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허황된 생각이 용을 잡는다
‘창(蒼)’ 자가 들어간 걸로 봐서는 남궁세가 무공이 분명해 보인다.
왠지 푸른색이라면 환장을 하는 남궁세가니까 말이지.
한데 창벽신공? 창벽검?
이건 처음 들어본다.
푸르고 푸르다는 건가?
아주 짙푸른 무공이군.
‘어디 한 번 볼까?’
남궁천이 바람을 훅 불자 표지에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어우야, 종이 찢어질까 봐 손으로 털지도 못하겠네.”
조심조심 책장을 열어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어찌나 오래된 서적인지 일부 번진 글씨도 보이고, 군데군데 지워진 글자도 있다.
어찌어찌 유추해서 읽고 있자니 도통 알아보지 못할 글씨도 있다. 아니, 글씨가 제대로 보이는 부분도 쉬이 납득 되지 않는다.
이건 신선한 경험이다.
인체를 해부하듯, 공력의 흐름을 눈으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남궁천은 어지간한 무공서를 독학으로 꿸 수 있었다.
한데 읽어도 모를 글이라니.
담긴 뜻이 너무 심오하거나, 설명이 불친절하거나.
한데 이건 어째 불친절에 가까워 보인다. 아니, 둘 다인가?
아무튼 하나는 분명하다.
이 서책을 쓴 자는 이 무공을 누군가 쉽게 익히는 걸 거부했다는 것.
마치 읽어보고 네가 이해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익혀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오기가 생겨서라도 익혀봐야 하지 않겠나?
“호오, 제법 그럴싸한데.”
남궁천은 빠르게 종이를 넘겨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한 채로 읽었을까?
한 장 한 장에 쓰인 글씨가 워낙 빼곡했기 때문에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말들 때문에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어려워도 역시 나라면 충분히 이해…… 하기는 개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잖아!’
남궁천이 책장을 덮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열받아! 도대체 이게 뭔 말이야! 어차피 볼 사람은 가문 후손밖에 없으면서 왜 이렇게 어렵게 꼬아놓고 난리야!”
분노에 찬 괴성을 터뜨렸더니 사방으로 먼지가 비산한다.
머리를 벅벅 긁은 남궁천이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서책을 펼쳐 들었다.
“어디 보자…… 창공과 벽해는 맞닿아 있으니 기의 흐름은 천지를 아울러야 하며, 그 푸르름이 중심에서 경계를 무너뜨려 순환의 예기로 다스릴 때…… 창벽은 강산의 능선을…… 정기신의 조화로…… 젠장, 젠장.”
역시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잖아도 어려운 말인데, 군데군데 글씨가 지워지거나 번져 있으니 더 못 알아먹겠다.
‘이거…… 익히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겠는데?’
하루 이틀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 달? 두 달?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정말 열받지만…… 왠지 가슴이 뛰는군.’
짜증이 나면서도 이해 못 할 무공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 흥분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세상 모든 무공이 남궁천에게는 시시할 뿐이었으니까.
안 익힌 무공은 있어도, 못 익힐 무공은 없는 남궁천이었다.
한데 눈앞에 보고도 못 익힐 무공이 나타났다.
물론 제대로 봤다곤 할 수 없지만.
모르긴 해도 언뜻언뜻 이해되는 부분으로 보아서는 보통 무공서가 아니다.
이 귀한 걸 이딴 식으로 관리해두다니.
새삼 한숨이 새어 나오는데, 갑자기 옆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오는 게 아닌가?
“무얼 그리 고민하느냐?”
“어우씨! 깜짝이야!”
팟!
반사적으로 물러난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일장을 내질렀다.
퍼억!
후두두둑!
장력이 막히면서 기파가 터지자 주변 책장에 꽂힌 서책들이 우르르 떨어진다.
뒤늦게 남궁천은 자신의 장력을 막아낸 사람을 알아보았다.
“영…… 영감?”
“뭐라?”
