라는 명목으로 눈을 가린다. 이게 제 추론입니다.”
확실히 그럴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견습생 파견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까.
게다가 옥소공자의 촉은 비교적 확률이 높은 편이다.
적노파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부디 자네 추론이 틀림없길 바라네.”
“뭐, 틀려도 제게 책임 전가하기 없기입니다.”
“대신 맞아도 자네의 공만은 아닐세.”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석회암 봉우리에서 옥소공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음? 방금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남궁천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고 중얼거리자, 팽수혁이 눈살을 잔뜩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무슨 소리가 그렇게 구체적이냐?”
“흐음. 잘못 들었나?”
“쥐 잡은 소리가 아니라 사람 잡은 소리겠지.”
“왜?”
“왜긴 왜야? 네가 삼봉파 소문주와 그 호신위를 개박살 내는 바람에 지금 비월문주께서 병상에 몸져누울 지경이잖냐!”
팽수혁이 버럭 소리쳤다.
정말이지 어떻게 된 인간인지 남의 집에 찾아와서 이렇게까지 민폐를 끼친단 말인가?
생각 구조가 너무 다른 건가?
그런데 심각해진 남궁천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가관이다.
“흐음. 그렇게 속상했나? 역시 직접 패고 싶었던 건가? 한 대 정도는 직접 때리게 남겨둘걸.”
남겨두긴 뭘 남겨둬!
그게 먹을 거냐?
확실히 이놈은 생각 구조가 너무 다르다.
‘나도 어지간히 막 나가는 놈이라지만, 남궁천 이놈은 일절 생각도 없이 막 나가는 놈이라니까.’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장문인께서 그런 걸로 저리 고심하시겠냐?”
“그럼? 이제 싸가지 없는 놈도 얼씬거리지 않는데 뭐가 문제야?”
“너 정말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모르긴 왜 몰라? 곧 표행을 떠나면 마단…… 아니, 아무튼. 뭐가 문제야?”
사실 남궁천은 비월문의 사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마단곡으로 향해 있었으니까. 오히려 마단곡에 가기 위해서라면 비월문도 어떻게든 이용할 그였다.
팽수혁이 내심 혀를 차고는 측은한 표정이 되어서는 문주가 머무는 방을 쳐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비월문주 연추량은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는 총관을 앞에 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이제 어쩌면 좋겠는가? 삼봉파 문주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일세.”
“자식이 곤죽이 되어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총관 역시 시름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추량이 천장을 보고는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인지…… 하필 비무를 신청한 날짜가 사흘 후라네.”
“표행을 떠나는 날이군요.”
“일부러 노린 것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아, 이 일을 어찌 해야겠나?”
“표행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비무를 미뤄야 합니다.”
“그걸 받아들일 삼봉파가 아니니까 문제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총관도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비무 날짜다.
표행 때문에 도저히 비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날짜.
삼봉파는 일방적으로 무시당했다며 무슨 짓이든 저지르려고 할 터다. 최악의 경우는 표행을 쫓아 와서 노골적으로 방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표행을 미루고 비무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문제.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궁천이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연추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니,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생도 놈이 갑자기 여길 왜 온 거야?’
그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궁천이 버럭 소리쳤다.
“장문인! 그게 사실입니까?”
“뭐, 뭐가 말이냐?”
“그 무뢰배 같은 놈들이 비무 신청을 했다고요?”
“그, 그렇네만.”
“아니, 이런 개 같은 것들이! 무슨 낯짝으로 비무를 신청해? 그래서 날짜가 언젭니까?”
“표행을 떠나는 날일세.”
“하! 이 쓰레기 같은 것들 보소. 다분히 의도적이네. 예의를 밥 말아 처먹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건 내 처소에 막 들어오는 너도 마찬가지 같은데.
“장문인!”
“응? 으응?”
“그 비무는 무시하십시오! 표행은 예정대로 떠나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일세.”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번 표행은 길이 아주 좋습니다.”
“길이 좋다니?”
“말 그대로죠. 길이 딱 제가 원하는 마단…… 아니, 재물이 막 펑펑 쏟아질 것 같은 길이랄까요? 흐흐흐. 아무튼! 그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은 무시하고 떠나시죠.”
