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32화 (132/508)

132. 남궁세가니까요

남궁설희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분명 누군가는 인지하고 있었을 말.

하나 누구도 인정하기 싫었던 그 사실.

남궁설희의 입에서 뼈를 때리는 발언이 나오니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열렬히 반대하던 자들도 이젠 더 이상 대살성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참이나 눈치를 살피던 남궁원이 옆에 앉은 남궁표에게 넌지시 말을 속삭였다.

“형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시끄럽다.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다.”

웬일인지 남궁표가 딱딱한 음성으로 말을 끊었다.

슬쩍 안색을 살피니 아닌 게 아니라 남궁표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제야 남궁원은 광승회 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 장원식과 연루된 일 때문이구나.’

남궁원이 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혹시…….”

“……?”

“사실은 아니지요?”

“뭐가 말이냐?”

남궁표가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고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남궁원이 괜히 자라목이 되어서는 말을 이었다.

“그…… 장원식과 손을 잡았다는 게 설마 진짜인 건…….”

“너마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남궁표가 나직이 역정을 내자, 남궁원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보니…….”

“나는 정말 장원식이 가문을 위해 아끼고 모은 돈을 건네주는 줄만 알았다.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알겠습니다, 형님.”

남궁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문의 소가주 자리를 넘보던 형님이 졸지에 가문의 역적으로 내몰리게 된 꼴.

만약 이게 남궁천의 계략이라면 정말 무서운 녀석이 아닌가?

어린 나이로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치리라.

‘뭐, 가문을 이끌 재목이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 할지도.’

속으로 생각하던 남궁원이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어느새 자신도 남궁천을 이미 차기 가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그때 남궁검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또 할 말들 있으신가?”

“…….”

“그럼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남궁검이 잠시 뜸을 들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가문의 운명이 정해질 중요한 순간.

금정각주 남궁효는 새 시대를 앞두고 집문서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궁설희는 어딘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마침내 남궁검의 건조한 음성이 얼음장같은 침묵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남궁천을 소가주로 임명하겠다.”

“……!”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말하게.”

열띤 토론을 벌이던 자들도 이젠 나서지 않았다.

장로를 제외하면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 두 사람이 남궁천을 지지하는 셈이다.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여전히 남궁검의 입지는 바위처럼 탄탄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수뇌인사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한목소리로 답했다.

“가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마침내 남궁천이 정식으로 남궁세가 소가주가 되는 순간.

남궁천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명을 받듭니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남궁천은 남궁검의 처소로 찾아갔다.

“부르셨습니까?”

“앉아라.”

탁자에 앉아 서책을 읽던 남궁검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한다.

거, 사람이 왔으면 한 번 시선이라도 던져줄 것이지.

남궁천이 내심 불만을 삼키고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시종이 차를 내오고, 남궁천은 차를 마셨다. 해가 저문 후 시종이 다시 들어와 따뜻한 차를 또 내어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남궁검은 말없이 서책만 바라보았다.

이쯤 되자 남궁천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올라왔다.

아니,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검은 시종일관 눈길을 서책에만 둔다. 마치 남궁천을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찻물이 다 식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남궁검이 서책을 덮으며 말했다.

“말해보아라.”

응? 뭘?

남궁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남궁검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말하지 않을 생각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제야 남궁검이 눈을 들어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거, 영감. 눈빛 하나는 여전히 매섭네.

그래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남궁천이다.

남궁천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내자, 남궁검은 내심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달라졌군. 이젠 놀랍지도 않구나.’

생각을 갈무리한 남궁검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좋다.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캐물을 생각은 없다. 갑자기 네가 변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심리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아…… 그 얘기였구나.

하긴 피를 물려준 외조부가 아닌가?

무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궁금했으리라.

하지만…….

‘나한테 물어도 뭐 대답해 주기가 애매하니…….’

남궁검이 남궁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나, 가주로서 이건 물어야겠다.”

“말씀 듣겠습니다.”

“생에 미련도 없던 녀석이 어찌 갑자기 소가주가 되려 한 것이더냐?”

“죽어 보니 미련이 생겼습니다. 욕심도 생기고.”

“욕심?”

“예.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니 이번엔 끝까지 가보고 싶더라고요.”

“그 끝이 어디냐?”

“정점입니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자, 남궁천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밑바닥은 이미 겪었습니다. 그럼 인생 이 회차에서는 반대로 가장 높은 곳을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정점에 오를 겁니다. 천하제일룡이 될 겁니다. 그러니 소가주가 되어야지요.”

천하제일룡.

남궁선의 별호였으며, 한때 남궁세가의 상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남궁천은 가문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단 뜻이다.

제 어미가 살아 있던 그 시절로.

“가문을 이끌겠다는 소리냐?”

“제가 이끌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남궁세가는 그런 하찮은 가문이 아닙니다. 천하제일룡을 배출했던 천하제일가문입니다. 저는 그저 그 가문의 소가주답게 홀로 정점에 오르면 될 일입니다. 그럼 그곳엔 이미 가문이 있을 겁니다.”

“……!”

남궁검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이게 한낱 약관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할 만한 소린가?

죽음을 겪었다지만, 그 죽음이 이만큼이나 의식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조차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늘 가문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했다. 항상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한데 남궁천은 그게 아니다.

가문을 이끌 필요가 없다.

남궁세가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홀로 정점에 오르면, 가문은 그 자리에 오롯이 버티고 있을 것이란다.

그만큼 가문의 힘을 믿는 것이다.

