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공수래공수거
급하게 말을 뱉은 남궁표가 힐끔 눈치를 살폈지만, 남궁검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 명령에 힘을 실어주었다.
창응대원들이 물러나자 몰려왔던 양민들이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서는 소리쳤다.
“우리가 할 말은 하나요! 우린 남궁세가가 이현의 상권을 되찾는 걸 반대하오!”
“옳소! 나도 마찬가지요!”
“남궁세가는 이현의 상권에 개입하지 마시오!”
그러자 언제 들어온 것인지 또 다른 양민이 삿대질을 하며 외쳐댔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동안 광승회가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그는 바로 이현객점의 주인장이었다.
간밤에 벌어진 일을 점소이에게서 전해 들은 그는 두 눈으로 직접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지금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하나 앞서 몰려왔던 상인들 역시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광승회가 다소 거친 방법을 쓰긴 했지. 하나 그들이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소! 그들 덕분에 우리 이현에서는 도적이나 강도가 설치진 않았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말도 안 되는 폭리를 취한 광승회야말로 도적이자 강도였소!”
“맞소! 광승회가 곧 도적떼였지!”
이현객점 주인장의 말에 몇몇 상인들이 동조하며 나섰다.
그러자 앞서 찾아온 상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잊었나 보구려.”
“뭘 말이오?”
“애초에 남궁세가가 이현을 광승회에 넘겼다는 걸 까맣게 잊은 거요?”
“…….”
맞서던 상인들이 침묵하자, 사내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외쳤다.
“나는 남궁세가를 절대 인정할 수 없소! 가세가 조금 기울었다고 우리를 광승회에 팔아넘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상권을 장악하겠다고? 흥! 내 보기엔 광승회나 남궁세가나 똑같은 치들이오!”
“하지만 남궁세가는 폭리를 취하진…….”
“광승회가 그 폭리를 취할 때 남궁세가는 뭘 했소? 뭘 잘한 게 있소? 우리가 광승회에 시달릴 동안 한 번이라도 손길을 내어 준 적이 있었소?”
“…….”
남궁세가를 반기던 양민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남궁표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일이 바로 이렇다.
결코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법이 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민심이란 시시각각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다.
지금은 역풍이 불고 있었다.
그에 따라 민심도 역풍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남궁표가 조소 서린 표정으로 남궁천을 힐끔 보았다.
‘보아라. 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만했고, 자만의 대가를 지금 치르는 중이다.’
생각을 갈무리한 남궁표가 헛기침을 하고는 남궁천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뒤탈이 없다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일을 어찌 처리했기에 양민들이 오히려 너를 반대하는 것이냐?”
“에이,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저들이 절 반대하는 게 아니라 남궁세가를 반대하는 거잖아요.”
“뭐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사태를 지켜만 볼 것이냐? 정작 저들이 본 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현의 상권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남궁표의 지적에 남궁설희와 남궁화, 남궁검이 시선을 보내왔다.
남궁화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남궁표의 지적이 일리 있다고 여겼다.
‘어쨌거나 본 가가 상권을 수복하려는데 반발자들이 생기면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질 터. 천이에게는 모진 환경이지만 이 또한 극복해야만 할 숙제겠지. 천아,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니?’
남궁화의 우려와 다르게 남궁천은 여전히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남궁표가 냉소를 지으며 몰아붙였다.
“어디 말해보아라. 네가 이 사태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질문을 던지면서도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결국 똥 싼 놈은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은 나처럼…….”
“해결하죠, 뭐.”
“그래, 당연히 해결하겠…… 뭐?”
“지금 할까요?”
“지, 지금? 뭐를?”
“해결요.”
“해, 해결이라니…….”
남궁표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솥에 밥 짓는 일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해결하겠다고?
‘허! 어디 운 좋게 일을 처리했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그런 식으로 나오면 천천히 하라고 달랠 줄 알았더냐? 절대 네놈 뜻대로 되지 않는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이 기회에 말의 무게를 가르치고, 소가주 자리를 다시는 넘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좋으리라.
남궁표가 희미하게 입매를 비틀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지금 당장 해결해라.”
“숙부님. 그건 말이 안 되는…….”
남궁화가 얼른 나서서 말렸지만, 남궁표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저 아이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소가주란 말의 무게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제 입으로 뱉었으니 지키겠지. 남궁천! 네 말대로 어디 한 번 해결해보아라. 지금 당장!”
남궁화가 도움을 바라는 눈치로 아버지를 보았지만, 남궁검은 시종 무감한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그녀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데,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럼 해결하고 올게요.”
남궁화 뿐만 아니라 남궁표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척 벌렸다.
마치 마실 나가는 아이처럼 천진한 태도가 아닌가?
한편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오자, 잔뜩 뿔이 나서 항의하던 양민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다가 그중 한 명이 용기 내어 남궁천에게 다가서며 턱을 치켜들었다.
“뭐, 뭐요?”
“불만이 많네?”
“당, 당연하지! 그동안 남궁세가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소? 우리가 불만 없게 생겼소? 지금?”
“해준 게 없지. 그리고 앞으로 너 같은 놈에게 해줄 건 더 없고.”
“뭐욧?”
“나는 말 잘 듣는 놈들이 좋거든.”
“무, 무슨 소리를! 지금 남궁세가가 힘없는 양민을 겁박하는 거요?”
남궁천이 손을 우두둑 소리 나게 꺾었다.
“힘없는 양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겁박하는 건 맞지.”
