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59화 (159/508)

158. 진짜 무례한 놈

한바탕 격정적인 토론 끝에 찾아온 침묵은 우울한 분위기마저 감돌게 했다.

실제로 비월문 수뇌인사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누구보다 과격하게 주장하던 장로가 이젠 이성을 되찾았는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장문인. 포기해야 합니다.”

“…….”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보다야 깔끔하게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이 낫습니다.”

장로의 말에 당주 한 명이 불쑥 나섰다.

“장로님, 그리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닙니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닐세!”

“하나 우리가 이번 표행을 포기한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삼봉파에게 모든 이권을 내주는 격이 됩니다.”

“그럼 자네 생각은 뭔가? 이대로 표행을 강행해서 표물은 흑산채에 갖다 바치고, 장흥표국과는 의절하고, 본 문은 봉문하길 바라는 건가?”

“장로님!”

“그게 아니면 방법을 말해보란 말일세!”

“…….”

당주가 입을 다물었다.

장로의 말이 옳다.

이대로는 방법이 없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이대로 물러난다고 한들 본 문에 미래가 있겠는가?’

시름 섞인 한숨만 나온다.

지금 비월문은 두 번의 표행 실패로 많은 전력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생도들을 데리고 표행을 강행했다간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생도들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오히려 맹은 본 문을 추궁할지도 모르겠지.’

가만, 설마 무림맹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에이, 지나친 생각이리라.

당주가 곧 고개를 저었다.

하나 마음 한편에서 자꾸만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의심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만약 무림맹이 거기까지 계산해서 일부러 생도들을 보낸 거라면…… 대체 본 문은 무엇을 위해 입맹했단 말인가?

차라리 여러 수뇌부의 말대로 탈맹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는 법이라더니.

마침 지금껏 침묵하던 연추량의 말에 당주도 정신이 돌아왔다.

“장로님의 뜻이 옳은 것 같소. 괜한 고집을 부렸다가 저 생도들까지 다치면 더 골치가 아프겠지.”

“왜 우리가 골치 아픕니까? 저 철딱서니 없는 것들까지 챙겨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각주 한 명이 불쑥 소리쳤다.

하나 많은 수뇌 인사들은 이제 이성이 돌아온 것인지 씁쓸한 표정만 지은 채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그러자 곁에 앉은 총관이 넌지시 물었다.

“장문인, 이대로 표행을 취소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위약금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앞서 두 번의 실패도 눈감아준 장흥표국에 위약금도 물지 않고 모든 일을 없던 걸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옳은 소리다.

만약 그랬다간 오히려 비월문의 평판은 최악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봉문을 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연추량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계약을 파기하자는 게 아닐세. 양도하자는 걸세.”

“양도라니요? 계림에서 장흥표국을 호위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삼봉파밖엔 없을 텐데 대체 누구에게 양도…… 설마……?”

총관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연추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봉파라면 충분히 표물을 지킬 능력이 되겠지. 그 흑산채로부터.”

“장문인! 재고해주십시오!”

“재고해주십시오!”

총관뿐만 아니라 다른 수뇌인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 조금 전 의견을 냈던 장로는 수염만 쓸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뜸을 들이다가 좀 더 현실적인 의문을 던졌다.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닙니다. 자존심은 상할 일이지만, 본 문의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고, 장흥표국과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될 테니까요. 다만 삼봉파가 순조롭게 양도받을지 모를 일이겠습니다.”

“장로님! 정말 양도하자는 말씀입니까?”

아까부터 대립각을 세웠던 당주가 날카롭게 따지자, 장로가 냉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라도 풀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네만.”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가? 우리 쪽에서 버거우니 그쪽이 맡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문파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더한 자존심도 내다 팔 수 있어야 하네! 그 또한 용기야!”

“…….”

당주가 입술을 꾹 씹고만 있자, 연추량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로님 말씀이 맞소. 한데 나 또한 삼봉파에서 군말 없이 이번 의뢰를 양도받을지 모르겠소.”

“차라리 저번처럼 삼봉파가 먼저 의뢰를 떠넘기라고 다가온다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이오.”

연추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장흥표국으로부터 두 번째 의뢰를 받았을 때, 삼봉파는 비월문을 찾아와 의뢰를 떠넘기라고 강요했었다.

어차피 흑산채를 막아내지 못할 게 뻔하니 자신들이 맡는 게 안전하다면서.

하나 그땐 고집을 부렸다.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흑산채를 막고자 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이번만큼은 지난 과오를 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오히려 이쪽에서 삼봉파를 찾아가 의뢰를 대신 맡아달라고 사정해야 할 입장이라니.

“허참…….”

허탈한 한숨만 자꾸 새어 나오는데, 총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뜻이 그러시다면 제가 삼봉파 쪽 분위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우리도 우리지만, 그 생도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지 않겠소?”

연추량의 힘없는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푹 숙였다.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가능한 지난번처럼 삼봉파가 먼저 다가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수고해주시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축 처진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이어졌다.

* * *

“후아아. 배부르다. 간만에 실컷 먹었네.”

남궁천이 산처럼 부어오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비월문 정문을 나섰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해질녘의 공기가 상쾌하게만 느껴진다.

