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진짜 무례한 놈
남궁천이 외치는 소리에 분타주와 연추량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그렇지. 잘못 찾아온 거겠지. 어서 나가라. 지금 여긴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 중이니까.
한데 남궁천이 나가지 않자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른 아이 하나가 또 들어왔다.
바로 윤종승이었다.
어딘지 주눅 들어 보이는 윤종승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척 벌렸다.
“진짜 개많다.”
아니, 이것들이 아까부터 자꾸…….
연추량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데 그 뒤로 계속 생도들이 등장했다.
진소홍에 이어 팽수혁과 운경, 백무극과 모용강 등.
마지막으로 비량이 들어서면서 말했다.
“잘못 찾은 게 아니다. 여긴 분명 계림분타…… 응? 그런데 정말 사람이 많네. 무슨 행사 중인가?”
비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추량과 분타주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분명 저자가 계림분타라고 하지 않았나? 하면 잘못 찾아온 게 아니란 말인데…….
보다 못한 연추량이 비량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안녕하시오. 혹시 어떻게 오신 건지…….”
“아, 안녕하세요. 무림맹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저는 견습생들을 담당하는 교관, 비량이라고 합니다.”
비량이 예의 그 해맑은 웃음을 생긋 지었다.
“견습…… 생?”
“예, 견습생도들입니다. 올해 무연회에서 팔 강까지 오른 우수한 생도들이지요.”
“인사 올립니다.”
견습생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연추량이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아, 난 또. 그렇군요. 견습생들이었군요. 어쩐지 나이가 아직 어려 보인다 싶었소. 나는 비월문주 연추량이라고 하오.”
“아, 비월문주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계림분타주 적문입니다.”
“예, 분타주님 반갑습니다.”
“…….”
“…….”
어색한 침묵.
결국 연추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예는 언제 도착합니까?”
“예?”
“아, 맹에서 정식 파견된 지원군 말입니다. 교관께서 생도들을 이끌고 먼 길을 오셨는데, 바로 본론부터 꺼내 죄송합니다. 이쪽 사정이 나름 급한지라.”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가 맹에서 파견된 지원 인력입니다.”
“예……?”
연추량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비량이 그런 연추량을 보며 여전히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다.
“…….”
“…….”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연추량이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비량 교관께서는 아주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정말이지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뭘 속으신다는 건지…….”
“에이, 그 정도면 됐습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연추량의 말에 도열해 있던 무인들도 툴툴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비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들이 지원 인력 맞습니다만.”
“허허, 그럴 리가요.”
연추량의 입매가 살짝 떨렸다.
어째 슬슬 불안해진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량이 미소로 답한다.
“정말입니다.”
“…….”
“…….”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지원인력을 보내긴 했는데…… 견습생들만 보냈다는 거요?”
“예. 저도 같이 왔지요.”
“…….”
이제 연추량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다.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뻣뻣하게 돌아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분타주 적문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문이 이마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어어…… 이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런 적문에게 연추량이 다가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분타주. 지금 날 농락하는 거요?”
“장문인.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생긴…….”
그러자 이번엔 비량이 다시 나섰다.
“으음. 여기가 계림분타 아닌가요? 계림분타로 가서 비월문을 돕는 게 저희들에게 떨어진 임무입니다만.”
아아, 저 눈치 없는 사람!
적문이 안절부절못하며 연추량의 눈치를 살폈다.
연추량은 이제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 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분타주, 이만 돌아가겠소!”
“자, 잠시만요! 장문인,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당연히 문제지! 지금 분타주께서도 듣지 않으셨소! 견습생뿐이라잖소! 무림맹이 본 문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는 거요! 해마다 꼬박꼬박 회비를 내면서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소! 차라리 보내질 말든지! 생도를 보내다니! 이건 본 문을 농락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그, 그럴 리가요. 농락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맹에서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하면 이 사태를 어찌 설명하시겠소? 분타주! 맹에 서신을 제대로 보내긴 한 거요?”
“물론이지요. 분명 현 상황을 상세히 적어서 보냈습니다. 삼봉파와 흑산채 이야기까지요.”
“한데 이게 대체 뭔 일이오? 내가 지금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을 데리고 다녀야겠소?”
“끄음…….”
적문이 침음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역시 작금의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호법당에서 지원군을 파견했다기에 당연히 청랑단 일부나 철혈대가 올 줄 알았다.
한데…… 견습생뿐이라니?
맹과 비월문의 중개자 역할을 해온 적문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때 생도 중 한 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거참, 손님 접대 희한하게 하시네. 먼 길 왔는데 먹을 거라도 좀 내어주시지.”
그는 다름 아닌 남궁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꿎은 생도들에게 괜히 부아가 치미는 중이었는데, 남궁천이 눈치 없게 행동하니 연추량의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분타주! 방금 들으셨소? 내가 저리 철없는 것들 데리고 다녀야겠소? 지금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하시겠소? 표행이 며칠 남지도 않은 이 시국에!”
“아니, 배고파서 먹을 것 좀 달라는 게 철든 거랑 무슨 상관이람?”
남궁천이 다시 중얼거리자, 적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 눈치 없는 놈아! 넌 제발 입 좀 다물어!
