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공수래공수거
광승회 장원은 새 단장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우선 남궁천은 이현의 양민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고 장원을 정리하도록 했다.
무너진 담벼락을 재건하고, 전각마다 들어앉은 불상들을 치우고, 방마다 배인 사찰 특유의 향을 지우고, 여벌의 승복들은 모두 포목점에 팔아 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정말 승려들이 머물던 장소처럼 보였지만, 곳곳에 탐욕에 찌든 흔적이 역력했다.
덕분에 양민들을 실컷 부려도 품삯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자리 창출. 돌고 도는 경제. 부의 재분배라고 할 수 있지.’
남궁천이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창응대주 손우곤이 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파각과 혜광에게 창응대원 두 명을 각각 붙여두었습니다.”
“그래, 잠시만 지켜보라고 해. 곧 은신에 뛰어난 자로 교대해 줄 테니.”
“예, 주군.”
은신에 뛰어난 자는 불명회를 통해 구할 생각이었다.
창응대가 기본적인 은신술을 익히고 있겠지만, 불명회만큼 정체를 숨기고 남을 관찰하는 데에 도가 터진 않았을 테니.
게다가 창응대는 어디까지나 남궁세가 소가주의 직속 타격대다. 창궁무애검진만 해도 스무 명이 있어야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것이고.
마침 정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남궁검과 남궁화, 그리고 금정각주 남궁효였다.
특히 남궁화와 남궁효는 모든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눈을 퉁방울처럼 뜨고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궁효가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화야,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저한테 물어보셔도 뭐라 드릴 말씀이…….”
남궁화 역시 이 낯선 광경이 그저 생소하기만 한데 뭐라고 대꾸하겠는가?
유일하게 무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남궁검뿐이었지만, 그 역시 눈자위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면 내심 놀란 게 틀림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궁세가가 몰락한 후로는 이현을 오가다가 광승회의 거대한 장원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만 삼키며 지냈다.
한데 오늘 이렇게 그 장원 복판에 멀뚱히 서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침 남궁천이 활짝 웃으면서 다가왔다.
“아, 오셨군요. 자자, 그렇게 서 계시지들 말고 안으로 드시지요.”
남궁천이 마치 제집인 것처럼 안쪽을 가리키며 안내한다.
남궁검, 남궁효, 남궁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특히 남궁효는 도무지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장정 여러 명이 커다란 불상을 옮기는 것을 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커흠! 저 불상들과 잡기들은 어찌 처리하려고 하느냐?”
“아, 저거요? 전부 팔아 버릴 생각입니다.”
“잠깐. 저, 저건……!”
순간 남궁효가 걸음을 멈추더니 장정들이 옮기는 커다란 액자를 보았다.
액자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금빛 부처가 연꽃 위에 앉은 모습이 우아하다 못해 신비롭게 보일 지경이다.
남궁효가 입을 쩍 벌리더니 얼른 소리쳤다.
“거기 잠깐 멈추어라!”
“예?”
낑낑거리며 액자를 옮기던 장정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멀뚱히 남궁효를 보았다.
남궁효가 한달음에 달려가 액자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다가 버럭 소리쳤다.
“이, 이 귀한 그림을 어찌 맨손으로 마구 만지는 것이냐?”
“아…… 저희들이 그림을 잘 몰라서…….”
“장갑을 끼고 조심히 다루게! 마치 여인을 다루…… 아니, 갓난아기를 다루듯 하란 말일세!”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이게 그렇게 대단한 그림입니까?”
장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질문에 남궁효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대단하다마다! 이건 금불연화도(金佛蓮花圖)다. 이 섬세한 표현을 보면 필시 진품이로다.”
“예, 조심하겠습니다요.”
장정들이 얼른 장갑을 끼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액자를 옮기자, 남궁효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다시 저만치에서 누군가 옮기는 향로를 보고는 눈알이 휙 돌아갔다.
“저, 저것은……!”
남궁효의 입이 다시 딱 벌어졌다. 이젠 아예 침이 떨어질 지경.
장원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간 남궁효가 장정이 옮기는 향로를 보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이, 이건…… 삼족청풍향로(三足淸風香爐)가 아닌가! 맙소사, 도대체 재물이 얼마나 많은 거야? 이게 다 얼마야?”
장정들이 옮기는 향로를 보면서 남궁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남궁효가 얼른 남궁천에게 돌아왔다.
“자네, 저, 저것들을 얼마에 팔 생각인가?”
“글쎄요. 뭐, 대충 값을 받을 생각입니다만.”
“대충이라니! 대충 처리해서는 안 될 물건들일세. 저것들이 얼마나 귀한 물건들인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음. 제가 그렇게 꼼꼼한 성격은 아니어서. 많이 비싼 겁니까?”
“허어! 저 삼족청풍향로는 개당 삼만 냥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걸세. 내가 본 것만도 여섯 개니까 얼추 이십만 냥이로군. 금불연화도는 오만 냥. 아니, 십만 냥을 부르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지!”
침을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남궁효의 눈빛이 희번덕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남궁천이 뒤로 한 걸음 슬쩍 물러났다.
이거, 완전히 눈이 돌아가기 직전인데.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면 각주님께서 처리해 주시겠습니까?”
“내, 내가……?”
“예, 물건의 가치를 잘 아시는 각주님께서 맡아주신다면 굉장히 든든할 것 같습니다.”
남궁천의 말에 남궁효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지켜보던 남궁화가 괜히 불안해져서 눈치를 살폈다.
마치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듯한 태도에 남궁효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으리라.
‘어쩐다? 숙부님은 자존심이 강한 분이신데…… 천이가 선을 넘어 버렸구나.’
