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드루와, 드루와!
“그러니까 네가 거길 왜 따라가냐고.”
남궁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자, 손우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한다.
“그야…… 저희들은 소가주님을 모시는 창응대니까요.”
“됐어. 내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혼자 갈 테니 그만 돌아가라.”
“안 됩니다.”
“뭐? 명령 불복이냐?”
“가규(家規)입니다.”
“가규……?”
“예.”
손우곤이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차무진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더니 넌지시 물어본다.
“저어…… 설마 모르고 계셨던 건 아니죠? 소가주가 되시면 창응대가 그림자처럼 따라야 합니다. 주군이 어디를 가시든지요.”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은 없는 거야?”
“가규니까 저희한테 따지신다고 해도…….”
차무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하자, 남궁천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아, 젠장. 이거 혹 달았는데?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남궁천이 결심을 굳힌 듯 돌아섰다.
“알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던가.”
“……예?”
“그럼 간다!”
후우우우웅!
순간 한 줄기 광풍이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앞에 서 있던 남궁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 대주님……! 저기!”
차무진이 가리킨 곳에는 기다란 먼지 줄기를 이끌며 달려가는 남궁천이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손우곤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쫓, 쫓아라!”
“존명!”
순간 허공에서 외침이 들리더니 짙푸른 무복을 입은 창응대가 시커멓게 무리 지으며 달려갔다.
그렇게 한 차례 태풍이 휩쓴 것만 같은 언덕 위.
호화스러운 마차와 홀로 남은 시종이 멍하니 선 채로 금붕어처럼 두 눈을 끔뻑였다.
“에…… 저…… 저는 그럼…….”
어쩔 줄을 모르고 선 시종 어깨에 길 잃은 산새 한 마리가 내려앉더니 오줌을 찍 뿌리고 떠났다.
* * *
허름한 반장.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곳에 주인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 문이 열리더니 땀으로 흠뻑 젖은 청년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노인이 잠을 쫓아내며 일어나서는 물과 수저를 챙겨주었다.
청년은 바로 남궁천이었다.
“후우. 국수 한 그릇 주시오.”
“예. 금방 준비해 드리겠소.”
노인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남궁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아으, 끈질긴 놈들. 이쯤하면 됐겠지. 그나저나 그놈들 밥 사 먹으라고 돈이라도 던져줄 걸 그랬나?”
물을 한 잔 들이켜던 남궁천이 무심히 옆을 돌아보다가 그대로 물을 뿜어 버렸다.
“푸우우웁!”
“헉, 헉, 헉……! 우웁……! 헉……!”
헛구역질까지 하면서 연신 숨을 몰아쉬는 사내. 그는 바로 창응대주 손우곤이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로 말했다.
“주, 주군…… 헉, 헉. 저희들도…… 국수로 통일하겠습니다. 우웁. 헉, 헉…….”
“아…… 이 찰거머리 녀석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달라붙는 거야?”
“말, 말씀드렸잖아요. 헉, 헉. 가규라고…….”
“미치겠군. 만약 내가 너희들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데?”
“창응대가 해체되고 다시 꾸려질 겁니다.”
“허어.”
남궁천이 입을 딱 벌리고 손우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제대로 혹 달았다.
한평생 떠돌아다니던 남궁천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특히나 누군가 졸졸 따라다니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남궁천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또 다른 창응대가 꾸려지도록 놔둘 수도 없고.
결국 남궁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신 너희들,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마. 철저하게 은신해라.”
“알겠습니다!”
그제야 손우곤도 조금 밝은 표정이 되어 당차게 대답했다.
* * *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강호의 중심인 무한이야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날이 풀리면서 유동인구는 더욱 많아졌다.
거기에 무한의 삼대 학관이 개관하면서 신입 생도들까지 모여들어 거리는 더욱 활기를 띄었다.
물론, 이는 해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다만, 올해는 조금 다른 현상이 있었는데, 생도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그러했다.
예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입에서는 무맹관이나 정협관 생도에 관한 이야기만 오르내렸다.
한데 올해는 십중팔구 용천관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작년 무연회 우승자인 남궁천이 가장 인기였다.
또 늘 한산했던 용천관 주변의 저잣거리가 올해만큼은 신입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도들로 북적이는 곳.
마침 올해 용천관에 입관하게 될 신입 생도 세 명은 사 층짜리 전각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 여기가……!”
“그 유명한 귀왕객잔이군요! 꼭 와보고 싶던 곳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독특한 설정과 요리 수준이 일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원래 작은 반장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장사가 잘 되면서 사 층짜리 객잔으로 확장했다더군요.”
“아아, 그래서 이렇게 건물이 깔끔했군요.”
“예. 여기까지 오는 데 고작 석 달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와아, 정말 대단합니다.”
신입 생도들이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사실 귀왕반장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불명회의 영향이 꽤 컸다.
무림맹 요직에도 뿌려진 불명회원들이 앞장서서 귀왕반장을 홍보한 것이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인물들조차 귀왕반장을 추켜세우니, 그러잖아도 독특한 설정으로 이목을 끌던 반장이 석 달 만에 엄청난 급성장을 이룬 것이다.
“자자, 들어가지요. 여기 음식이 그렇게 끝내준답니다.”
“종류가 그리 많진 않다더군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저는 무한까지 먼 길을 왔더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면 돌도 씹어 먹겠어요.”
“하하. 들어갑시다.”
세 사람은 용천관 인근에 자리 잡는 바람에 용천관의 상징이 되기도 한 귀왕객잔으로 성큼 들어섰다.
과연 객잔 내부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저기에서 음식과 그릇을 나르는 귀소이들이 보인다.
하나 같이 흉흉한 외모에 퉁명스러운 말투와 행동.
세 사람이 출입구로 들어선 걸 보고서도 본체만체한다.
