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42화 (142/508)

142.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호송이 시작됐다.

무림맹에서 파견된 정검대는 태강 분타에서 하룻밤 묵지도 않은 채 곧장 발길을 돌렸다.

무한에서 태강까지 오는 길만도 먼 여정이었기에 몇몇 정검대원들 사이에서는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견습 생도들도 불만이 생기긴 마찬가지.

정식 대원들도 피곤한 일정인데, 강호초출인 생도들이야 오죽할까?

그렇다고 힘들다며 투덜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윤종승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려는 것도 꾹 참은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잖아도 견습 생도를 무시하는 상황에서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거려봐야 좋을 게 하등 없는…….

“사람들이 말이야. 융통성이 없어! 융통성이! 하루 이틀 늦으면 좀 어때서? 어? 여기까지 오느라 그 개고생을 했는데, 뜨뜻한 물에 몸도 좀 녹이고, 묵은 때도 좀 벗기고, 술도 한잔 딱 걸치면 좀 좋아? 이게 다 그 꽉 막힌 대주 때문이지. 중얼중얼…… 중얼중얼…….”

물론, 분위기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하는 녀석도 있지만.

윤종승이 남궁천을 힐끔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호송 수레를 쳐다보았다.

검은 천으로 덮인 채 밧줄로 꽁꽁 묶어둔 수레.

도절귀라고 했던가?

흑도인들 사이에서는 드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자.

태강 분타에서 빠져나올 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흑도인들 사이에서 도절귀의 탈주를 돕는 놈들이 많아서 태강분타에서 호송대 꾸리길 포기했다는 말들이었다.

결국 정검대를 일부러 불러야 할 만큼 위험하단 소리가 아니겠는가?

휘이이잉.

한 차례 싸늘한 바람이 불자 윤종승은 얼른 목을 움츠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송 죄수의 흉악한 얼굴을 보고 나면 굴러가는 나뭇잎에도 놀란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지경이다.

뭐, 아직 얼굴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덜그덕. 덜그덕…….

호송 수레가 쉼 없이 굴러간다.

울창한 숲을 지난 호송 수레는 좁은 협곡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춰 섰다.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협곡이다.

그냥 지나가도 무서울 곳을 무림공적을 태운 수레까지 끌고 지나가야 한다.

선두에 섰던 정검대주 계두식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복귀를 최대한 서둘러야 하니 지름길을 이용할 예정이다. 이 협곡만 지나면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니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팽수혁이 손을 들자, 계두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냐?”

“굳이 저 좁은 협곡을 지나가야 합니까?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정검대가 존재하는 건 최대의 효율을 위함이다. 지름길을 두고 이틀씩이나 더 걸릴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지.”

“만약 저 협곡에서 습격이라도 받으면…….”

“두렵나?”

“예?”

언뜻 도발적인 질문에 팽수혁이 눈살을 슬쩍 구기자, 계두식이 입매를 비틀었다.

“두렵냐고. 왜? 정검대는 어차피 병풍 역할만 하면 된다면서?”

쳇, 그걸 여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팽수혁이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계두식이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라. 기습이 일어나면 비량 교관이 너희들을 잘 지켜줄 거다. 싸움은 본 대가 알아서 할 테니 몸이나 잘 사리도록. 너희들은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병풍처럼 서 있으면 된다.”

“아니, 말씀을 꼭 그렇게…….”

“아아, 잘난 척 오지고.”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어느새 수레 끝에 걸터앉은 남궁천이 하늘을 보면서 풀잎을 입에 물고…… 아니, 그것보다…….

“너…… 지금까지 수레에 걸터앉아서 온 거냐?”

계두식이 미간을 잔뜩 구기고 묻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다.

“예, 뭐. 자리가 남기도 하고.”

그게 네놈이 앉을 자리냐!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는 고함을 꾹꾹 누른 계두식이 비량을 휙 돌아보았다.

“교관! 대체 생도들을 어찌 가르치는 거요?”

“으음. 제가 워낙 방임주의다 보니. 하하.”

비량이 헤픈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에 계두식은 눈이 더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째 이번 견습 생도들은 제정신 박힌 녀석이 없는 것 같다.

“어이, 생도! 호송 수레에 걸터앉아서 가다니. 제정신이냐?”

“으음. 이것도 안 되는 거였나요?”

“뭐?”

“하아, 진짜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시네.”

“뭐가 어째?”

“아니, 뭐. 사실 그렇잖아요.”

뭐가 그래? 인마!

“어차피 병풍이라면서요?”

“어……?”

“기습이라도 발생하면 몸이나 잘 사리라면서요?”

“그런데?”

“어차피 짐짝 취급하시는 거라면 수레에 좀 얹어 가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거, 까다롭게 굴지 말고 대충 넘어갑시다.”

아니,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한데 뭐라고 반박을 못 하겠다.

생도들을 병풍으로 부른 것도 사실이고, 기습이 발생하면 몸이나 사리라고 한 것도 자신이니까.

계두식이 씨근거리며 서 있자, 남궁천이 등을 척 기대고선 잠이라도 한숨 잘 것처럼 한쪽 눈만 뜬다.

“혹시 병풍의 자세에 대해서 알려주실 게 있습니까?”

“네놈이 병풍인 건 맞는데 그래도 기습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될 것 같다만. 짐짝처럼 얹혀 가다가 화살에 대가리라도 뚫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최대한 겁을 주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어느 정도 통하긴 한 걸까?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그럼 당장 일어나서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야겠지?”

“에이, 괜찮아요.”

“그래, 괜찮…… 으응?”

“기습 안 일어날 거라고요.”

“어째서 확신하느냐?”

이제 계두식은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수준이었다.

