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진짜 무례한 놈
“네 이놈! 보자 보자 하니, 이게 무슨 짓이냐!”
도창구가 대경실색해서 소리치자, 남궁천이 귀를 파며 대꾸했다.
“보자 보자 하니 칼 들고 설치길래 강호 예법을 가르쳐 준 거지. 보고도 모르겠어?”
“이런 미친 새끼……!”
“이봐, 이봐. 주인이 되먹질 않으니 기르는 개새끼가 저리 짖어대지. 안 그러냐?”
“저, 저, 저…… 정신 나간 놈을 봤나!”
차아앙!
도창구가 순간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 들었다.
시퍼런 도신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도창구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자초한 짓. 원망은 말거라!”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하아앗!”
도창구가 도를 휘두르며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동시에 남궁천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처맞고 질질 짜지나 마라.”
파바밧!
그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 * *
“그럼 이걸로 회의를 마치겠소. 총관은 빠른 시일 내에 삼봉파를 찾아가서 적당히 기회를 만들어…….”
연추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의장 밖에서 수하의 울부짖음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문주니이이이임!”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수문무사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외쳤다.
“크, 큰, 큰일 났습니다! 문주님!”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것…….”
총관이 얼른 나서서 주의를 주는데, 수문 무사가 또 한 번 말을 가로지르며 소리쳤다.
“바, 밖으로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지, 지금 미친놈…… 아니, 그…… 생도 하나가 완전히 고삐가 풀려서…… 소문주와 호신위를…… 곤죽으로 만들어…… 술에 취해서…….”
“어허! 진정하고 제대로 말을 해보게!”
“헉, 헉! 예, 옛. 그러니까 그 무림맹에서 온 생도가 술에 취한 건지 삼봉파 소문주와 호신위를 두들겨 팼습니다!”
“으응? 누가 누굴 패?”
“생도가 삼봉파 소문주와 호신위를 팼다고요!”
거듭 외치는 수문 무사의 말에 연추량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총관을 보았다.
총관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우선은 밖으로 나가보시지요.”
“그, 그러세.”
연추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뇌인사들이 그 뒤를 줄줄이 따랐다.
걸음을 바삐 옮기면서도 연추량은 수문 무사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생도가 삼봉파 소문주와 호신위를 패?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최 무슨 일인지…….’
삼봉파 소문주는 절정에 이른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를 호위하는 신월이라는 무인도 마찬가지.
한데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생도가 절정 무인 둘을 두들겨 팼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수문 무사가 지나치게 흥분해서 말이 뒤엉킨 것이리라.
‘이게 다 기강이 해이해진 탓이겠지. 나중에 따로 문책을 해야겠어.’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쉰 연추량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열린 정문 사이로 남궁천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째…… 불안한데?’
분타에서도 자신을 향해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녀석이 아닌가? 왠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모종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분이다. 절로 걸음이 바빠졌다.
“무슨 일이냐?”
정문을 나서며 얼른 소리친 연추량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연추량이 두 눈을 금붕어처럼 연신 끔뻑였다. 잔뜩 벌어진 입은 주먹도 들어갈 것 같다.
한쪽 벽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호신위, 그 옆에 눈자위가 푸르딩딩하게 물들어서 퉁퉁 부었고, 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 삼봉파 소문주.
“초, 총관.”
“예? 아, 예.”
“내가 지금 제대로 보는 것 맞소?”
“그,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연추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남궁천을 휙 돌아보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설마 자네가 이런 건가?”
“예. 뭐, 일거리를 얻으러 와서는 너무 예의 없이 굴더라고요.”
“일거리라니?”
“글쎄, 저놈이 의뢰를 떠넘기라고 하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지…….”
“의뢰를 넘겨달라고 했다고?”
“그렇다니까요.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남궁천이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씨근거린다.
연추량이 총관을 다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조졌다!’
도대체 저 철딱서니 없는 생도가 뭘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비월문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연추량이 잠깐 휘청거리다가 얼른 중심을 잡고는 도창구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이, 이보게! 소문주! 정신 차려보게!”
다급한 외침 끝에 남궁천의 목소리가 등에 닿는다.
“걱정 마세요. 푹 재웠으니까.”
뭘 재워! 이 미친놈아!
쌍욕이 바가지로 날아가려는 걸 꾹 참은 연추량이 옆에 쓰러진 호신위도 흔들었다.
“이보게! 일어나 보게! 자네 주인이 쓰러졌어! 어서!”
“깨우기 힘들 텐데.”
“아니, 도대체 자네, 무슨 짓을 한 건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 의뢰를 날로 먹으려고 하길래 예절을 가르쳐줬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장문인께서 회의하시느라 바쁜 것 같아서 제가 대신 나섰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녀석들 의뢰를 낚아챌 생각은 이제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더 문제라고.
연추량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면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 저 어린놈을 죽일 수도 없고.
옆에서 총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장문인, 이제 어쩌지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삼봉파가 의뢰를 맡기는커녕 이 일을 따지고 들 것입니다.”
“그럼 삼봉파 문주에게도 강호 예법을 가르쳐야지요.”
“넌 좀 빠져!”
연추량이 남궁천을 향해 버럭 소리치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끄음. 우선은…….”
그때였다.