마침 빈 그릇을 들고 지나가던 귀소이가 세 사람과 부딪칠 뻔하자, 눈알을 부라렸다.
“이런 썅! 뭐야? 이거! 걸리적거리지 말고 들어왔으면 빨리 빈자리 찾아서 앉아야 할 것 아냐!”
“아…… 죄, 죄송합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점소이를 상대로 존댓말이 나간 세 사람.
귀소이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세 사람은 오금이 저려 오는 걸 느꼈다.
귀소이가 지나가고 나서야 한 명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 참…… 어째 설정이 아니라 진짜 같네요.”
“뭐, 그래서 더 유명한 것 아닐까요?”
“자자, 우리도 이러지 말고 어서 앉지요. 이 층에는 자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이 이 층으로 올라가자 다행히 난간 쪽으로 탁자 두 개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들이 반색하며 얼른 한쪽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들은 원래 서로를 몰랐는데, 용천관에 입관하기 위해 먼 길을 오던 중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사이였다.
세 사람이 용천관에 대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귀소이가 올라와서 주문을 받았다.
“애송이들, 신입 생도인가?”
“예? 아, 예. 그렇습니다만.”
신입 생도 하나가 애써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건 설정일 뿐.
이런 사사로운 일로 발끈하면 대협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거지.
귀소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뭘 처먹을 거냐?”
“음…… 저는 동파육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동파육 두 접시와 두강주 한 병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동파육 두 접시와 동파육 한 병 주시오.”
그러자 귀소이가 눈알을 부라린다.
“뭐어?”
“왜…… 그러시는지……? 뭐가 잘못된 걸까요?”
다시 저절로 존댓말이 나온다.
정말이지 인상이 너무 사납다.
귀소이가 버럭 소리친다.
“신입 생도지? 새파랗게 어린 새끼들이 뭔 대낮부터 낮술을 처먹어? 그냥 국수나 처먹어라. 국수 세 그릇!”
귀소이가 제멋대로 단정 짓더니 휙 돌아서 내려가 버린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세 명의 신입 생도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허참…….”
“예상은 했지만 훨씬 재미있는 곳이군요. 적응은 좀 안 되네요. 하하.”
“그러게요.”
세 사람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때 마침 계단에서 조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아…….”
마침 신입 생도 중 한 명이 이제 막 이 층으로 올라선 무리를 보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두 명의 신입 생도 그의 눈길을 쫓았다가 입을 딱 벌렸다.
아름답다. 매혹적이다.
티 없이 맑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화사한 무복.
그녀는 바로 백리향이었다.
그녀와 함께 올라온 이는 다름 아닌 송원교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생도들이었다.
그들은 난간 쪽에 남은 자리에 착석하더니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입 생도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예전에는 여기가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지금은 이렇게 북적거리는데.”
“그렇죠. 이게 다 남궁천 선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하.”
신입 생도의 말에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송원교가 흠칫거리고는 귀를 기울였다.
신입 생도들이 계속해서 남궁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맞습니다. 작년에 남궁천 선배가 무연회 우승을 하면서 용천관의 명성을 드높였으니까요.”
“그렇죠. 사실 저는 용천관에 입관하게 된 게 오히려 자랑스럽더라고요.”
“앞으로는 용천관의 입지가 더욱 올라갈 겁니다. 우리는 운이 좋은 겁니다. 용천관이 점점 유명해지면 무맹관처럼 시험을 쳐서 합격하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크으. 용천관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다니. 정말 저는 남궁천 선배가 너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입관하면 남궁천 선배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마 힘들겠죠? 남궁천 선배가 무연회 우승자니까 곧장 무림맹 견습 무인으로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럼 어렵겠네요. 남궁천 선배는 정말 제겐 영웅이나 다름없는데.”
신입 생도들이 하나같이 남궁천을 찬양해 대자,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송원교가 젓가락을 콱 움켜쥐었다.
마침내 젓가락이 뚝 부러지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 거기 신입생들.”
까칠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송원교의 입에서 튀어나갔다.
한껏 들떠서 떠들던 신입 생도들이 힐끔 돌아보았다.
송원교가 목을 한 차례 우두둑 꺾고는 물었다.
“올해 용천관에 입관할 생도들이라고?”
“예, 그렇습니다만…….”
“너희들은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안 하나?”
“예? 누구신지……?”
그러자 옆에 앉은 백리향이 차갑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남궁천을 한때 발아래에 두셨던 분이야.”
“아암. 그렇지. 사실 남궁천을 키운 건 송 대협이라고 할 수 있지.”
송원교를 졸개처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생도가 말을 붙이자, 신입 생도들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중 한 명이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정주문의 송원교 선배님……?”
“그래, 정주문 소문주 송원교. 그게 나다.”
그러자 세 명의 신입 생도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선배님을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하나 송원교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지은 그가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강호엔 이런 격언이 있지.”
“……?”
“말 한마디에 목숨을 갚고, 잘못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
“그게 바로 강호다. 꿇어.”
“……예?”
“말귀 못 알아 처먹지? 잘못을 하면 대가를 치른다고 방금 말해주지 않았나? 죄송하단 말 한마디로 넘어갈 줄 알았나? 선배도 알아보지 못해서 인사도 할 줄 모르는 너희들이 용천관에서 뭘 배우겠다는 거냐? 꿇어!”
송원교가 버럭 소리치자 세 명의 신입생이 움찔거린다.
그중 한 명이 용기내어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이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
쉬이이익, 퍼억!
“끄읍! 크웨엑!”
눈 깜박할 사이에 날아든 검집이 그대로 명치를 가격하자, 신입 생도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구역질을 해댔다.
송원교가 쓰러진 신입 생도를 보며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기본도 안 된 새끼들을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