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잠자리에 들었던 불명회주 흑선은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렴 너머로 기척이 느껴졌다.
정확히 창가 탁자에서.
‘누구……?’
감히 누가 불명회주의 침소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단 말인가?
흑선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말이지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유연하고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한데 침상 옆에 둔 검에 손이 닿기 직전!
“깼으면 이리 나와.”
“……!”
흑선이 흠칫거리고는 주렴 너머의 그림자를 보았다.
결국 그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그새 내 목소리도 잊었나?”
그제야 흑선은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입을 벌렸다.
“아…… 주군이십니까?”
“그래, 나다.”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 흑선이 주렴을 젖히고는 창가로 다가왔다.
과연 창가 탁자에는 남궁천이 앉아 있었다.
“여긴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너한테 연락하고 와야 하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됐고. 은신 좀 잘하고 제법 날랜 녀석 두 명만 추려봐.”
“언제까지 준비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언제까지 되겠어?”
“반 시진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감시 좀 붙일 녀석들이 있어서.”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현에서 광승회라는 걸 만든 녀석들이야. 두 놈이지. 지금은 우리 애들이 감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쪽 전문은 아니라서 말이지.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잖아?”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잘 감시하다가 특이사항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럼 수고.”
남궁천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에 홀로 남은 흑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따로 없군.’
* * *
무림맹 승천각.
펄럭, 펄럭! 펄럭!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깃발.
거친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정말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만 같다.
좌우의 커다란 깃발 사이에는 웅장한 크기의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승천각이라고 적혀 있다.
편액을 올려다본 남궁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작 견습생 담당하는 곳인데도 요란하게 만들었네.”
사실 승천각은 두 번째 방문이다.
일전에 무연회 본선 진출을 앞두고, 무림맹은 승천각 후원에서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땐 깜깜한 밤이었고, 지금 대낮에 바라보는 승천각은 또 다른 느낌이다.
짧은 감상을 끝낸 남궁천이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비교적 너른 연무장이 나타났다.
저만치 전각 앞에는 먼저 와 있던 생도들이 모여 있었다.
마침 제일 먼저 남궁천을 알아본 진소홍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남궁천! 여기야!”
그녀의 외침에 다른 생도들도 고개를 돌려 남궁천을 보았다.
모두 본선 팔 강에 올랐던 생도들이다.
전각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모용강은 팔짱을 낀 채로 코웃음을 치며 외면했고, 백무극은 여전히 예의 그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운경은 입매를 슬쩍 비틀기만 했다.
남궁천이 가까이 다가가니 유현이 먼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남궁 소협.”
“오랜만이오, 유현 도장.”
“좀 변하신 것 같군요.”
“유현 도장도 마찬가지요.”
적절한 덕담이 오간다.
그러면서도 유현은 남궁천의 변화를 빠르게 살폈다.
비단 체격만 달라진 게 아니다.
‘기도가 더욱 단단해졌구나. 역시 놀라운 사람이다.’
유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는 사이 팽수혁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왔냐?”
“그래.”
“오랜만이…… 닷!”
슈파앗!
창졸지간 팽수혁이 등에 멘 대도를 뽑아 들더니 그대로 내려찍는 게 아닌가?
쒸에에에엑!
느닷없는 기습에 지켜보던 생도들이 저마다 돌처럼 굳어서 입을 쩍 벌렸다.
꽈아아앙!
대도가 바닥을 찍어 버리자 육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균열이 뻗어나갔다.
쩌저적……!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입을 딱 벌린 윤종승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미친놈! 진짜로 기습을?’
한편 간발의 차이로 피한 남궁천이 그대로 칼등을 밟더니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파바바밧!
순식간에 도파까지 날아오른 남궁천이 발끝으로 팽수혁의 턱을 강하게 걷어찼다.
퍼억!
“크억!”
단말마 비명을 내지른 팽수혁이 휘청거리더니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멈춰 섰다.
연이어 바닥에 착지한 남궁천이 팽수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처맞고 싶은 거면 말로 해.”
“쳇! 방심한 틈을 노리다니.”
팽수혁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 윤종승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기습한 새끼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팽수혁은 예의 그 뻔뻔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적절한 반격이었다. 칭찬하지.”
황당한 태도였지만, 두 사람의 무공에 놀란 생도들은 그저 바닥에 생긴 균열에만 시선이 쏠렸다.
‘굉장하군. 그새 더 강해진 건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운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팽수혁과 비무를 치른 적이 있던 그로서는 조금 전의 일격이 얼마나 대단한 발전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자신도 휴관기 동안 놀지만은 않았다.
무연회를 통해서 부족한 점을 깨달은 후,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다.
한데 팽수혁은 그 정도가 아니다.
단순히 노력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뭔가가 있다.
뭐랄까?
마치 족집게처럼 부족한 부분을 콕콕 짚어서 보완해온 것 같달까?
‘비록 남궁천에게 턱을 얻어맞았지만…….’
