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드루와, 드루와!
윤종승의 꺾이지 않는 기세를 보니, 달려가려던 신입 생도들은 다시 주춤거렸다.
저 괴물 같은 놈은 도대체 뭔가?
작년까지만 해도 용천관 공식 호구라고 들었는데. 진짜 호구였던 게 맞긴 한가?
운이 좋아서 팔 강에 오른 녀석이라더니.
저게 정말 운이라고?
벌써 몇 명이나 때려눕힌 건가?
아무래도 윤종승의 소문은 과소평가 된 게 분명하리라.
신입 생도 하나가 소리쳤다.
“다들 쫄지 마라! 어차피 저놈은 지쳤다! 가자!”
그렇게 다시 우르르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너희들 거기서 뭐 하냐?”
“……!”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주문 무인들이 움찔거리고는 돌아섰다.
‘어느 틈에……!’
그들 중 누구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골목 입구에 석양을 등진 거구의 사내가 떡하니 서 있었다.
윤종승도 충분히 큰 체격이었는데, 이 사내는 훨씬 더 컸다.
각진 얼굴에 구릿빛 피부.
그를 알아본 윤종승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헤실헤실 웃었다.
“어…… 수혁이네. 헤헤헤.”
팽수혁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노을빛으로 물든 윤종승의 얼굴을 살폈다.
“넌…… 누구세요?”
“으씨. 나야, 나. 윤종승.”
“어? 아아, 오랜만이다. 종승. 뭔가 좀 변했구나.”
그제야 윤종승을 알아본 팽수혁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습게도 그는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열댓 명의 신입 생도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골목을 걷는 것처럼 거침이 없다.
정주문 출신의 신입 생도들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누구 하나 팽수혁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만큼 팽수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대단한 것이었기에.
팽수혁이 지나가는 길마다 바닷물이 갈라지듯 생도들이 비켜섰다.
그렇게 윤종승 앞까지 걸어간 팽수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넌 아직도 처맞고 다니냐?”
“야, 처맞긴 누가 처맞아? 내가 패고 있었구만.”
“네 얼굴이 전혀 설득력이 없어. 아무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힘내라.”
“으응? 가, 가냐?”
“왜?”
“아니, 뭐…… 심심하면 너도 같이 패자고.”
“안 심심한데?”
개 같은 놈.
상황 빤히 알면서!
팽수혁이 피식 웃었다.
“할 말 있으면 하고.”
“끄응.”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지켜보던 신입 생도 한 명이 불쑥 나서며 포권했다.
“팽수혁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희들은 정주문에서 온 신입 생도들입니다.”
“어, 그래. 반갑다.”
“이 일은 저희들끼리 문제니까 그냥 가주시길 바랍니다.”
“흐음.”
팽수혁이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우둑 꺾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예?”
“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놈이 제일 싫어. 자꾸 어떤 놈도 떠오르고. 그래서 꼭 반대로 행동하게 되거든.”
스르르르릉.
말을 마친 팽수혁이 등에 멘 대도를 뽑아 들었다.
일순 신입 생도들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반면 윤종승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와, 조질 뻔했네. 그냥 갈까 봐 쫄았는데. 이 새끼 성격이면 그냥 가고도 남았을 텐데.
저 신입 생도의 주둥이가 윤종승을 살려준 셈이었다. 팽수혁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다니.
윤종승이 찢어진 입매를 한껏 치켜 올렸다.
“헤헤…… 너희들은 이제 다 뒈졌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팽수혁이 대도를 휘두르며 도약했다.
“오랜만에 피가 끓는구나! 덤벼랏!”
파바밧!
“어어어? 막, 막아!”
“저 미친……!”
신입 생도들이 기겁하며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하나 팽수혁은 거구의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고도 유연했다.
쉬쉬이잇!
바람처럼 스쳐 간 팽수혁이 신명 나게 칼을 휘두른다.
쉬컥! 촤아악!
“크악!”
“으아악!”
여기저기에서 마구 비명이 치솟는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야차가 기어 올라와 칼춤을 추는 것만 같다.
대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핏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팽수혁의 칼은 매우 예리하지만, 장기를 상하게 할 만큼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간 정말 죽을 게 분명하리라.
그야말로 피부만 얕게 베고 지나가서 핏줄기만 팍팍 터져 나올 뿐, 중상을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칠고 패도적인 것은 분명하다.
대도가 스쳐 간 담벼락에는 깊은 상흔이 남았고, 심지어 일부 담벼락은 무참히 깨져 나갔다.
살기에 가까운 투기는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
“으라찻차! 뭘 그렇게 멀뚱거리는 거냐! 덤비란 말이다! 이 애송이 새끼들아!”
“끄악!”
“아아악!”
끊이지 않는 비명.
윤종승에게 달려들려던 신입 생도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저…… 미친놈……!’
신입 생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입을 딱 벌리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
‘니미럴, 잘못 걸렸어!’
저건 인간이 아니다.
하북팽가의 팽수혁.
윤종승과 마찬가지로 작년 무연회에서 팔 강까지 오른 인물.
아니, 근데 왜 팔 강까지밖에 못 간 거야?
저 실력으로 우승을 못했다고?
그렇다면 우승한 남궁천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한편 윤종승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팽수혁을 보면서 내심 혀를 찼다.
‘쳇, 또 더 강해졌네.’
휴관기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다고 자부했다.
그 결과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괄목상대 수준이었다.
한데…….
‘저놈은 더하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팽수혁도 작년에는 남궁천과 함께 다녔으니까.
남궁천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분명 휴관기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남궁천은 그런 존재다.
옆에 있으면 자꾸만 자극을 주는 존재.
