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46화 (146/508)

146. 비켜, 이 새끼들아!

‘거기…… 밟고 있는 자가 누군지는 아시오?’

유현이 속내를 삼키는 사이, 팽수혁이 의식을 잃은 삼살을 발로 뻥 걷어차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실전에 자신 없으면 한쪽에 찌그러져 있어!”

“…….”

팽수혁이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거신이도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유현이 들으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고매한 무공을 익히면 뭐 하나? 실전에서 망설이면 무용지물인데! 혼자 고상한 척할 것 같으면 산에 처박혀서 나오지나 말든지!”

“……!”

유현이 움찔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팽수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를 때리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생각은 짧아야지. 절대 길면 안 돼. 오히려 전투 중에는 생각이 없어야지. 오로지 살기 위해 싸우는 것. 생존 본능. 그게 전부라고.”

“명심하지요.”

그때였다.

팽수혁 뒤쪽에서 한쪽 팔을 잃은 이살이 득달같이 달려들며 고함을 내지르는 게 아닌가?

“아우야아아! 이놈들 내 반드시이잇……!”

퍼억!

순간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튕겨나간 이살이 바위 옆에 구겨진 종이처럼 고꾸라졌다.

척추가 완전히 부러졌는지 상반신이 기이하게 꺾인 모습은 언뜻 흉물스럽게 보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한 것.

이살을 배후에서 공격한 이는 다름 아닌 윤종승이었다. 그가 주먹을 뻗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어어……? 저 사람…… 죽은 건가? 저기요?”

윤종승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군가 팽수혁을 뒤에서 공격하려고 하기에 달려오는 속도를 살려서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한데 저렇게 구겨진 종이처럼 날아갈 줄이야.

그러잖아도 힘 조절이 잘 안 되는데…….

난생처음 살인을 한 윤종승이 이살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저기요? 죽지 마요…….”

“하참, 이놈이나 저놈이나.”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윤종승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죽, 죽었……!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때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뒤에서 덮치는 게 아닌가?

이내 무거운 목소리가 전신을 짓누르듯 떨어져 내렸다.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너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헉!”

쉬이이이익!

기겁을 하며 돌아보니 커다란 도신이 세상을 가를 듯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진짜…… 죽는다!’

윤종승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쩌어어어엉!

몸이 갈라지는 섬뜩한 감각 대신 금속성이 울렸다.

가까스로 눈을 떠보니 어느덧 팽수혁이 앞으로 튀어나와 대도를 든 채 막아서고 있었다.

팽수혁이 거신이도를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댁은 나랑 노셔야겠는데?”

* * *

숲속을 가로지르며 바람처럼 달리는 세 사람.

선두에 선 흑혈대주 조위의 등에는 여전히 도절귀가 업혀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거신일도와 귀주일살.

특히 거신일도는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가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뭐지? 한 놈이 계속 따라붙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느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혈대와 거신이도 그리고 귀주이살과 삼살이 남았다.

한 녀석이 그들의 저지선을 뚫었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리라.

한데 이건 저지를 당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가 아닌가?

하다못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이보단 빨리 쫓아올 수 없으리라.

다시 말해 저지선이 돌부리만도 못한 수준이란 건데…….

그럴 리는 없고, 추격자의 무공 수위가 상상 이상이라는 건가?

하면 아우는 어찌 됐을까?

설마 추격자에게 당하진 않았을 거다.

그래, 놓친 것이겠지.

추격자의 경공이 유달리 뛰어나거나.

거신일도가 무뚝뚝한 음성을 흘렸다.

“한 마리가 계속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군.”

“놓친 모양이지.”

귀주일살이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 역시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자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흑혈대주가 부지런히 경공을 펼치며 대꾸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전에 보신 동혈이 나타날 거요. 진법으로 가려져 있어 발견하기도 어려울 거고. 우선 급한 대로 거기에서 꼬리를 자르고 갔으면 하는데 선배들 생각은 어떠시오?”

“그러자고. 이대로 달리는 것도 심심하니.”

