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31화 (131/508)

131. 남궁세가니까요.

“……라는데요?”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는 남궁표를 보았다. 그러면서 한쪽 손으로는 여전히 장원식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빙글빙글 돌렸다.

남궁표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틀림없어. 저놈은 악마다! 이 지독한 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상황을 남궁천이 일부러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생각도 하기 싫군.’

남궁표가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남궁검을 향해 돌아섰다.

“가주님! 형님! 저는 정말 아닙니다! 누님! 절 믿으셔야 합니다! 지금 장원식이 저를 모함하는 겁니다! 물귀신 작전을 써서 본인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려고 저 지랄을 하는 겁니다!”

“말에 품위가 없다.”

남궁설희가 냉랭하게 지적하자, 남궁표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쳤다.

품위는 얼어 죽을! 지금 졸지에 가문을 배신한 꼴이 됐는데!

한데 남궁설희의 입에서 더 놀라운 말이 떨어졌다.

“네 말대로라면 너 역시 가문의 지위를 버리고 심문이 필요하겠구나.”

“누, 누님!”

남궁표가 사색이 되어 물러나는데,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으며 다가왔다.

“어떻게, 지금 시작할까요?”

뭐, 뭘 시작해? 이 미친놈아!

남궁표가 뒷걸음질을 치는데 마침 남궁검의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길을 붙들었다.

“그만 됐다.”

남궁천이 어딘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남궁표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궁검이 냉랭한 시선으로 남궁표를 쏘아보았다.

“표는 혐의가 확실치 않으니 빠른 시일 내에 소명하도록 해라.”

“알, 알겠습니다.”

“이현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으니 조만간 정회를 열도록 하겠다.”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지객당에 들어선 후로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차례 혈풍이 불어닥친 것만 같은 느낌.

남궁표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안도하는 사이, 남궁검이 남궁천을 향해 물었다.

“장원은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우선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알았다. 수고했다.”

“장 가주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남궁검이 장원식을 차갑게 일별하더니 더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방계라고는 하나 본 가를 등진 자다. 그 죄가 가볍지는 않을 터. 후에 장로회와 상의하여 처분을 결정하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본 가 별채에 가둬 두도록.”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검이 미련 없이 돌아서더니 지객당을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모두 뒤를 따르자, 실내에는 남궁천과 장원식만이 남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 허공에 말했다.

“들었지?”

“예, 주군.”

남궁천 뒤로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손우곤이었다.

남궁천이 장원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분부대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손우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더니 장원식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표 어르신을 엮으신 건 일부러 그러신 건지요?”

사실 남궁표가 광승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건 앞서 장원식을 심문하면서 충분히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남궁표를 이번 일에 엮은 것이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감님은 내가 소가주가 되는 걸 영 못마땅하게 여기시지. 노골적으로 방해를 해오는 자에게 정공법으로만 맞설 수는 없는 법이야. 그 어르신, 당분간은 이번 일을 소명하느라 바쁠 터. 내가 소가주로 정해지는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걸?”

손우곤은 남궁천의 계략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남궁천은 뭔가 다르다.

방해자를 곤경에 빠트리는 데에 있어서는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다.

남궁천이 손우곤을 슬쩍 돌아보았다.

“왜? 비열해 보였어?”

“글쎄요.”

손우곤이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즉답을 피했다.

비열하다면 비열하지만, 그 역시 내심 남궁표가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기에.

남궁천이 손우곤을 똑바로 응시했다.

“잘 들어, 손 대주.”

“예, 경청하겠습니다.”

“상대가 흙탕물을 덮어쓰고 덤벼들 때는 나 혼자 깨끗하게 맞설 방법은 없어. 그건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주둥이만 털면서 살아온 자들이 하는 말이지.”

“……!”

“흙탕물을 덮어쓰고 달려드는 자를 손쉽게 이길 방법은 내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맞서는 거다. 홀로 우아한 척, 고고한 척하다가는 결국 흙탕물에 처박히게 마련이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손우곤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표현은 거칠었지만 남궁천이 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동시에 그는 이 어린 청년이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인지 경외감마저 들었다.

어쩌면 자기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지옥을 견뎌온 것은 아닐까?

남궁천이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참, 아내는 좀 어때?”

“덕분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남궁천이 활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맘씨 좋은 청년이 아닌가?

괜히 저 해맑은 모습이 가슴 한편이 울컥거리는 손우곤이었다.

어느 누가 만년설삼을 조건 없이 내놓고 저리 태연할 수 있을까?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남궁천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짐했다.

‘주군께서 흙탕물을 뒤집어쓰든, 똥물을 뒤집어쓰든. 그 자리에는 항상 제가 함께 있을 겁니다!’

* * *

며칠 후 남궁세가 정회가 다시 열렸다.

남궁검은 물론 직계 가족들과 수뇌인사들이 회의실에 모여서 근래에 일어난 일을 두고 연신 떠들어댔다.

