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드디어! 실전이다!’
생도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견습 기간에 두각을 보이면 이후 정식 무림맹원이 되었을 때 요직으로 발령받을 가능성이 높다.
즉, 견습 무인이 된다는 것은 출세를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뜻.
팽수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 비록 본선에서 많은 걸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실전에 강한 하북팽가가 아니던가? 틀림없이 모든 조직에서 나를 제일 먼저 원할 것이다.’
실제로 견습생을 뽑을 때 가장 인기 있는 출신이 하북팽가이기도 했다.
화산이나 종남 같은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여러 변수가 발생하는 실전에서는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평이 없지 않았기에.
‘이왕이면 맹내 최고조직인 적랑단이나 청랑단으로 가면 가장 좋겠는데…….’
하지만 그런 소소한 바람은 이어지는 비량의 말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 참고로 적랑단과 청랑단은 현재 임무에 파견된 관계로 이번에는 견습 무인을 뽑지 않는다.”
“아아…….”
몇몇 생도들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탄식한다.
반면 윤종승은 묘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너무 위험한 조직에서 견습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마침 전각 안에서 중년인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비량이 옆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인사드려라. 철심당의 철비대주님이시다.”
생도들이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건넸다.
철심당.
무림맹의 모든 병장기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기관이다.
일종의 대장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각종 신병이기까지 취급하거나 수집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특히 만년한철 같은 재료를 수집하거나, 강호 곳곳에 숨은 신병이기를 찾는 철비대는 모든 생도들이 소속되길 원하는 곳이기도 했다.
운이 좋다면 제법 좋은 무기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철비대에 소속되면 하다못해 비수 한 자루도 남다르다던데.’
‘철비대원들은 무기를 주문 제작한다던데.’
‘나만의 무기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일지도!’
생도들이 저마다 열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철비대주를 본다.
한편 남궁천은 철비대주를 보며 입매를 슬쩍 말아 올렸다.
‘저 애송이가 철비대주가 됐다고?’
철비대주 양규식.
처음에는 너무 늙어 버린 얼굴 때문에 몰라볼 뻔했다.
한데 코 옆에 찍힌 커다란 점 때문에 기억이 떠올랐다.
무공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빨랐던 녀석이다.
‘그땐 천라단 소속이었는데, 철비대로 옮겨갔던 건가?’
천라단이 펼친 천라지망을 뚫고 달아나던 중 맞닥뜨린 기억이 난다.
당시 양규식이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바람에 죽이진 않았다.
대신 다시 만나면 반드시 죽여 버린다고 윽박을 질렀더니 조직을 옮긴 모양이다.
‘말은 잘 들었네. 뭐,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하나 양규식이 남궁천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대신 그는 생도들을 훑더니 무심히 입을 열었다.
“운경이 누군가?”
“예, 접니다.”
운경이 한 걸음 나서자 다른 생도들이 부러움과 질투심이 뒤 섞인 눈초리로 바라본다.
철비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본 대는 저 아이를 데려가겠소.”
“알겠습니다. 운경은 대주님을 따라가거라.”
“예, 교관님.”
운경이 다가가자 철비대주가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다.
“어어? 끝입니까? 그냥 가시는 겁니까?”
팽수혁이 얼른 나서서 물었지만, 철비대주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벗어났다.
‘젠장! 도대체 뭐야?’
팽수혁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자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무연회 우승인 남궁천을 뽑지 않는다고?
설마 대살성의 피를 이어서 그런가?
힐끔 남궁천을 살폈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은 양규식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양규식에게 있어서 전생의 자신은 죽음의 사신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러니 그 자식인 남궁천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을 테지.
비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자, 다들 너무 낙심하지 말고. 다음은 약천당주님이 오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각 안쪽에서 허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이 걸어 나왔다.
다소 구부정한 허리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는 철비대주보다 훨씬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약천당이다!’
팽수혁이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 철비대가 안 되면 어떤가?
약천당도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철비대보다 훨씬 낫다.
무림맹이 제작하는 모든 영단은 바로 이 약천당에서 만든다.
특히 영초와 영물을 수집하는 조직인 추영단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기 힘든 곳.
게다가 약천당 소속 무인이 되면 기본적으로 영단 하나씩은 구비하고 다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대에 부푼 팽수혁이 강렬한 의지를 담은 눈빛으로 약천당주를 보았다.
‘여기 인재가 있습니다! 어서 뽑아……!’
“약천당에서 뽑아갈 인재가 없소.”
“……에?”
팽수혁은 물론 다른 생도들도 멍한 표정이 되어서 멀어져 가는 약천당주를 쳐다보았다.
“어어? 정말로 저렇게 가시는 겁니까?”
윤종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비량이 난감한 얼굴로 대꾸한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네.”
“뭡니까? 대체! 우리가 그렇게 형편없어 보인다는 겁니까?”
팽수혁이 잔뜩 성난 표정으로 씨근거리자, 비량이 애써 웃으며 달랬다.
“자자,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다음은 천우당에서 오셨다.”
천우당은 무림맹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금을 관리하는 곳인 만큼 감시가 그 어느 곳보다 살벌한 곳.
팽수혁은 다시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래, 철심당과 약천당이 아니면 어떤가?
천우당이야말로 무림맹의 자금을 꽉 쥐고 있는 안주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천우당 소속 무인은 방귀 냄새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지!’