하지만 남궁천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연추량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이 비월문주라면서요? 이제 비월문으로 가야 하지 않아요? 빨리빨리 이동합시다. 배고파요. 고기 좀 삶아놓으셨나?”
“…….”
연추량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지금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가?
물론 남궁천은 이들의 반응을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더 삐딱하게 반응한 것이다.
어딜 가나 불청객 취급은 전생의 경험으로도 족하다고 여겼거늘.
여기서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먼 길을 여행한 피곤함과 허기에 더해 짜증도 치민 것이다.
그러나 연추량은 그런 사정 따위는 상관없었다.
연추량이 분타주를 돌아보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무림맹은 계림이 변방이라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소. 아니, 이건 손을 놓는 것만도 못하지. 생도 몇 녀석 보내놓고 생색이나 내는 것 아니겠소? 하등 쓸모없는 생도들을 보내 놓고 말이오!”
“거참, 진짜 너무하시네. 우리가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아시고.”
넌 제발 입 좀 다물엇!
적문이 남궁천을 향해 눈을 한 차례 부라리고는 연추량을 달랬다.
“자자, 장문인 그러지 마시고 일단 침착하시지요. 맹에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도들이 뭘 알겠습니까? 아마 본 대가 따로 올 겁니다.”
“아니, 아니. 절대 안 와요. 우리밖에 없어요. 괜한 기대를 가지게 하면 실망만 더 크실 텐데?”
하아, 저놈을 진짜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적문의 속이 바글바글 끓었다.
하나 남궁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맹은 계림 지역의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우순 순위에서도 한참 뒷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도들이라도 온 건 모두 남궁천이 손을 썼기 때문 아니던가?
연추량이 휙 돌아섰다.
“됐소! 분타주, 정말 실망스럽소!”
“어허, 그러지 마시고 좀 참아주십시오. 제 얼굴을 봐서라도. 제가 다시 맹에 연락해보겠습니다.”
“늦었단 말이오! 이제 새로 파견을 보낸다고 한들 늦었다고! 잊으셨소? 벌써 장흥표국주가 최후 의뢰를 맡겼다는 걸! 이번에 실패하면 비월문도 끝이오!”
“그럼 일단 저 아이들을 믿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교관님도 함께 오셨으니까요. 무연회에서 팔 강에 든 아이들이니 그래도 꽤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급한 불은 꺼야지요.”
“급한 불을 물로 꺼야지, 기름으로 끄는 법이 있소이까? 이건 불씨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오!”
그러자 또 남궁천이 짝다리를 짚고 귀를 파며 불쑥 끼어들었다.
“글쎄, 물이 될지 기름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백날 말해봐야 해결도 안 되는데, 밥 좀 먹으러 갑시다. 배고프다고요.”
넌 그 입 좀 닥쳐! 제발!
적문이 손을 맞비비며 다시 다가섰다.
“장문인…… 우선 노여움을 푸시고…….”
“젠장! 오늘은 더 들을 게 없을 것 같소! 가자!”
잔뜩 화가 난 연추량이 몸을 홱 돌리고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비월문 무인들이 축 늘어진 어깨로 따라나섰다.
* * *
비월문으로 돌아온 연추량은 곧장 수뇌부를 불러 비상 회의를 열었다.
콰앙!
허연 수염이 성성한 장로가 주먹으로 긴 탁자를 내려치고는 성토했다.
“생도라니! 허! 생도라니요! 장문인, 이건 맹에서 본 문을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참에 무림맹을 탈퇴해버립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거야말로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림맹이 본 문을 위해 뭘 해줬단 말입니까? 어려울 때 도움이 있어야 입맹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알면 삼봉파가 본 문을 더욱 우습게 여길 겁니다! 맹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탈퇴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게요. 차라리 보내질 말든가!”
당주와 각주들이 연이어 성토한다.
회의장은 곧 시끌벅적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껏 부푼 기대가 순식간에 꺼져 버렸으니 그 허탈감이 오죽하랴.
연추량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의 말대로 당장 탈맹 선언을 하고 싶지만, 무조건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수도 없는 노릇.
분노의 끝자락에는 방향 잃은 허탈감만 남아 있었다.
연추량이 축 처진 음성으로 지객당주에게 물었다.
“생도들은 어쩌고 있소?”
“잔뜩 들떠서 술과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술과 고기라…….”
속이 쓰리다.
그 술과 고기도 사실 청랑단이나 철혈대가 올 줄 알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한데 하등 도움도 안 될 철없는 생도들의 배 속에 들어가게 되다니.
아아, 정말이지 속이 너무 쓰리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다 빼앗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객당에서는 왁자지껄한 만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처럼의 진수성찬인지라 생도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술과 고기를 음미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빠른 속도로 배를 채워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찹찹…… 찹! 찹찹……!”
밥을 먹는 것조차 무공 한 수를 보는 것만 같은 건 왜일까?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서는 남궁천이 탁자 옆에 빈 그릇을 탑처럼 쌓아두고 접시에 코를 박은 채 걸신들린 듯 먹고 있었다.
장거리를 여행하고 나니 전생의 버릇대로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자는 본능이 발현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 남궁천이 닭다리 하나를 든 채 소리쳤다.
“여기 고기 한 접시…… 아니, 세 접시 더 주쇼! 술도 한 병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