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34화 (134/508)

134. 허황된 생각이 용을 잡는다

우우우웅.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궁천의 주위로 훈풍이 퍼져 나간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떠올라 유유히 넘실거린다. 마치 초봄의 아지랑이처럼.

목욕을 하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남궁천은 정말이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환골탈태라도 한 것처럼 앳된 모습은 상당히 벗겨지고, 이제 어엿한 청년의 모습으로 체격도 더욱 탄탄해져 있었다.

어느 순간 남궁천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훈풍도 멈추고 남궁천의 머리카락이 차분해졌다.

다음 순간,

파바밧!

남궁천이 바위에서 날아올랐다.

쉬쉬쉬쉭! 슉슉!

벽라검이 공간을 가르고, 세상을 찌른다.

어쩔 때는 묵직한 기운이 황산을 가를 기세로 떨어져 내렸고, 또 어느 때는 황산의 바람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검로는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웠는데,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이 연상되는가 하면, 깎아지른 절벽이 떠오르고 험난한 암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즉, 중검과 쾌검이 고루 조화를 이루어 마치 검으로 황산을 그려내는 느낌이었다.

허초는 연무가 되고, 변초는 굽이치는 계곡이 되며, 진초는 깎아지른 절벽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니 검봉은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르고, 그 너머에는 창공과 벽해가 펼쳐진다.

남궁천은 푸른 산이 되었다가, 푸른 하늘이 되었다가, 푸른 바다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 검은 곧 남궁천이요, 남궁천은 곧 세상이다.

천지인이 조화를 이루니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지금 후원에서 펼쳐지는 남궁천의 검무를 누군가 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우리라.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모두 담은 것만 같은 무공.

쾌검에 치우치지도 않고, 중검에 무게를 두지도 않는다.

그저 그때그때 변한다.

부드러운 바람이 일순 돌풍이 되듯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친 풍파가 고개를 넘어가면서 산들바람으로 잠잠해지기도 한다.

언덕에 만개한 꽃처럼 예뻐 보이는 검초가 있는가 하면, 절벽 끝에 파고든 소나무 뿌리처럼 위태로운 검로도 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암벽처럼 웅장하며, 기암괴석처럼 압도적인 검초도 튀어나온다.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결코 가볍지가 않다.

참으로 묘한 무공이다.

남궁세가의 검법 같지가 않은데, 또다시 보면 남궁세가의 검법과 몹시 닮았다.

마침내 남궁천이 현란한 검무를 마무리 지었다.

파바밧, 쉬이이잇!

곧게 내질러진 검봉이 처음 앉아 있던 바위의 표면에 맞닿았다.

툭.

가볍게 검봉으로 바위를 찌른 남궁천.

스으읏.

기운이 갈무리되면서 남궁천이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철컥.

벽라검이 검집에 꽂히는 순간,

쩌적……!

바위 표면에 푸른 빛줄기가 거미줄처럼 마구 그어지더니 일순 피부가 벗겨지듯 얇게 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퍼카앙!

마치 바위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처럼 얇은 표면만 깨져 나갔다.

후드득.

파편이 떨어지자 바위 알맹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나쁘지 않네.”

확실히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진 않다.

그래도 좋다.

아직 이뤄갈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으니까.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고는 돌아서는데, 마침 후원으로 복성이 들어섰다.

“엇, 소가주님. 역시 여기 계셨군요.”

“응, 수련 좀 하느라.”

“지금껏 폐관수련하고 나오셔서 또 수련입니까요? 내일 바로 먼 길 떠나야 하면서. 좀 쉬시지.”

“맑은 공기 마시면서 해보고 싶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냐?”

“아! 가주님이 찾으십니다요.”

“가주님이?”

“예, 가주전 후원으로 모시고 오라는뎁쇼?”

“후원으로?”

“예.”

“알았다. 앞장서라.”

“예, 그럼.”

복성이 몸을 돌렸다.

* * *

가주전 후원에는 남궁검과 남궁화가 정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니 차라도 한잔하자고 부르신 걸까?

남궁천이 정자 아래에 서서 포권했다.

“부르셨습니까?”

남궁검이 무감한 시선을 던져왔고, 남궁화는 반색하며 미소 지었다.

“천아,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키도 훌쩍 자랐네.”

“예…… 뭐.”

남궁천은 사실상 처제에게 이런 칭찬을 들으니 왠지 어색한 기분에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남궁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 성과는 있었더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발전은 있었습니다.”

“그래? 가져갔던 비급서는?”

“이미 모두 암기했기에 창궁서고에 반납했습니다.”

“이해가 되더냐?”

“아직 완전하지 않으나 소기의 성과는 있었지요.”

“좋다. 어디 한 번 보자꾸나.”

말을 마친 남궁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천과 남궁화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가주님?”

두 사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남궁검이 정자를 내려오며 말했다.

“검을 뽑아라. 내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아…….”

남궁천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남궁검이 어느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서서 준엄한 표정으로 일렀다.

“너는 이제 소가주다. 가주로서 소가주의 무공을 파악하고 조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 검을 뽑아라.”

“대련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

남궁천과 남궁화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특히 남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두 눈을 부릅뜨고는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와 천이가 대련이라니…….’

아버지는 좀처럼 대련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 이유는 하나.

