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검정 귀신
“주군, 조심하십쇼.”
흑선의 당부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잠입, 도주, 염탐은 이제 도가 텄으니까.”
“몇 번이나 해보셨다고…….”
무심코 말을 꺼내던 흑선은 남궁천이 눈알을 부리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장부를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며 물었다.
“약은 어찌할까요?”
“혹시 무한에서 이상한 약을 제일 잘 만드는 녀석이 있나?”
“맹독을 유통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온갖 약을 제조하는 자가 한 명 있긴 합니다.”
“그것도 괜찮겠네.”
남궁천이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이자, 흑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뭘?”
“갑자기 계림은 왜 물어보시는 건지…….”
“알고 싶어? 궁금한 게 많네? 우리 흑선 회주.”
남궁천이 어딘지 살벌하게 웃어 보이자, 흑선이 얼른 자세를 고치고는 씨익 웃었다.
“아닙니다. 강호에서 호기심은 늘 죽음과 가까운 법이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 말을 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진 않고?”
남궁천이 주변 책장에 가득 꽂힌 장부들을 힐끔거렸다.
확실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다.
흑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는 건 힘이지요.”
* * *
임가장 수문 무사 손지백은 오늘도 어김없이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순찰하고 있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그가 옆에서 나란히 걷는 젊은 무사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교대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아직 한 시진 남았습니다, 형님.”
젊은 무사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손지백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아직도 한 시진이나 남은 거야?”
“형님이 반각도 지나기 전에 열 번은 물어보시니까요.”
“내가 그렇게 자주 물어봤나?”
“예, 형님. 정확히 열두 번 물어보셨죠.”
“제길,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군.”
“뭐, 급한 용무라도 있으세요?”
“급한 용무는 무슨.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서 그렇지. 지겹다, 지겨워.”
젊은 무사가 툴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이만한 일자리도 없잖아요. 나름 고액 봉급에 몸 다칠 일도 없고. 이만하면 꿀 빠는 일자리 아닙니까?”
“새끼가 너는 인마, 젊은 놈이 야망이 너무 없어. 나 때는 인마, 어떻게든 출세해서 무림맹에 들어가고 권력 한 번 잡으려고 기를 썼는데.”
“그렇게 기를 써서 지금 여기 계시잖아요.”
손지백이 우뚝 멈추더니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너 지금 나 물 먹이냐?”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그냥 저는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을 뿐입니다요. 가늘고 길게 가자는 게 제 신조죠. 헤헤.”
“으이구, 답답한 청춘아. 그나저나 어째 배가 살살 아프네.”
“괜찮으세요? 약 좀 드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게. 저녁에 먹은 생선 구이가 탈이 났나?”
“저 빼고 혼자 드셔서 탈났나 봐요. 그래도 장 하나는 튼튼하시던 분이 어쩐 일이래요?”
“너도 나이 먹어봐라. 어딘가 하나씩 고장나게 마련이다. 윽……!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먼저 가 있어라. 난 측간에 들렀다가 갈 테니.”
“예, 형님. 너무 오래 걸리지 마세요.”
“장담은 못하겠다.”
손지백이 배를 움켜쥐고는 얼른 달렸다.
모퉁이를 지나 측간으로 향하던 손지백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전각 사이로 들어서자 걸음을 멈췄다.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기척은 없고…….’
기감을 펼쳐 주변을 확인한 손지백이 발길을 돌려 측간을 그대로 지나치더니 부엌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에서 문을 닫은 그가 어둠 속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오실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시지?’
불명회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
주군이 등하로를 통해 임가장에 잠입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하라는.
때마침 밖에서 누군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기척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니, 시종 둘이 잡담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돌아서는데,
“허으으어억!”
화들짝 놀란 손지백이 그대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어어어…….”
시커먼 아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곧이어 그 손이 바닥을 짚더니 잿더미에 덮인 존재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와씨, 하마터면 지릴 뻔했네. 이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마침내 아궁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상대는 잿더미에 전신이 시커멓게 물들어 그야말로 걸신(乞神) 같은 모습이었다.
그 걸신은 다름 아닌 남궁천이었다.
남궁천이 옷을 털며 연신 투덜거렸다.
“퉤, 퉤! 아오, 씨! 왜 하필 이딴 곳을 출구로 만들어놓은 거야! 먹은 잿가루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네! 젠장!”
“주, 주군……?”
움찔거린 남궁천이 손지백을 보고는 암어를 던졌다.
“마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예? 뭐가 뭘 건너요?”
“너 이 새끼, 불명회 아니었어?”
남궁천이 살기를 끌어 올리자, 손지백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마, 맞습니다! 저 손지백입니다. 불명회원 임가장 담당입니다!”
“근데 왜 ‘임가장에 별빛이 쏟아지네’라고 안 해, 인마.”
“아…… 그거…… 굳이 필요가 없어서 안 쓴 지 꽤 됐습니다요.”
“안 써? 왜?”
“보통 사람은 아궁이에서 기어 나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
회주, 이 새끼. 두고 보자.
남궁천이 씨근거리다가 잿가루를 한 차례 더 털어내고는 물었다.