“외길 협곡이잖아요.”

“그러니 더 위험하지 않겠느냐?”

“아니죠. 지금 전쟁 중인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전쟁 중이라면 저런 협곡이 궤멸당하기 딱 좋겠죠. 하지만 지금은 죄수 호송 중이잖아요. 탈주를 돕는 자들이 외길 협곡에서 습격해 온다면 병신 인증하는 거죠.”

그러자 이번엔 윤종승이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왜?”

“외길이니까.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서 다수의 인원이 습격하기에도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

“오오, 과연 그렇구나.”

“소수 정예가 탈주를 돕는다고 해도 탈주로가 두 군데뿐인 외길에서는 너무 위험한 선택이지. 그렇다고 협곡 위에서 화살을 퍼붓다간 도절귀도 같이 죽을 확률이 높고.”

“그렇군. 그렇군.”

윤종승이 납득이 간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계두식은 남궁천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 봐라?

마냥 무시할 애송이는 아니란 건가?

대개의 사람은 분위기나 환경에 압도당하게 마련이다.

눈앞에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협곡을 앞두게 되면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지배당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한데 남궁천은 정확히 상황을 파악했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 협곡이야말로 지금까지 여정 중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지.”

“그럼 위험한 곳은 어디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야지. 네가 호송 수레를 습격할 계획이라면 어디에서 하겠어?”

“흐음.”

윤종승이 침음을 흘리는데, 유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큰 마을이겠군요.”

“그렇지. 오히려 저 무시무시해 보이는 협곡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을이 제일 위험해. 긴장이 딱 풀리는 그 순간.”

꿀꺽……!

윤종승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남궁천이 계두식을 힐끔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뭐, 대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릴 놀리려고 하신 말씀일 거고. 설마 이 정도 이치도 모르셨을 리가 없으니. 그렇죠?”

계두식이 어금니를 꾹 씹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하나 수레에서는 내려서 걸어라.”

“왜요? 어차피 병풍…….”

“보아하니 병풍 수준은 아닐 것 같군. 본 대에 정말 한 줌 도움이라도 되겠다면 사위를 경계하며 걷도록 해라.”

“하아, 역시 융통성 없는 분.”

남궁천이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면서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계두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확실히…… 정이 안 가는 녀석이다.

* * *

남궁천의 말대로 협곡을 지나는 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송 수레가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정검대잖아?”

“죄수를 호송 중인가 본데?”

“그런데 검은 천은 왜 둘둘 감아놨대?”

“가끔 지리에 밝은 녀석들을 호송할 때는 저렇게 한다는 소리를 들었구먼.”

“어떤 놈이지?”

“낸들 알겠나? 보나마나 흉악한 놈이겠지.”

태강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이어서 그런지 죄수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한데 남궁천 말대로 사람들이 주변으로 자꾸만 모여드니 정검대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들 중 누가 기습을 해올지 알 수 없단 말이잖아?’

윤종승은 식은땀이 흘렀다.

호객을 하는 점소이, 좌판을 늘어놓은 보부상, 노리개를 구경하는 아낙들, 철부지 아이들까지.

그저 평범한 저잣거리의 풍경이 오늘따라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수상해 보인다.

그때 아이 세 명이 까르르 웃으며 정검대 행렬에 불쑥 끼어들었다.

“엇, 위험!”

윤종승이 얼른 아이를 안아 들면서 돌려세웠다.

팽수혁과 유현도 다른 아이들을 각기 낚아채서 행렬 바깥쪽으로 물러났다.

세 사람의 행동이 생각보다 민첩하자, 호송 수레 가까이에서 경계를 하던 정검대원들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행렬이 잠시 멈춘 사이 뒤늦게 달려온 사내가 아이들을 호통치며 나무랐다.

“이 녀석들! 이쪽으로 달려가지 말라고 했잖느냐! 맞아야 정신 차리지?”

“철부지 아이들이 뭣 모르고 뛴 것 같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유현이 부드럽게 말하자, 사내가 연신 굽실거리며 사죄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이 뭣 모르고 설치는 바람에.”

“괜찮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

퍼억!

말을 뱉던 유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내에게 다가온 남궁천이 다짜고짜 뒤통수를 후려친 게 아닌가?

그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 선두에 서서 상황을 주시하던 정검대주까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저, 저 미친놈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한데 남궁천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고꾸라진 사내를 발로 냅다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크윽……! 무, 무슨……! 정검대가 어째서 무고한 양민에게 이러신단 말이오?”

“무고해? 네가 무고해?”

남궁천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지는데, 계두식이 부리나케 달려와 소리쳤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내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이놈보고 따져야죠. 죄수 탈주를 도우려고 한 놈이니까.”

“뭐라고?”

계두식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곡에서 잘난 듯 떠들 때만 해도 감각이 있는 녀석인가 싶었더니.

다짜고짜 애들을 데리고 나타난 양민을 탈주 공범으로 몰아가?

아무래도 너무 긴장해서 죄다 공범으로 보이는 건가?

하긴 강호초출이지.

그때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의심스러울 때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애였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술렁인다. 이대로면 정검대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리라.

“남궁천이라고 했나? 아무래도 네가 너무 긴장해서 실수한 것 같은데 정신 똑바로…….”

그 순간!

“죽어라아아앗!”

쒸에에엑! 팍!

“……어?”

말을 잇던 계두식이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눈앞에서 멈춘 단검.

그리고 단검을 내지른 사내의 손목을 움켜쥔 남궁천.

잠깐, 지금 남궁천이 지척에서 내지른 이놈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고?

계두식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돌아보자, 남궁천이 입매를 비튼다.

“이래도 실수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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