다른 어디도 아닌 남궁세가니까!

그렇다.

남궁세가는 그런 곳이었다.

본디 제왕의 가문이 아니었던가?

남궁검은 묘하게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가만히 고개를 꺾어 창밖을 보았다.

싸늘한 밤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별빛이 유난히 반짝인다.

남궁선이 하늘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다.

‘네가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하나 생각만으로 세상이 움직이지는 않는 법.

현실은 직시해야 한다.

“소가주가 되었다고는 하나 네가 가야 할 길은 험난할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이미 지옥을 걸어왔습니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는다.

한데 그 웃음 속에서도 두 눈빛만큼은 단단하게 빛나고 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더 할 말 있느냐?”

“창궁서고 출입을 허가해 주십시오.”

가주와 소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서고.

사실 소가주가 되면 제일 먼저 할 일이기도 했다.

“이유는?”

“본 가의 무공을 모조리 훑어보고 싶습니다.”

“너는 이미 소가주가 되었다. 가문 최고의 절기는 내가 모두 전수해 줄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제가 모든 가전 무공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싶습니다.”

남궁검은 잠시 고개를 들어 다시 남궁천을 보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흔 줄이 넘어서면서 어지간히 인생을 알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당장 눈앞의 손자 녀석 생각은 한 치도 들여다보기 힘들다.

남궁검이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겠다. 허가해 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남궁천이 허리를 숙이고는 일어났다.

그가 막 방을 빠져나오려고 할 때였다.

“천아.”

멈칫.

“애썼다.”

남궁천이 슬쩍 돌아보니, 남궁검이 여전히 서책에 눈을 둔 채 툭 뱉듯이 말한다.

“썩 잘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입매를 올렸다.

하여튼.

저 영감은 꼭 한 번씩 뒤통수를 친다니까.

* * *

끼이익…… 쿵.

낡은 문이 닫히면서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창궁서고에 들어선 남궁천은 손부채질로 먼지를 쫓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그렇게 넓진 않네.’

아주 어릴 적에 남궁세가의 서고는 오 층 전각이라는 둥, 너무 넓고 책장이 빼곡해서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잃는다는 둥 허황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인가?

하긴, 실제로 남궁세가 서고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가세가 기울어 본 장원을 팔아 버렸으니까 이전의 서고가 어땠을지는 상상만 해볼 일이다.

다만, 창궁서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가세가 기울어도 창궁서고의 비서들은 단 한 권도 내다 팔지 않았다고 하니까.

생각해 보면 창궁서고가 협소한 건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이곳엔 가주와 소가주만 볼 수 있는 비급서가 비치되어 있으니까.

그런 걸 감안하면 딱히 서책이 적다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가주와 소가주만이 이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권리라는 게 다소 낭비처럼 느껴질 정도랄까?

“자아, 그럼 어디 독식해볼까?”

남궁천은 사방에서 물씬 풍겨오는 책향을 맡으면서 책장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모든 무공을 훑어볼 요량이었기에 첫 번째 책장에 꽂힌 책부터 하나씩 꺼내 펼쳐 들기 시작했다.

“으음…… 창궁심연검(蒼穹深淵劍)? 창궁검법의 심화편인가?”

사락…… 사락…….

남궁천의 예상대로 창궁검법을 조금 더 보완하고 깊이 있게 들어간 책이었다.

하나 그 정도는 이미 남궁천이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특별할 게 없었다.

공력의 흐름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남궁천으로서는 이미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상태.

“이건…… 됐고. 다음.”

사락…… 사락…….

“뭐, 괜찮은 내용인데. 좀 아쉽긴 하네. 자, 다음…….”

사락…… 사락…….

“볼만한데 역시 이 푼 부족해.”

사락…… 사락…….

“으음…… 다음. 이것도 뭐…… 자, 다음. 다음. 다음…….”

남궁천은 그렇게 창궁서고의 모든 책을 하나씩 꺼내 가며 읽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책만 보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전생에 이런 호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게 남궁천 옆에 서책이 점점 쌓여갔고, 읽지 않은 책들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창궁서고는 보안을 위해서 창문 하나 없었다.

때문에 남궁천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오직 야명주(夜明珠)에만 의존해 책을 읽었다.

호롱불은 자칫 불이 나서 서책이 탈 수 있기에 값비싼 야명주를 비치해둔 것이다.

가세가 기울고도 유일하게 팔지 않은 돈 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책장 앞에 선 남궁천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서책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건질 게 없는데.”

물론 훌륭한 비급서가 꽤 있다.

그 비급서들 역시 제대로 숙달한다면 현재 남궁천의 무공을 한 단계 끌어 올려 주리라.

하나 부족하다.

남궁천이 바라보는 곳은 고작 한두 단계 위가 아니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무공을 원했다.

천하제일룡이 될 수 있을 만큼!

남궁선이 천하제일룡인 시절과는 또 달라져 있을 것이기에.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약 답이 남궁세가 없다면…….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혀야 하나?”

익히지 못할 건 없다.

초견파공안이 있으니까.

다만 소가주로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

그런데 그때, 남궁천 눈에 책장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서책 한 권이 들어왔다.

“응? 이건 뭐지?”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서책.

보관 상태도 썩 좋지 않았는지 표지 글씨가 빛이 바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창연…… 신공(蒼聯神功)?”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역시나 낡아빠진 책.

“창벽검(蒼碧劍)……?”

어라? 이런 게 남궁세가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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