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잘 떠올려 보자고
“나를…… 아시오?”
거신일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절로 존댓말이 나간다.
생도를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귀주삼살 중 가장 실력이 좋은 맏형을 단 일격에 처리했다.
어쩌면…….
‘저지선을 지나쳐 온 게 아니라, 무너뜨리고 온 것인가?’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았나? 아니면, 저지선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상대가 강하다는 뜻이리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예전에 넌 날 보면 오줌을 질질 쌀 정도로 긴장했었지.”
“예전……?”
“음…… 그게 벌써 한 이십 년은 지났지?”
“이십 년 전이라니…… 나이가…….”
“나? 지금은 열아홉.”
남궁천이 천진하게 대꾸하자, 거신일도가 표정을 굳혔다.
확실히 이놈은 둘 중 하나다.
막강한 실력을 보유한 신성으로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강해서 자신을 놀리는 것이거나…….
‘아예 미친놈이거나.’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왜? 오랜만에 보니 역시나 오줌이 찔끔찔끔 나와?”
“당신이 고수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소. 하나 예의를 지켜주면 좋겠군.”
“하긴. 네가 예의 하나는 바른 편이었어. 그렇지?”
“…….”
“그런 의미에서 순순히 물러나면 모른 척해주마.”
“그럴 수는 없소.”
스르르릉.
거신일도가 커다란 도를 뽑아 들었다. 남궁천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하여튼 칼 큰 놈들은 나랑 상극이라니까.”
“이왕이면 돌아가시오. 어차피 당신이 날 꺾을 수 있다고 한들 이젠 쫓아갈 수도 없을 거요.”
“이 새끼가 날 물로 보네.”
“뭐요?”
남궁천이 피식 웃더니 거신일도 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거기. 암벽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지? 딱 보니 동굴에 처박혀 있나 본데. 좋은 말로 할 때 비켜라.”
“어찌 그걸…….”
“내가 왕년에 사람 피해 다니는 일에는 이골이 난 몸이라서 말이야. 어디 숨어들 만한 장소는 기가 막히게 잘 찾는 편이거든.”
“하면 더욱 보내 드릴 수 없게 됐군!”
말을 마친 거신일도가 노골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남궁천도 이제는 표정을 굳히고 벽라검을 천천히 앞세웠다.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남궁천이 거신일도를 보며 읊조렸다.
“이만하면 옛정을 생각해서 충분히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래 이러지 않거든? 기분 나빠서 죽이고, 분위기 파악 못해도 죽이고, 자꾸 따라다녀서 죽이고. 그렇게 죽인 애들이 황산 골짜기를 채우고도 남아. 아, 여기엔 공통점이 있는데, 다들 너처럼 내게 칼부터 들이댄 녀석들이지. 그런데 너한텐 꽤 기회를 줬는데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니 어쩌겠나? 네 운명이 여기까지인 거겠지.”
“무슨 소리를…….”
“됐고. 그래도 네가 예의는 바른 녀석이었던지라 진지하게 임해줄 테니 최선을 다해서 와라.”
스스스슷.
순간 남궁천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진중함이 느껴진다.
거신일도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자는 진짜다.’
허세나 거만이 아니다.
숨결 하나에서도 무리(武理)를 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비록 일살과 싸울 때는 뒷골목 왈패처럼 싸우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어느 모로 보나 무인의 면모가 아닌가?
“존함을 알려줄 수 있겠소?”
“남궁천. 천하제일룡이 될 남자다.”
“……!”
타앗!
찰나 거신일도가 바닥을 차며 튀어나갔다. 그가 내디딘 바닥이 한 뼘이나 움푹 파였다.
쒸이이이익!
“우선 나부터 넘어야 할 거요!”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
확실히 그는 귀주삼살보다도 한 수 위의 무공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나 남궁천은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양손으로 집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왼손에 더 실려 있었다.
하나 도를 쥔 손은 오른손.
결국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일도는 허초라는 뜻이다.
‘여전히 손 바꾸기를 즐기는군.’