어느새 들어온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자, 남궁천이 움찔거리고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 가주님 오셨습니까?”
“그보다 조금 전에 내가 들은…….”
“잘못 들으신 겁니다.”
남궁천이 딱 잘라 말하자, 남궁검이 미간을 좁힌다.
잠시 남궁천을 바라보던 그가 손날을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법 손이 맵구나.”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어디 평생 숨어 다닌 사람처럼 놀라더구나.”
뭐…… 그건 사실인데요.
남궁천은 속에서 떠오른 말을 삼키고는 차분히 답했다.
“기척이 없으셔서…….”
“일부러 헛기침까지 하며 들어왔다만.”
“아…… 제가 집중을 하느라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무인이란 가장 안전한 곳에서도 항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하는 법.”
암요. 누구보다 잘 알지요.
그런데 평생을 그리 살았으니 이젠 좀 긴장 풀고 살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내뱉진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서고엔 무슨 일로…….”
남궁검이 정말 모르냐는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눌러앉아 살 것이냐?”
“아…… 제가 좀 오래 있었죠? 곧 나가겠습니다. 슬슬 배도 고프군요.”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아느냐?”
“얼마나…… 머물렀는데요?”
“칠주야가 흘렀다.”
“예에엑?”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배가 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칠 일이나 지났다니?
물론 도망자 시절에는 열흘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틴 적이 있었다.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공을 운기해서 수분 증발을 막는 게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생리 욕구마저 철저하게 통제하는 게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며칠씩 잠을 안 자거나, 밥을 먹지 않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도 모르게 칠주야씩이나 서고에 처박혀 있었을 줄이야.
남궁천이 황당한 얼굴로 손에 들린 무공서를 보았다.
시간마저 잊게 만들다니.
“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마공서…….”
“뭐?”
“예? 아, 아닙니다.”
가문 비급서를 마공서라고 떠들었다간 귀싸대기를 얻어맞으리라.
남궁천이 얼른 입을 다물자, 남궁검이 주변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물었다.
“그래, 칠주야나 보내면서 얻은 게 있더냐?”
“예, 이 무공서를 대여하고 싶습니다.”
“그건……?”
남궁검이 낡은 서책을 잠시 살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왜 많고 많은 책 중에서 하필 그런 걸?”
“다른 건 이미 다 훑어봤습니다.”
“이해는 끝냈고?”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의 맥락은 짚었습니다. 한데 이건 아직인지라.”
“오래된 책이다. 오래전 본 가의 고수가 남긴 비급서로 전해지나 워낙 해석이 어렵고 실용성도 없어 상당 기간 방치된 책이지. 이젠 글자도 꽤 지워져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난잡하게 있을 뿐이다.”
“뜬구름 잡다 보면 승천하는 용도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황된 생각이다.”
“정점에 오르려면 평범한 생각으로는 부족하죠.”
“…….”
남궁검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하나 이런 변화는 나쁘지 않다. 오늘 남궁천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변화에서 출발했으니까.
‘하나…….’
이 많고 많은 서책들 중에서 하필이면…….
역시 아직은 어린 것일까?
‘안목이 없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남궁검이 생각을 거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책은 필요 없느냐?”
“예, 이거면 충분합니다.”
“알겠다.”
“감사합니다. 참, 한동안 폐관수련을 해야겠습니다.”
“폐관수련을?”
“예, 무한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진행할 예정이어서 벽곡단을 좀 사야 합니다.”
“좋을 대로 하거라. 어차피 네가 마련한 자금이 아니더냐?”
“감사합니다.”
남궁검이 몸을 돌렸다.
“가자. 밥이나 먹자.”
“예, 가주님.”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뒤를 따랐다.
* * *
“자, 다들 알아들었지?”
복성이 목소리를 높이자, 시종과 시녀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커흠!”
우렁찬 목소리에 만족한 듯 복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 앞을 오락가락했다.