한마디로 먹는 음식부터 값비싸단 뜻이다.
그만큼 자금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마침 단아한 학자풍의 중년인이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천우당주라…… 처음 보는 얼굴이군. 아무래도 맹주와 친분이 두텁겠지.’
뭘 하더라도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우선이다.
그런 만큼 그 늙은 구렁이가 천우당주부터 구워삶았을 터.
아니면 애초에 자기 사람을 천우당주로 앉혔거나.
저 노인네도 맹주처럼 겉보기에는 마냥 인자해 보이지만, 속내에는 시커먼 구렁이가 수십 마리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
일단은 경계 대상이다.
남궁천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천우당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소홍 생도를 데려가겠소.”
“알겠습니다. 소홍은 앞으로 나오너라.”
비량의 말에 진소홍이 대답하며 앞으로 나갔다.
팽수혁이 입술을 꾹 씹었다.
‘뭐, 소홍이 금왕의 딸이니까 이해할 만하지. 그다음은 나…….’
“이상이오.”
천우당주가 미련 없이 돌아선다.
그렇게 진소홍이 천우당주를 따라 자리를 떴다.
이번에도 선택을 받지 못한 팽수혁은 충격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 몸을 뽑지 않느냔 말이다!’
그 후로도 집객당주와 풍영당주가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왔고, 생도들을 훑어보더니 그냥 내려갔다.
물론 그때마다 남궁천도 그들의 면면을 세심히 살폈다.
‘아는 얼굴도 있고, 낯선 얼굴도 있고. 긴가민가한 얼굴도 있네.’
그렇게 수맹당과 정검당이 남았다.
수맹당주 철패강이 먼저 나섰다.
‘저 애꾸는 볼 때마다 괜히 미안해지는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철패강의 눈을 찌른 게 아마도 자신이리라.
철패강이 한쪽 눈을 부라리며 생도들을 훑는다.
그 와중에 팽수혁은 이번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 체격이라면 내가 꿇릴 게 없지!’
팽수혁이 다부진 표정으로 수맹당주를 응시했다.
무림맹을 지키는 수맹당!
‘수맹당 소속 무인은 무복이 때깔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지!’
맹의 수비를 담당하는 만큼 가장 멋진 제복을 갖춰 입는 곳이 바로 수맹당이다.
게다가 무한을 순찰하며 감시하기 때문에 무한의 양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뭐, 딱히 원하는 보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멋은 있으니까.’
팽수혁이 나름 스스로를 위안 하며 수맹당주의 지목을 기다렸다.
하나 이번에도 수맹당주 철패강은 팽수혁을 지목하지 않았다.
“백무극과 모용강을 데려가겠소.”
“하아…….”
팽수혁이 허탈감에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리는데, 옆에 있던 정검당주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그럼 유현을 비롯한 기타 등등은 정검당이 데려가겠소.”
뭐, 뭣? 기타 등등? 기타 등드으응?
팽수혁은 기가 찼다.
이름을 불러준 것도 아니고 기타 등등이라니! 무슨 떨거지 취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떨거지 취급을 한 건가?
게다가 왜 하필 정검당인가?
영약이 넘치는 곳도 아니고, 신병이기를 만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넘쳐나길 하나, 무복 때깔이 다르기라도 하나?
“맹에서 법을 집행할 때 병풍처럼 서 있는 역할만 하는 게 정검당 무인인데…….”
팽수혁이 혼잣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는데, 정검당주가 비량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지도 교관께서도 참여해줄 수 있겠소?”
“제가요?”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데려가는 만큼 통솔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
“으음. 알겠습니다. 그러죠.”
비량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정검당주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팽수혁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래서야 비량 교관을 데려가기 위해 우리를 들러리로 내세운 것 같잖아!’
자존심이 상할 일이지만 어쩌겠나?
애초에 생도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으니.
* * *
정검대주 계두식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행랑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주님!”
당주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가 한옆에 선 생도들과 비량을 힐끔 보더니, 이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집무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쳤다.
타앙!
“이번 임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정검당주는 또 시작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귀 안 먹었네. 조용히 말해도 잘 들려.”
“정말 왜 이러십니까?”
“뭐가 말인가?”
당주가 창밖의 먼 산을 본다.
계두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몰라서 묻습니까? 왜 그 중요한 임무에 저런 애송이들을 끌고 가야 한단 말입니까!”
계두식의 손가락이 남궁천을 비롯한 생도들에게 향했다.
당주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중요하니까 그만큼 인원 보충을 해준 게 아닌가? 지금 정검대 사개 조가 임무를 수행 중인 만큼 손이 부족할 테니까.”
“하! 인원 보충요?”
계두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생도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이맛살을 와락 구겼다.
“진짜 인원 보충을 하실 거면 제대로 된 무인을 충원하셔야지요! 이래서야 저보고 보모 역할이나 하란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이쯤 되자 듣고만 있던 팽수혁도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듣자 듣자 하니까 말씀이 심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보모라…….”
“닥쳐라!”
순간 계두식이 서슬 퍼런 기세로 외치자 팽수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두식이 정검당주를 향해 소리쳤다.
“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낭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오오, 지금 그거 명령 불복인가요? 견습 시작하자마자 흥미진진하네요!”
모두가 돌아본 곳에는 남궁천이 눈을 반짝이며 왠지 모를 응원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