내심 한숨을 내쉬는데, 남궁효가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도대체 나를…….”
“…….”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건가?”
“……?”
예상과 다른 전개에 남궁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궁효가 남궁천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돌연 손을 굳게 맞잡는 게 아닌가?
“정말 저것들을 내가 처리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누구보다 적임자라고 생각됩니다.”
“고맙네! 내 반드시 최고의 값을 받고 처리하겠네!”
남궁효의 입매가 귀에 걸린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동안 남궁세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금정각주로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던 그였다.
오죽하면 돈을 빌리기 위해 그 먼 여정을 떠났을 정도겠나?
그러고도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오늘날까지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사는 기분이었다.
한데 이제야 모처럼 금정각주로서 일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신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남궁천이 그런 남궁효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든든합니다.”
남궁효가 남궁검에게 다가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가주님! 어쩌면 남궁세가가 드디어 바닥을 치고 솟아오를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바짝 웅크리고 있었던 것도 다 오늘부터 높이 솟구쳐 오르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는 항시 이 순간을…… 가만! 저, 저건……!”
한창 말을 이어가던 남궁효의 눈이 다시 돌아갔다.
그의 눈이 우물처럼 커지더니 황급히 달려갔다.
“잠, 잠깐! 기다려 보아라! 맙소사! 이건……! 백룡황산도(白龍黃山圖)가 아닌가? 세상에…… 세상에……!”
이제 남궁효의 표정에는 은근한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때마침 인부들 몇 명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마당을 가로지르자, 그가 또 달려갔다.
“기, 기다려 보게! 이건 무엇이냐? 이건 어디로 옮기는 중이냐?”
“아…… 이건 남궁세가 금정각으로 옮기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요.”
“본 가의 금정각으로? 어디 열어보아라. 내가 바로 금정각주다.”
“아, 예. 그럼…….”
인부들이 상자를 내려놓고 덮개를 열자, 그 안에는 싯누런 금덩이가 가득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돌처럼 굳어 버린 남궁효가 결국 입에 거품을 물어 버렸다.
“세, 세상에……!”
꼬로록…….
남궁효가 바닥에 쓰러지자 놀란 인부들이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엇! 금, 금정각주님이 쓰러지셨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의원을 불러라!”
“서둘러, 어서!”
갑자기 마당 한쪽이 분주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남궁검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 사람 참…….”
하지만 남궁효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남궁세가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속앓이를 했던 사람이 바로 금정각주리라.
가문의 회계를 담당하는 금정각주로서는 가세가 기우는 것이 전부 본인 탓처럼 여겨져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다.
실상이 그렇지 않더라도 남궁효는 책임감이 강한 자였기에 과하게 자책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궁검도 남궁효의 추태를 마냥 못마땅하게 보지만은 않았다.
남궁효가 인부들의 부축을 받으며 옮겨지는 것을 보고 남궁검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장원 정문이 시끌벅적해지더니 이번엔 남궁표와 남궁설희가 나타났다.
남궁표는 연신 귀물들을 옮겨대는 인부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누님!”
“내가 알겠느냐? 저기 오라버니가 계시니 가보자.”
두 사람이 남궁검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형님…… 아니, 가주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남궁천이 불쑥 나서며 답했다.
“장원에 눌러앉아 있던 파계승들이 개과천선해서 떠나고 본 장원을 본 가가 양도받은 겁니다.”
“뭐라? 그나저나 너는 어째서 어른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냐?”
“가주님보다 제가 사정을 더 잘 아니까 설명 드린 건데요?”
“거, 따박따박 말대꾸를!”
“이번엔 제게 물어보신 것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끼어드냐고 물어보셨으니 대답을 드린 겁니다만.”
남궁천이 얄밉게 대답하자 남궁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남궁표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한데 그 파계승들이 순순히 물러났다고?”
“운이 좋았지요.”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어 올린다. 저 표정과 말투를 보면 겸손인지, 잘난 척인지 헷갈린다.
물론 남궁표의 눈에 그런 모습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 것은 분명하겠지?”
“깔끔하게라면 어떤?”
“뒤탈이 없게끔 처리한 게 맞느냐, 이 말이다!”
“그럼요.”
남궁천이 여전히 웃으며 대답하자, 남궁표가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만한 일을 벌였는데 정말 뒤탈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흥! 세상일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세상일이 쉬운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일은 제게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 저……! 잘난 척을……! 누님, 누님도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러자 남궁설희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파계승은 다 떠났고, 장원을 스스로 물려줬다는데. 칭찬이라도 하란 말이더냐?”
“누님!”
이제 남궁표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남궁천을 휙 돌아보았다.
“그렇지! 뭐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각서 같은 거라도 받은 게 있느냐?”
“예, 뭐…….”
남궁천이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품에서 장부처럼 생긴 책자를 꺼냈다.
그때였다.
콰당!
장원 정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열댓 명의 양민들이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남궁세가 사람들을 보더니 대뜸 버럭 소리 질렀다.
“우리는 인정할 수 없소!”
그러자 창응대원들이 얼른 다가가 그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자자, 무슨 불만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합시다.”
“아니! 비켜! 우린 남궁세가가 다시 이현의 상권을 관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단 말이오!”
“옳소! 나도 찬성하지 않소!”
“남궁세가는 이현의 상권에 관심 꺼라!”
몰려온 양민들이 갑자기 큰소리를 치기 시작하자, 남궁표의 표정이 기다렸다는 듯 밝아졌다.
‘그렇지! 세상이 어찌 한 방향으로만 흐를까?’
갑자기 신바람이 난 그가 얼른 나서며 창응대를 물렸다.
“다들 물러나라! 저들이 본 가에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