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잠깐 멈칫거렸더니 옆구리에 닿은 싸늘한 감촉이 살을 파고든다.
“안 들려? 걸어라.”
“어디로?”
“가던 대로 걸어.”
털보가 나직이 으르렁거린다.
남궁천의 태도가 뜻밖에도 태연하자 약간 황당한 모양이다.
남궁천이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 걷지.”
“알 것 없고. 그냥 걸으라고 새끼야.”
“걷고 있잖아, 새끼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냐?”
“상황 파악해서 걷고 있잖아.”
“이런 미친…….”
“그리고 새끼, 새끼 하지 마, 이 새끼야. 내가 네 새끼냐? 네가 우리 아빠야?”
눈알을 부라리며 따져대자 털보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다.
뭐, 이런 반응은 전생 때부터 자주 봤던지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생각해 보니 좀 억울했는지, 털보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말한다.
“그러는 넌 왜 새끼, 새끼 하냐?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미안하다, 썩을 놈아.”
“이 새끼…… 너 정체가 뭐야?”
털보가 욱해서 따지는 순간, 남궁천이 휙 돌아서더니 그대로 따귀를 올려붙였다.
짜아악!
대화 중에 주의가 흐트러지다니. 기본도 안 된 놈 같으니라고.
어찌나 세게 뺨을 올려붙였는지 털보의 얼굴이 휙 돌아가면서 앞니가 부러져 튀어나갔다.
“새끼라고 하지 말라니까. 새끼야.”
털보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이 개색……!”
찰나, 남궁천은 털보의 단전에서 일어난 공력이 혈로를 따라 단검을 쥔 손으로 뻗는 걸 보았다.
남궁천이 곧바로 손을 뻗어 금나술을 펼쳤다.
파바밧, 퍽!
곡지혈을 찍힌 털보가 팔이 툭 꺾이는 것과 동시에 단검을 놓쳤다. 떨어지는 단검을 낚아챈 남궁천이 눈 깜빡할 사이에 털보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푹!
“컥, 커억!”
졸지에 목이 꿰뚫린 털보가 피를 뿜으며 무릎을 꿇자,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기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복작거리던 홍등가 거리가 삽시간에 깨끗해졌다.
대신 거리에는 앞서 걷던 보부상과 여인 둘, 그리고 꼬마 하나가 남았다.
이제 보니 꼬마는 꼬마가 아니었다. 그저 체격이 작을 뿐 대략 사십 대의 나이로 보인다.
“노옴!”
여인 중 하나가 재빨리 일장을 날려왔다. 남궁천이 얼른 털보의 목에서 단검을 뽑아내고는 수직으로 그어 올렸다.
츄아아아악!
빛줄기와 함께 핏물이 뿌려진다. 동시에 잘려 나간 여인의 팔이 밤의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아아악!”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보부상에게 다가가 노리개를 구경하던 여인들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여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갈등하는 모양새다.
팔을 잃은 여인이 절망에 찬 표정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려댄다.
보부상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남궁천의 얼굴에는 두 번의 칼질로 튄 핏물로 범벅이었다.
일부러 피가 튀는 걸 피하지 않았다.
이러는 쪽이 훨씬 잔인하고 무서워 보일 테니까.
또 전생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늘 도망만 다니던 시절에는 고요함이 오히려 불안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이렇게 뭔가 벌어지고 살육전이 펼쳐지면 생사 경계에 서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오히려 생동함을 느꼈다.
남궁천이 단검을 던졌다 받길 반복하면서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회는 많지 않아. 나한테 칼을 들이민 놈들은 웬만해선 용서하지 않지. 자, 먼저 부는 놈부터 살려주마.”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
보부상이 입을 여는 순간, 남궁천이 휙 돌아서면서 단검을 쏘아 보냈다.
쒸에에엑, 푸욱!
순식간에 날아간 단검이 보부상의 눈알을 뚫고 뇌까지 틀어박혔다.
쿠웅!
그대로 목석처럼 넘어간 보부상은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기회가 많지 않다고 했을 텐데.”
남궁천이 다시 입을 열자, 이젠 여인 하나와 아이처럼 작은 사내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눈치만 살핀다.
다음 순간 여인과 아이가 동시에 무릎을 꿇더니 소리쳤다.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 살려만 주세요!”
찰나, 남궁천이 바람처럼 달려가더니 일검에 여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슈칵!