어떤 이는 남궁천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찬양했고, 여전히 남궁천을 썩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분명한 건 이현의 상권을 수복한 후로 남궁천의 평판이 꽤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남궁천은 그 모든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남궁천은 확실히 뱉은 말을 지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원식이 본 가를 배신했다는 것까지 밝혔지요. 소가주가 될 자격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면 소가주가 되는 걸 반대하지 않기로.”

“어허! 말은 정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조한 건 아니지요. 다만 소가주가 될 최소한의 자격은 검증한 셈입니다만.”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현의 상권을 수복한다고 해서 소가주로 완전히 결정한다는 말씀은 없으셨지요.”

“하나 더 이상 뭘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점은 역시나 가문의 명성에도 치명적이라…….”

분분한 의견들.

끝이 없을 것 같은 난상토론이다.

남궁천의 평판이 상당히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반대 의견도 있다.

회의 내내 침묵하던 남궁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금정각주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의 물음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일단 가주의 질문인 데다 가세가 많이 기운 지금도 금정각주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실권자라고 할 수 있었다.

금정각주 스스로는 자책을 많이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남궁세가는 진작 거리로 나앉았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금정각주 남궁효가 침음을 흘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남궁천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만…… 역시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점은 본 가의 입장에서 다소…….”

남궁효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을 늘어뜨린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는 가운데 남궁천이 불쑥 나섰다.

“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제가 깜빡한 게 있어서. 금정각주님께 전해 드릴 게 있어서요.”

“내게…… 말인가?”

“예, 여기.”

남궁천이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더니 탁자에 올려두자, 남궁효가 조심스럽게 그걸 가져가며 물었다.

“이게 뭔가?”

“집문서입니다.”

“집문서……?”

“예, 광승회 장원을 처리해야 해서요.”

“장원을……? 그 큰 장원을…….”

“예. 아무래도 규모가 크니까 저보다는 금정각주님이 직접 파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팔, 팔아…… 그 큰 걸…….”

남궁효가 부들부들 떨면서 문서를 손에 쥐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남궁검이 입을 열었다.

“금정각주?”

“예?”

“의견을 마저 말하게.”

“아, 제가 어디까지 말씀을 드렸더라…….”

남궁효가 어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남궁원이 슬그머니 귓속말을 전했다.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점이 본 가의 입장에서 다소……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남궁천이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점이 본 가의 입장에서는 다소…… 상관없겠지요.”

“으응?”

“네?”

수뇌인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남궁효가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집안이 굴러가려면 자금력이 있어야지요. 자금력이. 본 가에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던 걸 저 젊은 청년이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좀벌레 같은 장씨 놈을 찾아내 벌할 수 있게 됐으니…… 저는 절대 찬성입니다!”

남궁효가 문서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쯤 되자 마음이 조급해진 반대파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살성의 사생아는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낙인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본 가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도 전부 그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들 중 누군가 남궁표와 남궁원을 번갈아 보며 재촉했다.

“두 분도 뭐라고 말씀해 주시지요.”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남궁표 대신 남궁원이 나섰다.

“저도 우려스럽습니다. 남궁천이 용케도 이현의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세상이 그를 용인할지 알 수 없지요. 사실 광승회는 그리 강맹한 집단도 아니었고,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일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니…….”

순간 남궁설희가 웃음을 터뜨리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말을 꺼내던 남궁원도 시선을 돌려 남궁설희를 보았다.

“어째서 웃으십니까? 누님.”

“누구라도 나서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남궁설희가 피식 냉소를 지었다.

“하면 너는 나서지 않고 그간 무얼 했던 것이냐?”

“그, 그야…….”

“뭐든 지나고 나면 쉬워 보이는 법이지.”

“누님?”

“한심한지고. 우리 모두가 두 달 또는 빨라야 한 달이라고 예상한 문제다. 아니, 그것도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지. 한데 남궁천은 열흘도 지나지 않아 해결했다. 누구나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하면 왜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은 가문의 문제를 직시하면서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낙인이 두렵다고? 언제부터 본 가가 세상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며 지냈느냐? 본 가가 기운 게 다 그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오라버니에게 들은 말이 있다. 남궁천, 저 아이가 그랬다더군. 본 가가 기운 건 그 시선 때문이 아니라, 그 시선에 맞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 중 누가 본 가를 그리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에게 모든 원인을 떠넘기면 속이 편해지는가? 이런 이치를 저 어린아이에게 들어야만 정신을 차린단 말인가?”

한마디 한마디 뼈를 때리는 발언에 남궁원이 신음처럼 말을 꺼냈다.

“하면…… 누님은…….”

“나는 적극 찬성이다. 남궁천, 저 아이야말로 본 가를 이끌어갈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남궁설희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언하자, 실내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남궁설희가 돌처럼 굳은 수뇌인사들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을 매듭지었다.

“나 또한 남궁천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 편협한 생각들이 얼마나 가문에 위해가 되는지 오늘에서야 깨달았지. 여러분들이 그 선입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본 가는 다시 비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가 남궁천을 돌아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네가 나의 못난 점을 일깨워 주었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이 할멈. 마음에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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