“우선은 그럴 생각이나 삼봉파에서 가만히 있진 않을 걸세. 최악의 경우에는 표행을 쫓아와 방해할 수도 있네.”
“흐음. 확실히 그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 어딜?”
“삼봉파예요.”
“거긴 왜? 용서라도 빌려고? 하나 그들은 이미…….”
“무슨 말씀이에요? 용서를 왜 빌어요? 용서를. 내가 용서를 해줄까 말까 한 판국에.”
아, 내가 저놈을 잠깐 정상인으로 생각했다.
요 며칠 지내면서 연추량이 느낀 것은 남궁천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물 행선지를 물어보더니 혼자 헤벌쭉 웃는가 하면, 또 표행 날짜를 물어보고는 연신 키득거렸다.
어느 날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무슨 생각을 떠올리는지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다. 몸에 좋은 약이 어쩌고저쩌고 중얼거리면서.
‘확실히 정상은 아닌 놈이지.’
남궁천이 불쑥 말을 이었다.
“삼봉파 문주부터 잡아 족쳐서 비무의 ‘비’ 자도 꺼내지 못하게 해두겠습니다.”
“뭐라고?”
“장문인은 염려 말고 계십시오. 제가 해결을…….”
“자, 잡아! 저 새끼 잡아!”
순간 총관과 호신위가 와락 달려들어 남궁천을 붙들기 시작했다. 하나 남궁천은 공력까지 끌어 올리며 사람들을 떨쳐내려 했다.
결국 지켜보던 다른 생도들도 우르르 달려와 남궁천을 붙들고 매달렸다.
“야, 야! 가만히 있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래?”
“사고라니. 해결을 하고 오겠다는…….”
“그게 사고라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장문인, 그 무례한 놈들을 보고도 참을 생각입니까?”
네가 제일 무례하다니까.
“이것 좀 놔 봐! 장문인! 제가 해결하고 오겠다니까요?”
사건만 더 키우겠지.
연추량은 연신 소리쳐대는 남궁천을 보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어디서 저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나타나서는…… 하아.’
시름이 깊어지는 날이었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침내 표행을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이제는 물러설 곳도 없었기에 연추량은 문도들과 견습생들을 이끌고 장흥표국을 찾아갔다.
장흥표국주 이사흠은 이미 표물들을 수레에 가득 실어 정문 밖에 도열시켜둔 상태.
표두와 표사들이 수레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이미 두 번의 실패 때문에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장문인.”
“준비는 끝마친 것 같구려.”
“예, 이른 새벽부터 준비를 해두었지요. 오시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요.”
“조금 일찍 와서 도와드릴 걸 그랬소.”
“아닙니다. 그저 표물만 잘 지켜주십시오.”
이사흠이 허리까지 숙이며 간곡히 말했다.
연추량이 내심 마음에 찔려 쓴웃음을 지었다.
“꼭 그리하겠소.”
“그런데 저들은…….”
이사흠의 시선이 남궁천을 비롯한 생도들에게 향하자, 연추량이 ‘끄응’ 침음을 흘리고는 대꾸했다.
“맹에서 견습생을 보냈소.”
그러자 남궁천이 걸어와 해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국주님. 이번 표행은 느낌이 좋습니다. 길이 아주 좋아요. 길이.”
“길……?”
“커험! 저 녀석의 말은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소. 애가 약간 좀…… 아무튼 어서 떠납시다.”
“그럼 장문인만 믿겠습니다.”
이사흠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표행 선두에 섰다.
그런데 남궁천이 연추량에게 다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이대로 출발하려고요?”
“왜 또?”
연추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남궁천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흑산채가 노릴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런데?”
“뭔가 최소한의 대비책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대비는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겠지. 넌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라.”
그러는 사이 선두에 선 이사흠이 지시를 내렸고, 표물을 실은 수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이사흠이 고개를 힐끗 돌리고는 견습생들을 보았다.
‘하필이면 견습생들이라니. 정예 무인도 아니고. 저 견습생들이 짐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근심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