“아니, 뭐 이런……!”
퍼억!
순간 남궁천의 주먹이 양민의 안면을 가격했고, 지켜보던 남궁세가 사람들은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 저 미친놈!’
남궁표는 황당하면서도 내심 소가주 문제가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남궁화는 너무 놀라서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데 남궁천의 놀라운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코피를 터뜨리며 주저앉은 양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나 죽네! 남궁세가가 사람을 팬다! 힘없는 양민을 두드려 팬다! 사람 살려! 사람 살……!”
쉬이익, 뻐억!
다음 순간 남궁천이 그 사내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차는 게 아닌가?
콰다앙!
그대로 튕겨 날아간 양민이 벽에 부딪히면서 축 늘어졌다.
팔이 기이한 모습으로 꺾여 있었고, 윗배 모양이 찌그러진 듯 이상한 것으로 보아서는 갈비뼈도 몇 개 부러진 게 분명했다.
이제 놀란 건 지켜보던 양민들도 마찬가지.
입을 쩍 벌린 남궁표의 눈매가 미세하게 휘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이다.
‘내 저럴 줄 알았다.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일을 해결한답시고 양민을 두들겨 패? 이 미친……!’
그가 휙 돌아서더니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누님! 저것 좀 보십시오!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누가 대살성의 사생아 아니랄까 봐 말로 해결하지 않고 주먹부터 내지르는 것 좀 보십시오! 어디 힘없는 양민을 함부로 두들겨 팬답니까? 그게 본 가의 방식이랍니까? 도대체 어찌 저런…….”
“너는 가만히 좀 있어라.”
남궁설희가 의외로 냉랭하게 반응하자, 남궁표가 뜨끔해서 물었다.
“누, 누님?”
“…….”
남궁설희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지그시 응시했다.
확실히 남궁천의 대응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하나 남궁천이 예상을 깨버린 건 지금이 처음도 아니기에 별로 놀라진 않았다.
‘네 녀석이 정말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면 지금 저지른 짓에도 다 생각이 있을 터.’
한편 남궁표는 남궁설희가 동조해주지 않자, 가주에게 쪼르르 가서 역정을 부렸다.
“형님!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겁니까? 저 녀석을 좀 보십시오! 양민을 두들겨 팼단 말입니다! 이건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남궁천, 네 이놈! 어찌 힘없는 양민들에게 무력을 써서 제압한단 말이냐! 이게 무슨 짓이냐!”
이쯤 되자 지켜보던 양민들도 수군거리면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남궁표에게 다가왔다.
“힘없는 양민이라. 저놈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뭣이?”
“양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려내는 것도 소가주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남궁표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는데, 남궁천이 품에서 꺼내던 그 장부를 남궁검에게 내밀었다.
지금껏 가만히 지켜만 보던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여미며 물었다.
“해명할 수 있겠느냐?”
“모든 건 이 장부에 나와 있습니다.”
남궁검이 차가운 눈길로 장부를 응시했다가 남궁천을 보았다.
무슨 장부인지 묻는 눈치다.
“그동안 광승회와 결탁해서 양민 행세를 해온 또 다른 파계승들 목록입니다. 이현의 상권 삼 할 정도가 그런 놈들로 구성되어 있고, 방금 저 녀석도 그중 한 놈이죠.”
“믿을 만한 것이냐?”
“이 장부는 색광…… 아니, 광승회주가 직접 시인한 사실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천이 돌아서자, 우르르 몰려왔던 열댓 명의 양민들이 딸꾹질을 하며 물러났다.
남궁천이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그런 놈들에게는 본 가가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는 게 결코 마음에 들지 않겠죠. 그동안 누려왔던 혜택이 모두 사라질 테니까. 안 그래들?”
“어어…… 그, 그게…… 우, 우리는…….”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던 열댓 명의 무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남궁천이 그들 앞에 가서 짝다리를 짚고 섰다.
“자, 다시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자. 아까 불만이 많던 것 같던데. 어디 다시 한번 씨불여볼까?”
“아…… 딱히 불만이라기보다는…… 헤헤!”
사람들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남궁천.
그에게서는 사신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살을 엘 것 같은 살기도 아니요, 비릿한 혈향을 풍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전신을 에워싸고 있는 죽음의 기운.
그 묘하게 소름 돋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압박한다.
안절부절못하던 사람들이 일순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자백이나 다름없는 상황.
의기양양했던 남궁표의 표정도 이로써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남궁천이 그들 앞에 서서 입매를 비틀었다.
“다들 왜 이러실까? 누가 보면 내가 사람을 죽이는 줄 알겠네.”
남궁천이 남궁검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네가 시작한 일이다. 마무리도 네가 지어라.”
“제 방식대로 해도 될까요?”
“네 방식대로.”
남궁검이 허락하자, 남궁천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돌아섰다.
그가 목을 우두둑 소리 내어 꺾으며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반짝이지 않는 대가리를 가진 우리 스님들. 이쯤에서 모든 걸 내려두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무소유를 실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처맞을까요?”
“어어……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모든 걸 앗아갈 수는…….”
뒤로 계속해서 물러나던 파계승들이 벽에 가로막히자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남궁천이 서늘한 기운을 물씬 풍겨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악귀처럼 속삭였다.
“뭐라고요?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려요. 좀 크게 말씀해 주시죠?”
그 순간 열댓 명의 파계승들 얼굴에 세상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인생이란 본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수래공수거.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