“명심해. 너희들은 항상 자부심을 지녀야 한다. 본 가는 제왕의 가문이다. 천하제일가문이란 말이야. 게다가 너희들이 모시는 소가주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무연회라고 들어는 봤지? 그 대단한 대회에서 우승을 하신 분이다. 그러니 영광으로 알아야 해.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좋아.”
복성이 다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성 앞에 도열한 시종과 시녀들은 앞으로 소가주를 모실 자들.
‘사랑스러운 나의 후배들.’
후임이 생긴 게 얼마 만인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돈이 어디 있어서 시종을 더 뽑는단 말인가?
일하는 시종들도 내보내야 할 판국에.
한데 남궁천이 소가주가 되면서 모든 게 다 바뀌었다.
‘그래, 모든 게 다 바뀌었지!’
복성이 뿌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는 전각 신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규모도 상당히 크다.
원래는 담벼락이 있어야 할 곳이지만, 오래전에 허물어 버리고 확장했다.
그 뒤에도, 옆에도 전각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면서 고용된 무인도 대폭 늘어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부분 예전에 남궁세가에서 종사하던 무인들이 복귀한 셈이다.
‘그래, 자랑스러워해야지. 영광으로 알아야지! 너희들이 모실 소가주님은 정말…… 정말 대단한 분이시니까!’
복성은 몰라보게 달라진 주변 풍광을 보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자, 이제 잠시 후면 소가주님이 폐관수련을 끝마치고 나오실 거다. 모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도록!”
“예!”
“아아. 무려 삼 개월 만이구나. 소가주님을 뵙는 것이.”
“저어, 선배님.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소가주님은…… 어떻게 생기셨습니까?”
“당연히 꽃미남이시지! 매우 잘생기셨다.”
복성의 말에 시녀 몇 명은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렸다.
복성이 씨익 웃으며 전각을 향해 돌아섰다.
남궁천이 약조한 날짜가 오늘.
정오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곧 나타날 터다.
‘공자님…… 아니, 소가주님! 어서 나오세요! 무진장 보고 싶었다고요!’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마침내 전각 정문이 벌컥 열렸다.
푸쉬이이……!
마치 가마솥에서 김이 올라오듯 열린 문 안에서 허연 연무가 퍼져 나온다.
초봄의 쌀쌀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습하고 뜨거운 기운이 훅 뿜어져 나왔다.
저벅…… 저벅…….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허연 김 안에서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서서히 또렷해졌다.
복성이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아아, 드디어 끝나셨군요! 엄청 보고 싶었…… 누구세요?”
복성은 물론 뒤에 도열해 있던 시종과 시녀들이 입을 쩍 벌렸다.
조금 전 복성에게 질문했던 시종이 멍하니 중얼거린다.
“소가주님은 어디 가시고…… 웬 거지 새끼가…… 흡!”
무심코 말하는 그의 입을 옆에 선 시종이 얼른 틀어막았다.
삼 개월 만에 나타난 남궁천은 그야말로 상거지 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 개월 동안 씻지도 않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 수련에만 몰두하지 않았나?
전신이 꼬질꼬질할 수밖에.
거기에 막바지 성장기였기에 그사이 키도 훌쩍 자라고 골격도 단단해졌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나다, 복성아.”
목소리를 확인한 복성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소가주님!”
“그래, 잘 지냈어? 뭔가 좀 바뀐 것 같네.”
남궁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복성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암요! 많이 바뀌었지요! 다 소가주님이 바꾸신 겁니다요! 참, 어서 목욕부터 하시지요! 뭐 하고 있어? 어서 소가주님을 욕탕으로 모셔라!”
“예? 아, 예!”
시종 둘이 얼른 앞장서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복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오, 후배도 생겼어?”
“헤헤헤. 다 소가주님 덕분입니다요. 수련 성과는 좀 있으셨는지요?”
복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묻자, 남궁천의 눈빛이 매섭게 빛을 뿜었다.
“물론이지. 제법 성과가 있었다.”
입매를 말아 올리는 남궁천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