성에 차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래전 언니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는 자주 대련을 하셨다.

하나 언니가 죽은 후로는 그 누구와도 대련을 하지 않으셨다.

남궁화로서는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타고난 천재로 불리던 언니.

그 언니와 대련할 때 아버지 표정은 늘 행복해 보였으니까.

하나 언니가 죽은 후 아버지는 누구와 대련을 하든 늘 아쉬움과 진득한 그리움을 숨기지 못하셨다.

그 누구도 언니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렇게 아버지는 대련을 그만두셨다.

생사결이 아니고서야 굳이 비무조차 하지 않으셨다.

한데…….

‘아버지가 먼저 대련을 제안하다니.’

설레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 걱정도 앞선다.

과연 남궁천이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혹여나 더욱 실망만 안 겨드리진 않을까?

또 남궁천은 아버지의 매서운 검을 받아낼 수 있을까?

무연회에서 본 남궁천은 확실히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들.

하나 아버지는 강호에서도 인정하는 고수.

‘천아. 보여주렴. 너의 진짜 강인함을!’

남궁화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한편 남궁검은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면서 남궁천을 묵묵히 살폈다.

‘많고 많은 책 중에서 굳이 창벽공이라니. 나를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내 결정에 후회가 없도록.’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만큼 남궁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이젠 그 가능성을 조금 더 확실하게 증명해야 할 순간.

스르릉.

마침내 남궁천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영광으로 알고.”

남궁천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네.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전, 남궁천은 이미 남궁검과 손을 섞은 적이 있었다.

무림맹으로부터 쫓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남궁검은 남궁천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는 말했다.

“너는 대살성이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서던 남궁검의 모습.

분명 여느 명가의 태도와는 달랐다.

그때부터 남궁세가를 달리 보았다.

한데 수십 년 만에 다시 검을 맞대게 될 줄이야.

물론 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결코 대충할 생각은 없다.

오랜만에 주어진 기회인 만큼 진심을 다하리라.

“가겠습니다.”

파앗!

순간 남궁천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장 검을 직선으로 내질렀다.

쉬이이잇!

화살 두 자루가 허공에서 부딪칠 것만 같다.

하나 검봉이 맞닿으려는 순간,

치잉!

남궁천의 검이 살짝 비틀리더니 남궁검의 검신을 쓸면서 지나간다. 불꽃이 일어나면서 호수(護手)에 부딪친 검신이 튕겨 나간다.

티잉!

‘늦군.’

남궁검이 무심한 감상을 떠올리며 검로를 꺾었다.

“아…….”

지켜보던 남궁화가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검법.

한데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는 게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검로를 구사하시지 않는가?

단단한 내공이 뒷받침이 되는 것과 동시에 숱한 수련과 실전을 통해서 익힌 움직임이리라.

그래도 일 합은 받은 건가?

한데…….

‘엇?’

타앙!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던 검첨이 남궁천이 들고 있는 검집에 막혀 튕겼다.

‘검집으로?’

남궁검도 조금은 놀란 것인지 눈을 부릅떴다.

곧이어 남궁천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했다.

쉬이이잇!

남궁검의 눈빛에 당혹감이 살짝 피어올랐다.

‘이게…… 본 가의 무공?’

생각을 마저 이어가기도 전에 묵직한 충격이 검신을 타고 전해진다.

꽝!

츠츠으읏!

남궁검이 반사적으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내가…… 밀렸다?’

하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파바밧!

남궁천이 무한보를 펼치며 바짝 따라붙는다.

쒜에에엑!

대련이라고 하기에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매서운 검격이 날아든다.

지켜보던 남궁화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흡.”

쉬이잇, 쩌엉!

짙푸른 검기가 터져 나오면서 거센 태풍처럼 검신이 휘몰아쳤다.

따당! 땅땅!

거칠다.

빠르다.

거세다.

거기에 난잡하기까지.

하나 무질서해 보이는 검격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규칙의 빈틈을 노리고 검을 뻗으면 어김없이 허초나 변초다.

카아앙!

마침내 다시 맞댄 두 자루의 검신!

하나 남궁천이 기운을 슬쩍 비틀어서 흘려내자, 벽라검이 검신을 타고 미끄러진다.

키이이이잉!

다시 불꽃이 줄지어 일어나면서 남궁검의 심장을 향해 쇄도한다.

‘어찌 이리 패도적인……!’

남궁검이 발끝으로 땅을 툭 찍어 차며 물러나자, 이미 예측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남궁천이 바짝 따라붙는다.

쒸에에엑!

꿀꺽!

남궁검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이었다.

때론 허황된 꿈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일러줄 참이었다.

삼 개월간 성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단 한 번의 대련으로 깨닫는 게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줄 생각이었다.

한데…… 한데…….

‘대체 이 검법은 무엇인가?’

푸른 기운이 남궁천의 전신을 에워싸며 시시때때로 그 성질을 바꾸고 있다.

패도적이면서도 유연하고, 다채로우면서도 강직하다.

타타타타타탕!

이번엔 쾌검!

두 자루의 검신이 마구 부딪치자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지켜보던 남궁화가 입을 딱 벌린 채 움직일 생각도 못 했다.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본 가에…… 저런 무공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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