“어차피 아우들 데리고 가야 하니 그렇게 하지.”

귀주일살과 거신일도가 동의하자 조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공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가다 보니 나무와 수풀이 뜸해지고, 우측으로 깎아지른 암벽이 나타났다.

“다 왔소. 두 분 같이 들어가시겠소?”

“우리가 맡을 테니, 대주는 동혈로 들어가 있게.”

“어차피 출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두 사람의 대꾸에 조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절벽으로 다가갔다.

“알겠소. 그럼 부탁드리겠소.”

분명 암벽으로 막힌 곳이었는데, 조위는 그 암벽 틈으로 교묘하게 스며들었다.

마치 암벽의 그림자에 묻히는 듯하다가 자연스럽게 암벽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거신일도와 귀주삼살의 맏형인 일살은 각기 칼을 뽑아 들고는 돌아서서 추격해 오는 남궁천을 기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호흡을 가다듬을 때, 마침 저만치 추격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저거? 내 눈이 삐었나?”

“흐음. 웬 애송이가 달려오는군.”

“그럼 내 눈이 멀쩡하단 건데…… 아주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이잖아?”

“클클. 그럼 사뿐히 즈려밟아줘야지. 이제 보니 워낙 위협거리도 되지 않는 녀석이라서 그냥 놔준 모양이군. 이 새끼들, 내가 그리 매사에 철저하게 대응하라고 일렀건만.”

귀주일살이 혀로 칼날을 핥으며 투덜거린다.

그로서는 추격자가 뜻밖에도 애송이인 것을 확인한 동생들이 일부러 막지 않았다고 여긴 것이다.

거신일도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살다 살다 저 어린것에게도 칼을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난 영 내키지 않으니 그쪽에서 나서든지.”

“흥, 어차피 칼 대는 순간 인간이 아니라 고깃덩이인 건 매한가지지. 홀로 고상한 척하고 싶다면 뒷짐이나 지고 있으시게.”

“어이, 말 함부로 내뱉다가 명줄 짧아진다는 건 알아야지.”

“누구 명줄이 짧아진다는 거야? 나? 아니면 너?”

거신일도가 기도를 끌어 올리고는 일살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친다.

하나 두 사람은 곧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촤아아악!

먼지를 풀썩 일으키며 멈춰 선 추격자.

마침내 남궁천이 바로 앞에 도착한 것이다.

한데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것 같은 애송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 내뱉는 말이 가관이다.

“후우, 멀리도 왔네, 새끼들. 다 뛰었냐?”

“허…….”

“하여튼 요즘 것들은…….”

거신일도가 헛바람을 삼켰고, 일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살이 도신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나섰다.

“아이야. 용케도 여기까지 쫓아온 건 칭찬하마. 그 나이에 이 정도면 굉장하구나.”

“굉장한 정도가 아니라 미친 수준이지.”

“허. 그래, 그래. 인정하마. 경공 하나는 정말이지 수준급이다. 한데 세상이 네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단다. 내가 강호 선배로서 너에게 한마디 하마.”

“그래, 숨도 돌릴 겸 한번 씨불여 봐. 들어줄 테니.”

남궁천이 팔짱을 척 끼고는 턱짓을 한다.

정말이지 맹랑하다 못해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다.

하나 이 또한 제 딴에는 나름 격장지계를 펼치는 것이리라.

귀엽다. 그래, 강호 선배로서 이런 자세는 귀엽게 봐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하나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혼날 건 혼나야겠지.

후우우우웅!

순간 일살의 전신에서 뜨끈한 기풍이 불면서 장삼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아이야, 강호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군지 아느냐?”

“누군데?”

“그건 바로…….”

“아, 참고로 뭐 오래 살아남는 자라는 둥, 이딴 식상한 소리 할 거면 미리 닥쳐주길 바람.”

끄음. 개새끼네, 진짜.

어린아이의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 않지만, 이 녀석은 묘하게 사람 신경을 긁어댄다.

일살이 남궁천을 노려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걸 아는 새끼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될 텐데?”