뭔가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
자신을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어서 더욱 분발하게 만드는 존재.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 흔한 강요나 설득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족한 걸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남궁천이다.
윤종승의 생각은 정확했다.
팽수혁은 신명 나게 칼춤을 추면서 역시 남궁천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놈 말대로 수련 방식을 조금 바꿨더니 확실히 다르군.’
예전에는 패도적인 무공에만 집착을 했다.
강한 힘과 막강한 파괴력만 생각했다.
하나 빠른 것이 가볍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나니까 세상이 훨씬 넓어지고 가능성은 많아졌다.
그 작은 깨달음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빠르지만 무겁다.
촤촤아아악!
무겁지만 유연하다.
쉬쉬쉬쉬이익!
유연하지만 강직하다!
쩌까아아앙!
“크으윽!”
하늘에서 일도가 수직으로 떨어지자, 검 한 자루가 그대로 두 동강 나면서 바닥에 처박혔다.
“어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신입 생도.
그가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털썩 찧었다.
“흐이이익! 살, 살려주세요!”
비명처럼 소리친 신입 생도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닌가?
그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팽수혁이 혀를 찼다.
팽수혁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겨지는 전장의 기운은 평범한 무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북팽가 특유의 실전형 무공인 것이 한몫했을 것이고, 또 남궁천을 바로 옆에서 보고 닮아간 것도 원인이리라.
한 명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주변의 다른 무인들도 하나둘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나이 많은 신입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 새끼들아! 돌아와! 쪽팔리지도 않냐!”
“어이.”
“……?”
“뒈지는 것보다 좀 쪽팔리는 게 낫지 않아?”
“치잇!”
혀를 찬 신입이 콧잔등을 씰룩이더니 일순간 기합성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그냥은 못 간다! 받아라아아앗!”
파바바밧!
“호오, 제법?”
신입이 현란한 신법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팽수혁이 대도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데,
“으응?”
순간 신입이 바람처럼 곁을 지나치는 게 아닌가?
슬쩍 돌아보니 신입이 그대로 윤종승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내 목표는 오로지 네놈이다! 팽가 놈은 애초에 계획에 없었고, 소문주님과 상관도 없지!’
타닷!
마침내 몸을 날린 신입이 내공을 잔뜩 끌어 올리며 검에 무게를 실었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기세.
죽기야 하겠냐는 심정으로 휘두르는 검이지만, 죽어도 상관은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학관은 다니기도 전에 짤리겠지만, 장차 문주가 될 송원교가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지 않겠나?
“이여어어업!”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린 그가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쑤아아아앙!
찰나지간, 윤종승이 오른발을 뒤로 빼더니 왼손을 올리면서 검신을 막아냈다.
쩌어어어어어엉!
토시와 부딪친 검신에서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와 동시에 공력을 흡수한 토시!
윤종승은 단전에서 끌어 올린 공력과 몸으로 받아들인 공력을 더해 수태양소장경을 따라 재빠르게 운기했다.
쉬이이이잇!
충격을 흡수하면서 공력의 흐름에 변화를 주는 훈련은 이미 작년 무연회 비무 때부터 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바로 남궁천이 가르쳐준 대로!
‘완전한 연꽃을!’
마침내 빛살처럼 뻗어나간 윤종승의 일장이 상대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팍!
“…….”
“……?”
신입 생도가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신이 막히고 일장이 날아들 때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생각보다 약하지 않나?
마치 아이가 주먹으로 복부를 툭 친 것만 같다.
그런데…….
“……!”
퍼어어어엉!
순간 등짝의 장삼이 터져 나가면서 신입 생도가 허공을 붕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쿠당탕탕!
그대로 바닥을 구른 신입 생도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뿜는 윤종승.
“호오?”
턱을 매만지며 감탄하는 팽수혁.
그가 씨익 웃으며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제법 사람 구실을 하게 됐구나.”
“윽. 칭찬이 뭔 그따위야?”
윤종승의 말을 뒤로한 채 팽수혁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쓰러진 신입 생도의 등짝을 보았다.
붉은 연꽃이 등짝 복판에 선명하게 찍혔다.
“너…… 원래 연꽃이 배에 찍히지 않았냐?”
“혁련장은 성취도가 높아질수록 반대편에 생기거든.”
“오오!”
팽수혁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탄성을 터뜨리더니 윤종승에게 걸어와서 볼을 꼬집었다.
“녀석, 특급칭찬이다.”
팽수혁이 윤종승의 볼을 마구 흔들어대자, 윤종승이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아아악! 놔! 멍들었다고!”
“하하하! 휴관기 동안 열심히 수련한 모양이구나.”
“너야말로 장난 아니던데?”
“뭐, 그랬나? 하지만 그 녀석은 어떨지. 이제 좀 비벼볼 만하려나?”
“글쎄. 나도 최근엔 본 적이 없어서.”
“어째서? 너희들 같은 동네 아니었냐?”
“남궁천이 폐관수련에 들어갔거든.”
“그 녀석이 폐관수련을? 흐음.”
팽수혁의 전신에서 모종의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윤종승이 기겁을 했다.
‘어째서 동료를 생각하면서 살기를 피우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팽수혁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놈을 보고 기습을 펼쳐보면 대충 각이 나오겠지.”
“기습이라니?”
“원수를 죽이려면 역시 기습이 최고지.”
“진심이냐?”
“그래. 실전은 언제나 냉정한 법.”
이 새끼, 진심이네.
윤종승이 내심 혀를 내두르는 사이, 팽수혁은 대도를 갈무리하면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 * *
“엣취!”
재채기를 한 남궁천이 코를 훌쩍이고는 귀를 팠다.
“누가 또 내 칭찬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