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잘 떠올려 보자고
조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주 잠깐 그는 환청을 듣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혈은 진법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는 곳이었으니까.
한데 처음 듣는 목소리라니?
조위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돌리자,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아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생도……?’
보고를 받긴 했다.
이번 정검대 호송에 견습 생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그렇다고 여기까지 추격해 온 녀석이 생도일 줄이야.
하나 얼핏 보이는 외모와 갖춰 입은 무복을 보면 정식 정검대원이 아닌 생도가 분명해 보인다.
기감을 펼쳤지만 다른 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혼자냐?”
“어. 미혼이야. 아니, 기혼인가? 그게 좀 애매하네.”
“미친 새끼. 여길 혼자 온 거냐고 물었다.”
“보다시피. 그런데 왜 초면에 반말에 욕을 하고 지랄이야? 빌어 처먹을 놈아.”
“맹랑한 녀석이군. 진법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것이냐?”
“그러니까 말했잖아. 너무 조악하다니까? 이 정도는 아주 잠깐 시간 벌이용이야. 그것도 눈치 빠른 새끼들이면 금방 알아채지. 솔직히 정검대니까 통하지, 질풍대나 천라단이었으면 너는 진작 대가리 깨졌어, 인마.”
인마……?
아니,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지금 자신을 보고 인마라고 한 건가? 진짜 미친놈인가?
남궁천이 동굴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혀를 찬다.
“쯧쯧. 하여튼 허술하기 짝이 없다니까. 나 때는 말이야. 안가 하나를 만들어도 온갖 정성과 노력을 들였는데. 요즘 것들은 뭘 해도 대충 대충이라니까.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이쯤되자 조위는 확신했다.
이건 미친놈이다.
원래 미친 인간들이 곧잘 주변 사람들을 놀래키곤 하지 않는가?
아마도 진법을 파훼한 것도 우연이리라.
저 미친놈이 또 의외의 짓을 하기 전에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이 옳으리라.
뭐, 정말 예상 밖의 고수라고 해도 대응 방법은 똑같겠지만.
파앗!
돌발 상황에서는 무조건 선공이다.
조위가 바닥을 차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타다다닷!
빠르게 내달린 그가 순간 동굴의 벽을 타고 경공을 펼쳤다.
그야말로 질풍 같은 속도!
상대가 미처 대비하기 전에 단 일격으로 처리한……!
순간 조위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둑한 동굴 안에서 남궁천의 눈빛만큼은 유독 새파랗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남궁천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의 눈을 마주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의식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진다. 아니, 빨라진다. 자신의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지는 중이니까.
맹호를 닮은 눈빛.
한낱 어린 생도에게서 볼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강호를 배회하며 산전수전을 다 넘은 자의 눈빛이다.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
다른 게 없다.
바로 저런 눈빛을 가진 자를 피해 다니면 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상대만을 골라서 싸워 명성을 쌓아올리면 된다.
처음에는 명성을 위해 목숨을 걸게 되지만, 나중에는 그 명성이 목숨을 지켜주니까.
하나 조위는 더 이상 명성을 쌓아올릴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젠장……!’
남궁천의 입매가 비틀리는 순간!
서컥!
한 줄기 빛이 그의 목을 그었고, 다음 순간 그는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단 일격.
촤아악!
남궁천이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내자, 도절귀가 움찔거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이 녀석은 뭐지?’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외모. 천진한 표정과 말투. 가공할 만한 검술. 진법까지 파훼하는 노회함.
도대체 조화를 이루기 힘든 것들을 혼자 해내고 있지 않나?
강호에서 이처럼 이해 안 되거나 잘 모른다 싶은 건 무조건 경계 대상이다.
도절귀가 속내를 숨기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고, 고맙소. 덕분에 살았소.”
“곧 죽고 싶어질걸?”
“무, 무슨…….”
도절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경계했다. 지독한 새끼가 죽더니, 이상한 새끼가 나타났다. 지금 그 이상한 새끼가 자신을 향해 어딘지 섬뜩한 미소를 그린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뭐, 뭘 말이오?”
“강호의 흑도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탈주를 도우려는 도절귀라…….”
“…….”
“너무 웃긴 소리 같지 않냐?”
“무슨 뜻인지…….”
“내 기억에 넌 그저 조금 잘 나가던 좀도둑에 불과하거든. 칼 좀 쓸 줄 아는 도둑놈 새끼. 뭐, 하오문에서 분타주 정도의 자리가 무난하게 어울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절대로 흑도인들이 너에게 매달릴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지금 만난 놈들을 보면 하나의 조직이 아냐. 다시 말하자면 정말로 전 강호의 흑도인들이 널 빼내려고 안달인 거지. 이상하지 않아?”
“끄음…….”
“그래서 난 생각을 했어. 왜 이것들이 이렇게까지 널 노리는 걸까? 희대의 도둑놈 새끼라고 보기에도 좀 아쉬운 너를 왜 이렇게까지 빼돌리려고 할까?”
“그, 그거야 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무튼 그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난 그 이유를 물어보려고 해.”
“그러니까 날 빼돌리려는 자들에게 물어봐야…….”
“보다시피 뒈졌잖아. 이제 네가 대답을 해야지.”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남궁천이 예의 그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모를 수도 있지. 다들 그렇게 시작해. 그런데 결국 알게 되더라고.”
“무, 무슨…….”
“너도 금방 알게 될 거야. 나한테 맡겨 봐.”
“어어……? 오, 오지 마시오!”
“자자, 긴장 풀고. 잘 떠올려 보자고.”
남궁천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저벅저벅 다가갔다.