그거야 남궁천이 워낙 괴물이라서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편 팽수혁보다는 남궁천에게 집중하는 생도도 있었다.
바로 백무극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극과 일극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와, 봤냐? 무극? 저 새끼가 대도를 피하고 저 멍청한 놈 턱주가리 걷어차는 거?’
‘봤어.’
‘느끼는 거 없냐?’
‘내가 안 맞았으니까 못 느껴.’
‘그게 아니라, 병신아! 저걸 보고도 깨닫는 게 없냐고!’
‘남궁천이 더 강해진 것 같다.’
‘그래! 저놈 그냥 더 강해진 게 아니라, 엄청나게 더 강해졌어! 저 새끼, 진짜 재미있는 놈이야. 안 그래?’
무극도 인정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도들이 저마다의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윤종승이 남궁천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하하…… 천아. 잘, 잘 지냈어?”
윤종승의 목소리를 들은 남궁천이 미간을 구기며 돌아섰다.
“너 이 새끼. 대가리를 굴려? 그렇게 먼저 가면 내가…… 음……?”
말을 꺼내던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만신창이가 된 윤종승의 얼굴을 살폈다.
“낯짝이 왜 그따위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널 팼던가?”
패긴 뭘 패! 인마!
윤종승이 황당한 마음을 가누고는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 사정이 좀 있었어.”
“어디서 이렇게 처맞고 다니는 거야?”
“일방적으로 맞은 건 아니고.”
“흐음. 처맞지 마라.”
“……!”
순간 뜻밖의 말을 들은 윤종승이 울컥하는 마음에 남궁천을 보았다.
그래도 동향 친구라고 이렇게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다.
‘내가 널 그리 괴롭혔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이 올라온 윤종승이 눈물까지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게. 앞으로는.”
“그래. 네가 어디 가서 처맞으면 왠지…….”
“……?”
“밥그릇을 뺏긴 기분이란 말이야.”
그쪽이었냐!
뺏기긴 뭘 뺏겨, 미친놈아!
목구멍까지 올라온 불만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마침 전각 안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나타났다.
“커흠!”
왠지 신경질적인 기침 소리에 생도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는 돌아섰다.
단상 위로 나타난 중년의 사내.
콧수염이 팔 자로 자라나 있었고, 깡마른 체구에 눈은 족제비처럼 찢어져 있었다.
“다들 왔느냐?”
“예.”
생도들의 대답에 사내가 그러잖아도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모두 여덟 명. 다 왔군. 나는 승천각주, 조순욱이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생도들이 인사를 건네자 조순욱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견습 무인이다. 앞으로 본 맹의 주요 기관에서 견습 과정을 거칠 것이다. 지금부터는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그러니 매사에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견습할 조직은 너희들의 능력과 특성에 따라 각기 달리 배정될 수도 있고, 동료와 함께 배정될 수도 있다. 하나 어디까지나 선택 권한은 너희가 아닌 각 조직의 수장이 정한다. 본 맹이 몇 당 몇 각인지 아는 녀석은 말해보아라.”
그러자 유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십당 이십이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조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모두 열 개의 당과 스물두 개의 각이 있다. 그 외에도 맹주전과 장로원 등이 있지만 너희들이 기웃거릴 일은 없을 거다.”
“조직 배정은 언제 합니까?”
팽수혁의 질문에 조순욱이 눈을 내리깔고 보다가 답했다.
“지금 바로 한다.”
“아, 예.”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고 너희들을 지도해 줄 교관이 나올 것이다. 다들 무사히 잘 적응하길 바란다.”
조순욱이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다른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를 확인한 용천관 생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
윤종승이 손가락으로 사내를 가리키고는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조순욱 대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비량이었기에.
“다들 안녕. 나는 비량이라고 한다. 앞으로 너희들을 지도할 교관이야.”
“어…… 왜 교관님이 우릴 지도해요?”
윤종승의 질문에 비량이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물었다.
“왜? 불만 있어?”
“그, 그건 아니고요. 원래 우리 반 담당이잖아요.”
“해가 바뀌었으니, 그 반 담당자는 다른 교관님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원래 승천각 지도 교관은 해마다 삼대 학관 교관들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되어 있단다.”
“아아…….”
비량의 친절한 설명에 윤종승도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남궁천은 그런 비량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비량…….’
그는 얼마 전 불명회주가 비량에 대해 보고하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름, 비량. 저희들이 알아본 바도 귀왕의 조사 내용과 거의 동일합니다. 딱히 더 밝혀진 내용이 없습니다. 맹에서 이자의 행적을 꽤나 기밀로 다루고 있더군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맹주의 측근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맹주와 거리를 두는 편이랄까요?”
불명회에서도 유일하게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인물.
다만 맹주와 뜻을 함께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지만.
어쨌든 공교롭긴 하지만 뭐, 삼대 학관 교관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하는 지도 교관이라니 이상할 게 없긴 하다.
‘오히려 가까이에서 지켜보기에 좋은 기회가 되려나?’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는 사이, 비량이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자아,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견습하게 될지 배정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