“임태풍 처소가 어디냐?”
“곧장 나가셔서 직진 후 좌측의 큰 건물이 가주가 머무는 방입니다.”
“알았다, 수고.”
“아, 그대로 가실……!”
하지만 손지백은 말을 마저 이을 수 없었다.
이미 남궁천의 신형이 사라지고 없었기에.
그가 텅 빈 부엌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임가장에 별빛이 쏟아지네…… 할 걸 그랬나? 쩝.”
* * *
호민각주 임태풍은 자신의 방에서 모처럼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천지에 금은보화가 널려 있었고, 나신의 여인들이 임태풍에게 엉겨 붙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좋구나, 아주 좋아.’
그런데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여인 하나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게 아닌가?
곧 여인의 외모가 점점 변하더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자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놈, 대살성!’
어느새 진천랑의 얼굴을 한 상대가 단검을 혀로 핥더니 발목에 단검을 들이댔다.
“내게 살기를 드러내고도 사지육신 멀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아, 안 돼!’
하나 대살성 진천랑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임태풍의 발목을 단검으로 그어 버렸다.
서걱!
“흐읍!”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뜬 임태풍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어둑한 천장을 보았다.
‘꿈…… 인가?’
조금씩 가슴이 진정되자 질 나쁜 악몽을 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한쪽 발목을 잃고 나서 한동안 지독하게 시달렸던 악몽.
늘 가장 좋은 순간 발목이 잘려 나가는 절망이란.
‘제길…….’
기분 나쁜 감정과 안도가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눈을 감으려던 임태풍은 순간 움찔 거리고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누구지……?’
방 안에 누군가 있다!
워낙 희미한 기척이었기에 자칫 느끼지 못할 뻔했다.
어쩌면 지금 꾼 악몽은 바로 이질적인 이 기척 때문인지도.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임태풍이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고인은 지랄. 일어나, 이 새끼야. 손님 온 줄 알았으면 누워서 주둥이만 나불거리지 말고.”
거침없는 말투에 임태풍이 흠칫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최대한 기감을 펼쳐 보았다.
‘호신위가…….’
호신위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침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더듬대지 마라. 애들 셋은 잘 재워뒀으니까.”
“……!”
애들 셋이라 함은 가주전을 지키는 호신위 세 명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어찌 이럴 수가…….’
가장은 수문 무사들이 겹겹이 경계를 서고 있을 테고, 호신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정고수이건만.
밖이 조용한 걸 보면 저 불청객이 자신의 침소를 찾아온 것조차 모른단 소리가 아닌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호위를 셋씩이나 두다니. 돈 많이 벌었구나. 아니면 다리를 절어서 더 조심스러워진 건가?”
“……!”
목소리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긴 여길 들어올 정도면 자신이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왔을 테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깨기 전에 뭔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었나 봐? 실실 쪼개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던데.”
목소리가 격장지계를 펼쳤지만 임태풍은 넘어가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용무가 뭐요?”
“일단 이리 와. 얼굴은 보고 얘기해야지.”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자신을 죽일 생각인가?
다시 한 번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임태풍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침상 곁에 세워둔 검을 잡기 위해서였다.
하나 목소리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남은 다리 하나마저 아작 나고 싶지 않으면.”
“끄음.”
결국 검을 포기하고 절뚝거리며 일어난 임태풍이 천천히 걸어갔다.
마침 목소리도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창가에서 스며든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으헉!”
순간 깜짝 놀란 임태풍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온통 시커먼 숯검정이 아닌가?
거기에 하얀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흡사 귀신이 코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검정 귀신의 정체는 바로 남궁천.
놀란 임태풍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순간, 남궁천이 바람처럼 달려오더니 손목을 잡아당겼다.
“헉!”
반사적으로 끌려 나온 임태풍은 뭔가가 입에 쑥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뭔……?’
하나 그가 생각을 더 이어갈 겨를도 없이 남궁천이 손바닥으로 임태풍의 턱을 탁 쳐올렸다.
졸지에 정체도 모를 무언가를 꿀꺽 삼켜 버린 임태풍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방, 방금…… 내게 뭘 먹인 거요!”
“별건 아니고. 몸에 안 좋은 약이랄까?”
“이런 비열한! 컥, 콜록!”
임태풍이 얼른 약을 토해내려고 기침을 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그래도 한 달간은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마.”
“한, 한 달이라니……?”
“한 달 뒤에 다시 찾아와서 해독제를 주도록 하지.”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당신 누구요?”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고.”
“원하는 게 뭐요?”
임태풍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최근 계림분타에서 지원 요청이 있었을 텐데.”
“계림분타?”
임태풍이 기억을 더듬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비월문의 요청 말이오? 혹시 비월문에서 오셨소?”
“궁금한 게 많네.”
“……!”
“더 묻지는 말고. 계림분타로 견습생들을 파견시키도록.”
“견습생들을?”
임태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비월문을 용의선상에서 지웠다.
만약 비월문이라면 고작 생도들을 보내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시킨 대로만 하면 한 달 후에는 살 수 있을 거야.”
어둠 속에서 남궁천의 새하얀 이가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