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잘 떠올려 보자고
“이게…… 어찌 된 것이냐?”
계두식이 남궁천과 어깨에 들쳐 멘 도절귀를 번갈아 보았다.
남궁천이 도절귀를 바닥에 내려놓고,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짜악!
그 행동이 어찌나 거침없는지 지켜보던 계두식과 정검대원들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일어나. 일어나야지. 너 또 이러면 문제 있어. 해가 중천이야. 일어나.”
“끄으으.”
도절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게슴츠레 뜬다.
그는 옆에 선 계두식과 비량을 힐끔 보더니 주변 사람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히죽 웃었다.
“흐에에. 반가워요. 여러분. 흐헤헤.”
“……?”
계두식이 미간을 구기고는 도절귀를 보았다.
어째 상태가 좀 이상하다?
“어이, 도절귀. 괜찮나?”
“흐헤헤헤. 도절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도절귀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황궁 안마당에 별빛이 쏟아지네. 으헤헤헤.”
“이거,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은데요?”
지켜보던 정검대원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계두식이 남궁천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묻는 눈치였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안에 있던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제가 발견했을 땐 이미 이 지경이더라고요.”
“으헤헤헤. 도절귀는 사랑입니다. 후헤헤.”
계두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도절귀를 보았다.
호송 죄수를 지키긴 했는데 주화입마에 걸려 바보가 되어 버리다니.
그때 동굴 안쪽을 살피고 나온 정검대원이 보고했다.
“남궁천 말대로 동혈 안에 한 녀석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신분은 파악되나?”
그런데 대답한 사람은 뜻밖에도 비량이었다.
“아마 적상방의 흑혈대주일 겁니다.”
“적상방?”
“중경 지역에 터를 잡은 흑도방파지요.”
계두식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작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적상방을 비롯한 흑도 무리들이 도절귀를 탈주시켰는데, 그 도절귀를 되찾은 건 저 남궁천이고, 흑도 무리들을 처리한 것도 남궁천과 견습 생도들이란 말이지. 허참.’
병풍으로 서 있기나 하라던 생도들이 이렇게까지 해낼 줄이야.
그나저나 도절귀가 반병신이 되었으니, 맹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무림맹의 수뇌부가 도절귀로부터 어떤 정보를 원한 것이었다면 이 임무는 실패에 가깝지 않은가?
계두식이 복잡한 머릿속을 대충 정리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대열을 재정비하고 무림맹으로 복귀한다.”
“존명!”
정검대원들이 대답과 동시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무림맹주 묵천악은 후원을 거닐며 총관으로부터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보고를 이어가던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상입니다, 맹주님.”
“수고했네.”
“예, 그럼.”
총관이 공손이 인사를 하고 물러가려는데, 문득 묵천악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자네는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의…… 말씀입니까?”
“그렇네. 자네에게 있어 정의는 무엇인가?”
“글쎄요. 만인이 평등한 것 아닐까요?”
“만인의 평등이라.”
묵천악이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빛 하늘은 이제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묵천악이 노을빛을 받으며 총관을 돌아보았다.
“좋군. 하면 자네는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가?”
“글쎄요. 저의 짧은 견해로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됩니다.”
묵천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만인이 평등한 세상. 너무나 바람직한 세상이지. 하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세상이야. 그것이 본 맹이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래서 현실을 지키는 본 맹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면 맹주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묵천악이 끌끌 웃다가 다시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았다.
“책임을 지는 것. 누구나 자신이 저지른 짓에 책임지는 것. 하나 이 세상은 책임 지지 않는 자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래서 나는 내가 저지른 짓에 책임을 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네. 그 어떤 짓에도 책임지기 위해서 말이지.”
묵천악의 눈빛이 사뭇 단단해졌다.
혹자는 따질 수도 있으리라.
책임만 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짓도 용인되는 것이냐고.
이에 대한 묵천악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게 강호의 생리니까.
모든 정의는 바로 책임을 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까.
약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무림이다. 그런 살벌한 세계에서 홀로 공평함이니, 평등함이니 떠들어봐야 허공에 삿대질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선은 힘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
‘강호는 그게 전부지.’
묵천악이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시종 하나가 조심스레 들어와 총관에게 귓속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이윽고 총관의 목소리가 묵천악의 상념을 깨트렸다.
“맹주님, 정검대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오, 드디어. 내가 직접 가보지.”
“그런데…… 문제가 좀 생긴 모양입니다.”
“문제라면?”
“도절귀가 주화입마에 걸려 소통이 불가한 상태라고 합니다.”
“뭣이?”
순간 맹주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소통이 불가하다니?
도절귀는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절귀를 반드시 이용해야만 했다.
한데 주화입마라니?
“갑자기 왜 멀쩡하던 자가 주화입마에 걸렸단 말인가!
“호송 중에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탈주한 죄수를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주화입마에 걸린 상태였다고 하는군요.”
“죄수를 최초로 발견한 자는?”
“그것이…… 견습 생도인 남궁천이라고 합니다.”
“뭐라?”
묵천악이 움찔 거리고는 총관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라니?
무연회 우승자인 그 남궁천 말인가?