“엇, 호신위가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모여서 구경하던 수뇌인사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연추량이 고개를 휙 돌려 보니 호신위 신월이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남궁천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오, 벌써 정신을 차릴 줄이야. 역시 한 방 더 때릴 걸 그랬나?”
넌 좀 가만히 있으라고!
연추량이 얼른 신월에게 다가갔다.
“자네, 괜찮은가? 이번 일은 착오가…….”
“크읍, 착오라고 하셨소?”
“……!”
신월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감히 본 문을 이리 문전박대하고도 귀 문이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보게. 저 아이는…….”
“흥! 무림맹에 협조 요청을 했나 본데, 무인 몇 명 보강했다고 계림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소? 감히 소문주까지 이리 대하다니! 두고 보시오. 본 문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어…….”
빠악!
“헉!”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남궁천이 신월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꽂는 게 아닌가?
휘리리릭, 콰다앙!
추풍낙엽처럼 날아간 신월이 다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자, 연추량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너 도대체…….”
“새끼가 싸가지 없게 장문인께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있어.”
너도 했잖아, 인마!
“걱정 마시죠. 장문인. 삼봉파가 어찌 나오든 저희가 함께 있으니까요.”
그게 제일 불안하다고!
“생각할수록 진짜 무례한 놈일세. 쯧.”
아아, 더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연추량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비틀거리자, 수뇌인사들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장, 장문인!”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저지른 장본인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중얼거렸다.
“거,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시네.”
* * *
콰앙!
거칠게 내려친 주먹에 탁자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 나갔다.
주먹을 콱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떠는 삼봉파 문주, 도지백.
그가 씹어뱉듯이 말을 꺼냈다.
“감히…… 감히……!”
“장문인, 고정하시지요.”
나이가 지긋한 총관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도지백이 잔뜩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고정하게 생겼소? 지금! 애초에 소문주를 보내자고 한 건 총관 아니었소? 한데 이게 지금 무슨 꼴이오?”
“끄음.”
총관이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 역시 사태가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두 번의 거듭된 실패로 고심이 클 비월문일 거라고 여겼다. 해서 소문주만 가더라도 순순히 의뢰를 양도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무림맹에서 온 지원군이라니.
그가 아는 바로는 맹은 이런 변방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는 상당한 뇌물을 제공하지 않는 이상 맹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현재 비월문의 재정 상태가 그만한 뇌물을 제공하긴 어려울 터.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하긴 하지.’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맹에서 온 지원 인력이라는 것이 고작 생도들뿐이다. 소문주와 호신위도 생도에게 당했다고 들었다.
콰직!
다시 거친 소리가 울리면서 탁자가 완전히 부서졌다.
도지백이 어깨까지 들먹이며 씨근거렸다.
“무연회에서 우승한 신룡이라더니. 아주 허명은 아닌 모양이군!”
“아니면 소문주께서 방심을 하셨을 수도…….”
“물론 방심했을 거요!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생도가 반신불수가 됐겠지. 하나 방심했더라도 창구에 이어 신월까지 그리 만든 것은 나름 한 수가 있다는 뜻일 터.”
“…….”
“내 당장 비월문을 찾아가겠소! 그 생도 놈을…….”
“장문인, 지금 중요한 건 그 아이가 아닙니다.”
“그놈이 중요하지 않다니?”
도지백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따지듯 묻자, 늙은 총관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고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뭐요? 나를 말릴 생각이라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
그제야 조금 화를 누그러뜨린 도지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관이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맹이 지원 인력을 보낸 것은 뜻밖이긴 합니다. 하나 그 지원 인력이 결국 견습생들뿐입니다. 사실 지원이라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슨 뜻이오? 비월문을 엿 먹이겠다는 뜻인가?”
총관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구색만 갖추겠다는 의미겠지요.”
“흐음. 그래서?”
“난감한 처지의 비월문을 돕고자 가신 소문주님이 당했습니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비월문에서 일어난 일이니 비월문주에게도 충분히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시고, 정식으로 비무를 청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월문주에게 말이오? 하면 지금 당장 찾아가서 비무를…….”
“아뇨. 비무를 표행 떠나는 날로 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비월문이 표행을 떠나는 날? 왜 그런…….”
말을 꺼내던 도지백이 이내 총관의 음흉한 속내를 눈치채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날이라면 비월문은 비무를 회피하려고 할 테지.”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는 또 하나의 명분을 얻게 됩니다. 정당하게 제안한 비무를 그쪽에서 피했으니…….”
“무력으로 비월문을 제압할 명분.”
“어차피 맹이 보낸 지원 인력이라는 것도 생색내기일 뿐으로 보이니…….”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맹이 굳이 신경 쓰진 않을 것이다?”
“예, 이런 변방의 작은 싸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본 문은 비월문에게 두 번이나 예를 갖춰 다가간 셈이고요. 권주를 마다한 건 비월문입니다.”
그제야 도지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 말이 옳소. 내가 흥분해서 너무 서둘렀군.”
“잠시 화를 누그러뜨리시면, 큰 기회가 올 것입니다. 비월문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고, 장흥표국의 신임까지 가져올 방법이지요.”
“좋은 생각이 있소?”
늙은 총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선 아무런 반응을 하지 마시고, 기다리시지요. 그런 후에…….”
총관의 입에서 향후 계략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