거신일도가 구사하는 무공의 특징이었다.
어지간한 어른의 키 정도 되는 도를 부리는 것도 경이로운데, 그는 그 큰 칼을 한 손으로 든다.
한데 양손잡이다.
즉 오른손에 쥔 도를 왼손으로 옮겨 쥐고 휘두르거나, 그 반대로 왼손으로 휘두르던 도를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바꿔 쥐고 반전을 노리기도 한다.
그 커다란 도가 양손을 자유로이 오가면서 어디로 날아들지 모를 정도로 몰아친다.
대도를 사용하는 자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도법.
거신쌍도가 강호에 악명을 드높인 것은 바로 이처럼 까다로운 무공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남궁천은 그런 거신쌍도를 오래전에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뭐, 전생에 내가 만나지 않은 흑도인은 조무래기들밖에 없을 정도니…….’
쉬따앙!
묵직한 도격이 사선으로 떨어지면서 금속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남궁천의 가벼운 몸이 휘청거린다.
파바밧!
따아앙!
순식간에 도를 다른 손으로 옮겨진 거신일도가 다시 한번 세차게 휘둘렀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사선으로 솟구치는 칼이다.
역시나 남궁천이 휘청거리며 튕겨나간다.
‘잘도……!’
이를 뿌득 간 거신일도가 다시 한번 매섭게 몰아붙인다.
쉬따아아앙!
강맹한 도격이 이어지고 불꽃이 터져 나온다.
남궁천이 끈 떨어진 연처럼 휘청 날아오른다.
‘됐다!’
몸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만큼은 피할 수가 없는 법. 설사 자신의 연격을 막아낸다고 해도 힘으로는 버티지 못하리라.
파바바박!
거신일도가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가자 땅에 깊숙한 발자국이 연이어 생겨났다.
“끝이다아아앗!”
쑤아아아아앙!
진득한 기운을 품은 대도가 태산도 쪼개 버릴 듯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던 남궁천의 눈빛이 순간 반짝인다.
창졸지간 남궁천의 전신에서 짙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일어났다.
‘이건 뭔……?’
마치 남궁천이 바람을 타는 것 같달까?
거신일도가 휘두르는 기풍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남궁천이 뒤쪽으로 빠르게 물러나는 게 아닌가?
이래서야 자신이 내뿜은 기운이 오히려 남궁천을 떠밀며 기회를 만들어준 꼴이었다.
쑤카아아앙!
대도가 남궁천의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꽈아앙!
잠시나마 완전한 승리를 예상했던 거신일도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살기를 가득 담은 일격이었다.
한데 자신의 기운이 상대를 타격하진 않고 밀어낸다? 마치 보호라도 하듯이?
사실 이는 남궁천이 새로 익힌 창벽공에 초견파공안을 접목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창벽공은 기본적으로 공기의 흐름을 중시 여기고, 그 묘리를 최대한 이용하는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거신일도가 운용한 목계의 기운과 상생하는 화계의 기운으로 대응을 하면서 기풍을 탄 것.
이러한 내막을 이해할 수 없는 거신일도로서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나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콰앙!
순간 떠밀려갔던 남궁천이 진각을 밟더니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쉬이이이잇!
검첨이 빛살이 되어 거신일도를 덮쳐왔다.
‘막아야……!’
하나 거기까지였다.
새하얀 빛은 거신일도를 완전히 덮쳐 버렸고,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생각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쿵!
이마가 꿰뚫린 거신일도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자 이마에 박혔던 벽라검이 뽑혀 나왔다.
콰당!
남궁천이 무감한 표정으로 거신일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기회를 줄 때 물러날 것이지.”
거신일도와 딱히 친분은 없다. 악감정도 없다. 뭐, 살면서 꽤 몹쓸 짓도 했겠지만, 남궁천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손모가지를 썰어 버렸을 거다.
그런데도 그만큼 기회를 준 건 이례적인 경우였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남궁천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암벽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곧 그가 암벽에 스며들듯이 모습을 감췄다.