“커억!”
목이 반쯤 찢어진 여인이 울컥거리는 피를 머금은 채 그대로 넘어갔다.
남궁천이 여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살려달라던 여인은 살기를 철저히 배제한 채 공력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아마 남궁천이 다가오면 일격필살의 기세로 공격했으리라.
초견파공안이 아니었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을 상황.
한편 남궁천이 귀신처럼 대응하자, 체구가 작은 사내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남궁천이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읊어봐.”
* * *
“이름 박춘삼. 무한의 무릉객잔에서 점소이로 일하고 있다. 나이는 스물둘. 몸통까지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연결 고리 찾을 수 있겠어?”
남궁천의 말에 나란히 장원을 거닐던 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무림맹 쪽 사람과 연이 있는 자군요.”
“오, 말하자마자 딱 나오네.”
“이래봬도 불명회주입니다.”
흑선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는 대꾸한다.
그러면서도 흑선은 사실 남궁천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점조직의 배후를 밝혀내겠다며 나선 것이 바로 어제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연결점을 찾아왔다.
운몽현에서 나름의 소동이 있었던 것 같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인피면구를 쓴 데다 상대는 철저하게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만큼 남궁천의 정체를 밝히기보단 오히려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일 테니까.
즉, 남궁천은 점조직의 그런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
이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과감함인데, 한낱 생도에 지나지 않는 자가 이렇게까지 해낸 거다.
‘놀랍군. 하긴 애초에 주군의 정체를 처음 눈치챘을 땐 더 놀랐지만.’
알면 알수록 놀라운 남자. 그게 바로 주군이다.
“그렇게 징그러운 눈으로 보지만 말고 말을 해. 연결점이 어디야?”
“아, 예. 호법당(護法堂)의 호민각주(護民閣主)가 부리는 정보원입니다.”
“호민각주? 지금 호민각주는 누구지?”
“한때 철협구검(鐵俠究劍)으로 불리던 임태풍입니다.”
“임태풍이라…… 이름 한번 거창하네. 가만, 그 녀석인가?”
머릿속에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간다.
“아십니까?”
“뭐, 대충.”
“그렇군요. 과거에는 호법당 청랑단원으로 활동했다가 다리 부상을 입은 후로 사무직으로 전환해서 호민각주가 되었지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임태풍의 한쪽 발목을 못 쓰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기억하는 바로는 그놈도 무공이 나쁘진 않았는데. 당시에는 대주였는데, 지금은 각주로군.’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역시나 색광의 배후는 무림맹과 연결되는 것인가?
맹주, 그 비열한 영감이라면 충분히 이런 방식으로 남궁세가를 몰락의 길로 빠트릴 수 있는 작자다.
‘어쨌든 이 기회에 호민각주를 이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호민각은 호법당에 속한 기관으로 중원 각지의 치안 상태를 보고 받고 적절하게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호민각이 파악한 상황에 따라 청랑단을 파견하거나 철혈대를 파견하기도 하는 곳.
생각을 마친 남궁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임태풍은 어디에 있어?”
“당연히 호민각에서 일을 합니다. 저녁에 퇴근하면 임가장에 머물고요.”
남궁천이 걸음을 멈췄다.
“우선 두 가지 정보가 필요해.”
“무림맹과 관련된 정보라면 말씀만 하십시오.”
“먼저 무림맹 계림(桂林) 분타에서 현재 골칫거리가 있다면 무엇인지 알아야겠어.”
계림분타는 무한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다.
남궁천이 계림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마단곡의 위치가 그 근처였기 때문.
뜻밖의 지명이 거론되자 흑선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대답했다.
“문제없습니다. 또 필요한 정보는 무엇입니까?”
“호민각주에 대한 정보. 하루에 방귀를 몇 번이나 뀌는지 다 알 수 있을 만큼 자세히. 가능해?”
“물론입니다. 여긴 불명회입니다. 언제까지 준비할까요?”
“지금 당장. 오늘 저녁에 임태풍 집으로 잠입할 생각이니까.”
흑선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저녁에요?”
“왜? 어려울까?”
“예, 잠입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무림맹 요직의 인물이라 장원에서도 겹겹이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수문 무사들 무공 수준도 그리 만만치 않고요.”
“그럼 들키지 않고 들어가기는 어렵겠네.”