“그러게. 그걸 아는 새끼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무릎부터 딱 꿇고, 뒈져라 빌어야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잘 아는구나.”

“그래, 잘 아는데 왜 안 해?”

“바로 그거다. 잘 아는데 왜…… 으응?”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허리춤에서 벽라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잘 아는 새끼가 왜 안 하냐고.”

아니, 그건 지금 내가 할 말 아닌가? 왜 네가 묻는 거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귀주일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남궁천의 얼굴에 어느새 싸늘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렇게 잘 알면 빌어야지, 이 새끼야. 자, 한번 빌어 봐.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혹시 알아? 네가 네 발 달린 짐승이 되면 그 정성에 감동해서 살려는 드릴지.”

“뭐, 뭐라?”

“왜? 도저히 못하겠냐, 이 새끼야?”

저, 저 미친…….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뭐, 어지간히 말이라도 통해야 화가 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이건 정말 천지분간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닌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도대체 무림맹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미친놈을 보냈단 말인가?

하긴. 망할 무림맹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뒈질 때가 된 거겠지.

“내 보아하니 네놈은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로구나. 어차피 이리 된 것 일찌감치 뿌리를 뽑아주마.”

“혓바닥이 긴 건 여전하구나.”

“뭐라?”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네. 요즘도 수라겸(修羅鎌)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시종 노릇하고 있나?”

순간 귀주일살의 미간이 팍 구겨지더니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반응.

그 묘한 변화에 가만히 지켜보던 거신일도도 살짝 긴장을 다졌다.

귀주일살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더니 남궁천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네 이놈…… 정체가 뭐냐?”

“아직도 모르겠어?”

“수라겸이 보낸 놈이더냐?”

“그리 묻는 걸 보니 수라겸 뒤통수라도 치셨나? 에이, 그래도 그럼 안 되지. 내 알기론 수라겸이 너희들을 제자처럼 키워준 걸로 아는데.”

“닥쳐라! 네놈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순간 남궁천의 안면에서 희미하게 머물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섬뜩.

귀주일살이 원인 모를 오싹함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고는 한 걸음 나선다.

“그러니까 아직도 모르겠냐고.”

“뭐…… 뭘……?”

“나야, 나. 널 자근자근 썰어서 염라대왕에게 갖다줄 저승사자.”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는 놈이로구나!”

파밧!

쒸에에엑!

순간 일살이 빛살처럼 날아가면서 일격에 남궁천의 목을 노렸다.

정말이지 범인이라면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시간.

그러나 남궁천을 향해 날아가는 일살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늘 전신을 휘감는 쾌감이 없다.

언제나 적의 목을 치기 직전에는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누렸는데.

지금은 아니다.

바닥을 차고 남궁천을 향해 날아가기까지가 천리 길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저 얼굴.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뚫어본다는 것처럼 쫓아오는 녀석의 동공!

‘이 느낌은 마치…….’

그래, 한동안 잊고 있었다.

정말 오래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무림공적 제일호, 진천랑!

어째서 이 애송이에게서 그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칼로 적의 목을 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것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가?

일살은 자신이 죽음의 복판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섬광을 이끌며 날아간 자신의 칼날이 목을 치기 직전, 녀석의 입매가 슬쩍 치켜 올라가는 것을.

슈컥!

빛이 솟구쳤고, 세상이 마구 회전하면서 뒤집어졌다.

콰당탕탕!

한참을 구른 일살은 저만치 쓰러진 자신의 몸통을 보았다.

‘시벌…… 무림맹이 왜 저 애송이를 보냈는지 알 것 같군.’

그렇게 일살은 자신의 말대로 무림맹을 이해하는 순간 생을 마감했다.

물론 남궁천이 여기 있는 것은 무림맹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촤아악!

벽라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낸 남궁천이 경악한 표정으로 선 거신일도를 돌아보았다.

“어째 너는 안 본 사이에 더 큰 것 같다?”

덩치가 집채만 한 거신일도를 보며 남궁천이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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