* * *
흑혈대주 조위는 홰에 불을 붙이다가 동혈 입구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조금 전 꽤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에.
진법 특성상 밖의 소리는 어느 정도 안까지 들리지만, 안의 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벌써 시작된 모양이군.”
그러고 보면 추격자가 제법 빠른 모양이다.
정검대주가 직접 왔으려나?
설사 정검대주가 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이미 저지선을 뚫고 오느라 기력이 꽤나 쇄했을 테고, 밖에서 버티는 저 두 명은 그보다 더 강할 테니까.
만에 하나 정검대주가 거신일도와 일살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거기까지다.
진법이 설치된 이 동혈을 찾아내진 못할 터.
‘어쨌든 시간은 번 셈인가?’
생각을 마친 조위가 등에 업고 있던 도절귀를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쿠당!
손발이 공진철(功鎭鐵)에 구속된 도절귀는 의식을 완전히 잃은 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나 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일어나라. 깨어 있는 것 다 알고 있다.”
“…….”
퍼억!
순간 조위가 도절귀를 냅다 발로 걷어차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억! 이런, 개새끼!”
도절귀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쏘아보자,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든 조위가 얼른 도절귀의 목젖에 들이댔다.
“살고 싶으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 말은 내가 살아 있어야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거네? 킬킬킬.”
“이 새끼가…….”
“여기 미친놈이 있다! 정검대는 여기로 와서 이 미친 새끼를 잡아라앗! 이놈이 날 여기로 납치……!”
짜아악!
순간 도절귀의 뺨에 불이 붙었다.
얼굴이 홱 돌아간 도절귀에게 조위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꼼수를 부려? 네가 지랄발광을 해도 밖에서는 들을 수 없어. 이 동굴은 진법으로 소리까지 차단되어 있으니까.”
“씨벌…….”
그제야 도절귀의 얼굴이 굳었다.
도절귀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라.”
“아직 묻지도 않았어, 새끼야.”
“어쨌든 몰라.”
“뭐라도 아는 게 좋을걸? 그래야 조금이라도 편해질 테니까.”
“킬킬. 편하게 죽으란 소리냐?”
“아마 조금 있으면 그걸 더 원하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조위가 단검을 거꾸로 쥐더니 그대로 도절귀의 허벅지에 쑤셔 박았다.
푸욱!
“끄아아아악! 이 개새끼야아악!”
“자, 이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이 찢어죽일 새끼! 내 다리를…… 크흐윽!”
“도절귀가 그 알량한 명성이라도 이어가려면 두 다리가 멀쩡해야 할 텐데.”
조위가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손으로 움켜쥐자, 다시 한번 도절귀의 비명이 동굴에 가득 차올랐다.
“자, 말해 봐. 어디지?”
“뭐, 뭐가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그, 그마아아안!”
“자꾸 날로 처먹으려고 하지 말고.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듣고 대답해야지. 다시 묻겠다. 어디냐?”
“말, 말할 테니까! 그 염병할 손부터 치워!”
“아, 그래. 미안하군.”
조위가 깜빡했다는 손에 힘을 풀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도절귀가 땀에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조위를 노려보았다.
“내가 말하면…… 날 죽일 생각이냐?”
“미안하지만 거짓말은 못 하겠다.”
“죽일 생각이군.”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토사구팽이지.”
“살벌하게 솔직한 새끼네.”
“그래서 대답은?”
“그건…….”
호흡을 가다듬은 도절귀가 씨익 웃었다.
“네 엄마한테 물어봐, 이 새끼야.”
“…….”
순간 조위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찰나 그가 도절귀의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쑥 뽑아 들었다.
“끄으으윽!”
“곧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다.”
쉬이이이익!
다시 조위가 단검을 내려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동작 그만.”
낯설고 앳된 목소리가 불쑥 그의 등을 때렸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은 조위에게 앳된 목소리가 혀를 찼다.
“쯧쯧. 이게 뭐니? 이게. 이렇게 조악한 진법으로 제대로 숨기나 하겠어? 이건 도망자의 기본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