“사실 가능하긴 합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갈 방법이 있긴 하죠.”
“뭔데?”
흑선이 빙그레 웃는다.
“잊으셨습니까? 본 회가 불명회라는 사실을. 등하로가 있지 않습니까?”
“아……!”
“임가장 안으로 연결된 등하로가 있습니다.”
호오, 이러면 땅굴 그만 파라고 한 말은 취소다.
남궁천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 밤에 잠입하도록 하지.”
“예, 내부 접선자에게도 언질을 두겠습니다.”
“오, 접선자까지. 암어 같은 것 교환하고 뭐 그래야 하나?”
이 역시 해보고 싶었던 거다.
잠깐 멈칫거린 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정도는 하지요.”
“과연 불명회가 곳곳에 사람을 많이 심어놨군.”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또 하나. 혹시 괜찮은 약 좀 구할 수 있을까?”
“괜찮은 약이라면…… 혹시 독 말씀이신지요?”
“응.”
“독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유통하기가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서요.”
“왜?”
“여긴 무한이니까요. 무림맹이 버티고 있는 무한.”
“그럼 이건 고민을 좀 해보고 다시 지시하도록 하지. 우선은 정보부터.”
“정보는 바로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말을 마친 흑선이 몸을 돌리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는 회주실로 들어가더니 책장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고는 안쪽의 구멍에 손가락을 끼웠다.
잠시 후 그가 일정 공력을 주입하자, 드르륵 소리가 나면서 기관 장치가 작동했다.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더니 벽 뒤로 계단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계단으로 들어선 후 흑선이 다시 벽면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공력을 주입하자 책장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래도 계단에 야명주가 박혀 있어서 아주 어둡진 않았다.
그렇게 지하에서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장이 빼곡하게 늘어선 넓은 방이 나타났다.
“……!”
오래된 묵향이 물씬 풍겨온다.
엄청난 서책의 양에 남궁천이 내심 놀랐다.
‘이러니 불명회가 불멸회라는 말이 떠돌지.’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장부는 모두 무림맹에 관한 정보이리라.
그 어떤 흑도도 함부로 불명회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야명주를 손에 든 흑선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광서성 지역의 책장을 찾아냈다.
그중에서도 계림분타를 찾아내더니 곧 서책을 꺼내 펼쳐 들고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계림분타의 골칫거리라…… 아, 여기 있군요. 우선 산새가 특이한 곳이어서 그런지 얼마 전 흑산채(黑山寨)라는 산채가 생긴 모양입니다. 흑산채가 그 지역을 오가는 양민들을 약탈해서 원성이 높다는군요.”
“그건 얼마나 됐지?”
“대략 육 개월 전부터라고 합니다. 보고가 올라온 게 그 정도면 아마 일 년 정도 전부터 조짐이 보였을 겁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으음. 계림에 방파 하나가 생겼는데 급성장 중이군요.”
“그게 문제가 되나?”
“됩니다. 무림맹에 가입된 문파가 아닌데, 계림분타를 우습게 여길 정도로 성장한다면요. 더구나 무림맹에 가입된 다른 문파들도 쉽게 건드릴 수 없게 되면, 맹의 입장에선 골이 아플 겁니다. 더구나 광서성은 변방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방파가 맹에 가입된 기존 문파를 억압하고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사업장을 계속 넓혀가니 기존 문파들이 힘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방파 이름은?”
“삼봉파(三峰派)라고 합니다.”
“삼봉파가 갑자기 성장한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그 흑산채의 공격을 막아낸 유일한 문파라고 합니다. 기존의 문파들이 번번이 패할 때, 삼봉파만 산채 무인들을 물리쳤답니다. 그래서 계림의 표국들도 전부 삼봉파에만 의존한답니다.”
“흐음. 냄새가 좀 나는데…… 일단 넘어가고 다음.”
“같은 맥락입니다만…… 그런 이유로 계림의 비월문(飛越門)에서 맹에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보류 중입니다.”
“그 문파에서도 이전에는 표국 호위 임무를 맡았겠지?”
“그랬을 겁니다. 지금은 삼봉파에 다 빼앗겼겠지만요.”
“계림의 표국들이 주로 어디로 다녀?”
“표물들이야 늘 가는 방향이 다양하죠. 동서남북, 어디든.”
“역시 그렇지. 딱이네.”
남궁천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호민각주만 만나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