‘또 남궁천이라니!’
공교롭게도 일이 틀어질 때마다 남궁천이 개입한다. 과연 우연인가?
‘대살성 진천랑! 이게 네놈이 내게 묻는 책임인가? 그렇다면 내가 얼마든지 책임져 주마.’
묵천악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물었다.
“도절귀를 빼돌렸던 자들은 어찌 되었나?”
“핵심 인물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적상방의 흑혈대원들 몇이 살아남았습니다만, 자세한 내막은 모른 채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 같습니다.”
“하면 흑도인들도 도절귀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단 뜻인가?”
“우선은 그렇게 파악 됩니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지. 이미 놈들이 정보를 빼돌렸을 지도 모르니.”
묵천악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콰앙!
“정보를 빼돌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게 무슨 일이오!”
주먹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려친 자는 다름 아닌 흑선자(黑仙子)였다.
무림공적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
온통 검은 도복을 갖춰 입고 검은색 남화건을 쓰고 있었는데, 심지어 피부까지 거무죽죽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날카롭게 따졌다.
“적상방주께선 이 일을 어찌 책임지시겠소?”
“책임이라니? 이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결정한 사안 아니었소? 이게 나 홀로 책임질 일이란 말이오? 이거야말로 잘되면 내 덕, 못 되면 남 탓 아니오?”
적상방주 요충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우지 않은 청년이 금빛 부채를 살랑이며 말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천천히 대책을 생각해 보죠.”
“옥소공자는 참 여유가 흘러넘치는구려.”
흑선자의 타박에 옥소공자라 불린 청년이 그저 미소로 답했다.
옥소공자(玉笑公子).
늘 웃음을 지우지 않는 자로 알려진 흑도인.
늘 화사한 옷차림에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청년. 하나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도 잔인한 손속을 숨기고 있다.
옥소공자가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여유가 흘러넘치는 건 아닙니다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탁상공론만 할 게 아니라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요.”
“흥, 들리는 말에 의하면 도절귀가 주화입마에 걸려 완전 똥멍청이가 되었다는데, 유일하게 그 비밀을 알고 있을 흑혈대주마저 죽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닭 쫓다가 지붕 처다보는 꼴이 아니오!”
“혹시 무림맹에서 전부 알아차린 건 아닐까요?”
옥소공자의 말에 흑도인들이 저마다 움찔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일은 훨씬 심각해진다.
지금도 흑도인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할 판인데, 무림맹까지 가담한다면?
“별로 떠올리고 싶은 상황은 아니군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한 이는 다름 아닌 적노파파(赤努婆婆).
무공을 펼치면 전신이 피처럼 붉어지는 특성을 가진 그녀는 흑도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손속이 잔인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여대는 자였지만, 희한하게도 아직까지 무림공적에 이름을 올리진 않은 자였다.
흑도인들은 그 이유를 그녀 특유의 처세술과 수완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실제로 그녀는 정사를 막론하고 무척 발이 넓은 편이었고, 사람을 이용할 줄 알았다.
적상방주 요충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우선 책임 회피를 하긴 했지만, 기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가장 큰 건 역시 적상방이었다.
그가 주도적으로 도절귀 탈취 계획을 세웠으니까.
솔직히 자신도 있었다.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고, 흑혈대는 적상방에서도 최정예에 속했으니까. 물론 흑혈대원들 하나하나가 고수의 영역에 오른 것은 아니다.
하나 흑혈대주와 귀주삼살, 그리고 거신쌍도까지 합류했으니 이변은 없으리라 여겼다.
한데 정검대에 그렇게 발 빠른 놈이 있을 줄이야.
옥소공자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만약 무림맹조차 모른다면 강호는 큰 기연을 잃는 셈이겠군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오. 애초에 도절귀도 그 정보를 얻은 곳이 있으니.”
흑선자의 말에 다른 이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도절귀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자가 한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을.
* * *
‘비밀을 나만 알고 있다는 보장은 없겠고…….’
남궁천은 숙소 후원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일단 서두를수록 좋긴 한데…… 거기까지 갈 명분이 없단 말이지. 이거 참, 신분이 확실하다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남궁천은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일단 상청단(上淸丹) 한 상자는 내가 다 가져도 될 것 같고. 다른 녀석들은 딱히 나눠줄 필요는 없잖아? 고생도 내가 제일 많이 했으니까. 뭐, 취정단(取精丹) 두 상자 정도는 영감한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창응대가 좀 걸리는데…… 이 녀석들에게는 뭘 나눠주지?’
깊은 고심에 빠졌던 남궁천은 그날 동굴 안에서 도절귀를 심문하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도절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남궁천의 다리를 붙들고 애걸복걸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는 건 전부 다 얘기했습니다!”
“자자, 그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고.”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에 도절귀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말씀하십시오.”
심문이 시작된 지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도절귀의 외모는 십 년은 더 늙은 듯했다.
‘진짜 이렇게 지독한 놈은 처음이다. 이놈은 악귀다, 악귀!’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소름 돋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훔친 물건 중 마단곡(魔丹谷) 지도가 있단 말이지?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