“이상하게 장거리 여행만 하면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니까. 과식했어, 과식.”

남궁천이 기분 좋게 배를 쓰다듬으면서 먼발치를 보는데, 마침 두 명의 장정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남궁천이 무심히 뱉은 말에 문지기 하나가 힐끔 돌아보더니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 삼봉……!”

이내 그가 안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가더니 다른 문지기를 데리고 나와서 각을 잡고 섰다.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먼발치의 두 명을 보았다.

‘삼봉? 삼봉파 놈들인가?’

남궁천의 짐작대로 먼발치에서 걸어오는 자들은 바로 삼봉파의 소문주와 호신위였다.

비월문이 무림맹에 협조 공문을 보낸 것은 대외비였기에 그들은 현재 비월문에 손님이 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얼마 전 장흥표국이 비월문에 표행 의뢰를 맡겼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들이 비월문을 찾아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코 옆에 콩알만 한 점이 찍힌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가 바로 삼봉파 소문주 도창구였고, 그 곁에 마르고 키가 큰 사내가 호신위 신월이었다.

신월이 허리를 슬쩍 숙이고는 말했다.

“굳이 소문주님이 직접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

“그런데 왜…….”

“진정성 때문이지.”

도창구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가서 본 파가 의뢰를 대신 수행해주겠다고 해야 진정성이 느껴질 테니까. 원래 어리석은 인간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정성을 찾아 헤매거든.”

“이해할 수가 없군요. 비월문은 어차피 다 쓰러져 가는 문파인데 장흥표국은 왜 끝까지 그곳과 거래를 하는 건지, 또 비월문은 능력도 안 되면서 왜 끝까지 의뢰를 맡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지.”

“원래 한심한 인간들이 ‘의리’, ‘자존심’ 이런 보이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법이야. 하나 내가 아는 바로는 비월문주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진 않아. 아마 오늘만큼은 본 파가 내미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을 거다. 얼씨구나 하고 의뢰를 양도하겠지.”

“그 정도면 차라리 대가를 더 요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의뢰를 맡아줄 테니 대가를 내라는 식으로.”

도창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처음부터 너무 가혹하게 몰아갈 필요는 없어. 서서히 차근차근 무너뜨리면 된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신월의 대꾸에 도창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런데 비월문 정문에 서서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사내가 보였다.

“저건 누구지?”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까?

짝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튼 사내는 바로 남궁천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째 자세가 점점 거만해졌다.

이윽고 도창구와 신월이 정문에 다다랐을 때는 남궁천의 턱이 거의 하늘을 가리킬 정도로 치켜든 모습이었다.

‘저러다 목 꺾이겠는데?’

남궁천을 무시한 도창구가 문지기를 향해 말했다.

“비월문주를 만나려고 왔다.”

“무슨 용무이신지요?”

문지기가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표정에서부터 모종의 적의가 느껴진다.

하나 도창구는 내색하지 않은 채 빙그레 웃었다.

“좋은 제안을 하러 왔다. 들어가서 너희 장문인께 알려라. 삼봉파가 표물을 대신 맡아주겠다고.”

흠칫거린 문지기들이 서로를 보았다.

도창구가 내심 웃었다.

‘아마 지금쯤 눈알 빠지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지난번 실패로 자신들의 역량을 깨달았을 테니.’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니, 일거리 받으러 온 주제에 뭐가 이렇게 당당해?”

“뭐……?”

도창구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돌아섰다.

남궁천이 여전히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그렇잖아. 일거리 구걸하러 왔으면서 태도가 너무 건방지잖아?”

“구걸……? 너는 누구냐?”

“그러는 너는 누군데?”

남궁천이 따지듯이 되묻자, 신월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무례하다! 소문주께 예를 갖춰라!”

“아, 삼봉파 소문주였나?”

신월이 다시 발끈해서 나서려고 하자 도창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래, 내가 삼봉파 소문주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나는 무림맹에서 온 지원군이다.”

“무림맹……?”

“그래.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셔.”

“뭐……?”

“아 글쎄, 일거리 나눠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썩 물러가라고.”

갑자기 일어난 일에 문지기들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쯤 되자 신월도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노오옴! 무례하구나!”

“거, 아까부터 꽥꽥 질러대는 소리가 더 무례한 것 같은데.”

“뭐, 뭐라? 이런 미친놈!”

“이봐, 이봐. 이젠 욕까지 하네. 잘 따져보자고. 애초에 무례하게 나온 게 어느 쪽인지 말이야.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거든.”

뭐, 이런 미친놈이……?

급기야 신월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에게 조금 겁을 줄 생각이었다.

스르르릉.

“강호 예법을 배워야겠구나.”

신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데 남궁천의 반응이 이번에도 예상 밖이다.

“이봐, 이봐. 칼도 먼저 뽑았어. 다들 봤지? 이렇게 무례하…….”

“닥쳐라앗!”

쉬이이익!

찰나지간 신월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남궁천의 보법이 귀신처럼 움직였다.

파바밧!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궁천의 주먹에 얻어맞은 신월이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콰다앙!

종이처럼 구겨진 신월이 담벼락 아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지자, 문지기들이 입을 딱 벌렸다.

남궁천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진짜 무례한 인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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