잠시 후 동굴 가득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으으, 으아아아아악!”
* * *
“이런 빌어먹을…….”
거신이도는 멀뚱멀뚱 선 채로 부러진 칼날을 보았다.
팽수혁과 최후의 일격을 주고받은 지금, 자신의 칼은 정확히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팽수혁이 이미 돌아보고 있었다.
역시 도신은 멀쩡하다.
‘어, 어째서…… 한낱 애송이에게……?’
츄아아아아!
다음 순간 가슴에 사선으로 선혈이 그어지며 피를 터뜨린 거신이도가 쿵 쓰러졌다.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킨 그는 결국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후우, 후우…….”
팽수혁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겼다!’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쓰러진 거신이도를 보았다.
거신이도와 자신은 거의 흡사한 도법을 구사했다. 둘 모두 실전형 무공을 익혔고, 패도적이면서도 무게를 실은 도격을 펼쳤다.
그럼에도 승자는 나이가 더 어린 팽수혁이었다. 여기에는 남궁천의 조언이 큰 몫을 했다.
‘빠른 것이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즉 빠를수록 무거워진다는 묘리를 터득한 팽수혁은 휴관기 동안 하북팽가의 도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련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도법은 더욱 무거워지고, 더욱 빨라졌다.
‘남궁천…… 넌 어디에 있는 것이냐?’
고개를 든 팽수혁이 남궁천이 달려갔을 방향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신가?”
“고맙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옆구리에 부상을 입은 유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팽수혁과 윤종승이 적절한 때에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이 정도 부상으로 그치지 않았으리라.
‘아직 멀었구나.’
유현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비무와 실전은 다르다. 팽수혁 말대로 혼자 고상한 척할 것 같으면 강호에 나서지 말고 산속에서 도나 닦을 일이다.
마음을 달리 먹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유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팽수혁을 보았다.
희미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실전형 도법을 구사하는 팽수혁이지만, 역시나 생에 첫 살인이 주는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윤종승도 마찬가지다.
윤종승은 아예 대놓고 떨고 있었다. 양손으로 팔뚝을 쓰다듬으며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내가 사람을…… 내가 사람을 죽였어…… 진짜로 내가 사람을…….”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유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큰 소리로 두 사람을 향해 포권했다.
“두 소협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목소리 가득 진득한 진심이 묻어난다. 신뢰가 가득한 유현의 눈빛을 보자, 팽수혁과 윤종승은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그것이 실전이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윤종승이 얼른 나무 위로 도약해서 먼발치를 확인하고는 내려왔다.
“정검대야.”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차례 광풍이 불면서 정검대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개중에는 계두식과 비량도 있었다.
“유현! 다친 건가?”
계두식이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비량도 심각한 표정으로 생도들에게 다가왔다.
유현이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가벼운 부상입니다. 여기 두 분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너희들이……?”
계두식이 놀란 표정으로 팽수혁과 윤종승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흑혈대원들과 귀주이살과 삼살, 거신이도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게…… 한낱 생도의 실력이라고?’
이건 견습 생도로 머물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 실전에 투입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이번 무연회에서 용천관이 우승자를 배출했다는 소식에 수준을 의심했건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놀란 계두식 곁으로 비량이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꽤 괜찮은 녀석들이라고요.”
“끄음. 남궁천은 어디에 있나?”
“탈주범을 쫓아 먼저 갔습니다.”
“혼자? 어디로 갔느냐?”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유현이 곧장 몸을 돌리고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계두식이 정검대원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부대주는 남아서 부상자들을 포박해 이송하도록 하고, 임의 이조만 나를 따르도록 한다!”
“존명!”
그렇게 소수 정예만을 이끈 계두식이 비량과 함께 생도들을 쫓아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 한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나타났는데, 그곳에 다다르자 비릿한 혈향이 물씬 풍겼다.
계두식과 비량이 대원들을 이끌고 멈춰 선 곳에는 역시나 두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비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귀주삼살의 맏형인 일살이군요. 저기는 거신일도.”
계두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악명은 익히 들은 바가 있소. 한데 이들이 왜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
“보나마나 그 녀석 짓이겠죠.”
“그 녀석이라면 설마 남궁천 말이냐?”
“예, 그놈 밖에 더 있겠습니까?”
팽수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계두식이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그리 대단한 녀석이냐?”
“저보단 조금 부족하지만 결코 만만한 녀석은 아닙니다.”
팽수혁이 팔짱을 끼며 어깨를 쫙 펼치며 말했다.
그런 팽수혁의 반응을 무시한 채 계두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들을 이렇게 만든 남궁천은 지금 어디로…….”
“저기겠군요.”
비량이 턱짓으로 암벽 한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벽이다.
계두식은 물론 생도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량을 돌아보았다.
“교관님, 저긴 그냥 벽인데요?”
“벽은 벽이지만 그냥 벽은 아니지.”
“무슨 말이에요?”
“진법이란다. 암벽의 음영을 이용해서 만든 단순한 눈속임이지만.”
“아……!”
생도들이 감탄을 터뜨린다.
계두식도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질풍대에도 있었다더니 과연 명성이 허울만은 아니었던 건가?’
그때였다.
분명 암벽으로 보이는 곳에서 남궁천이 스며 나오듯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어깨에는 축 늘어진 죄수를 들쳐 메고 연신 투덜거리면서.
“아오, 씨. 더럽게 무겁네. 피를 좀 더 뺄 걸 그랬나?”
뭔 피를 빼, 인마!
“어……? 다들 모여 있었네요?”
마침 일행들을 확인한 남궁천이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잃어버렸던 거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