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27화 (127/508)

127. 공수래공수거

핏기가 싹 빠져나간 파각의 얼굴이 화선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이 남궁천과 잘려 나간 괴불자의 머리를 정신없이 오갔다.

앳된 남궁천의 얼굴.

이제 약관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나이다.

하면 강호 경험이 별로 없을 텐데, 사람의 모가지를 썰어놓고도 태연하다.

마치 이런 경우를 숱하게 겪어본 사람처럼.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대살성의 자식이라더니 혹시 이놈도 천살성을 타고 태어난 건 아닐까?

하긴. 그랬다면 무림맹에서 진작 가만두지 않았을 테지.

하나 지금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저 두 눈은 사신의 눈매처럼 매섭고 싸늘하다.

이게 정말 약관도 지나지 않은 아이의 눈이란 말인가?

남궁천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많이 봐둬. 자꾸 본보기를 봐야 마음의 결심도 빨리 서는 법이지. 저 모가지 옆에 같이 나뒹굴고 싶은 꿈이 있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각오는 됐나?”

꿀꺽……!

파각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소승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도 죽는데. 그럼 어떻게 죽을지 선택하는 문제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 자식아!

눈곱만큼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남궁천이 못내 야속했지만, 그걸 따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남궁천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오기 전에 최대한 발악이라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불도를 닦은 몸으로서 어찌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파계승 주제에 스님인 척 오지네.”

“비록 계율을 못 지켜 파계승이 되었으나 가슴에 부처님을 모신 것만은 여전…….”

“병신 같은 소리로 시간 끌지 말고. 자, 질문 들어간다. 배후는?”

“……!”

파각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입을 여는 순간 생사가 갈라지리라.

망설임은 죽음을 재촉할 뿐.

남궁천의 왼손 엄지가 검 받침대를 밀어 올린다.

순간 파각이 세상 온화한 부처님 미소를 지었다.

“불도를 닦은 몸으로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배후를 밝히겠습니다.”

“그래야지. 제대로 수양했네.”

“배후는 흑암회(黑暗會)입니다.”

“흑암회? 뭐하는 곳이냐?”

“그건 저도 정말 모릅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파각을 살폈다.

초견파공안이 색안의 단계에 들어선 지금이라면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공력의 흐름으로도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대단한 고수일 경우에는 그마저도 어려워지지만, 파각 정도라면 거짓말을 할 경우 평소와 다른 공력의 흐름을 보이게 마련이니까.

한데 공력의 흐름이 잔잔한 것을 보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흑암회라.

뭐하는 곳이지?

어지간한 흑도 세력은 남궁천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무림공적 일 호였던 자신이 아닌가?

웬만한 흑도 세력은 그와 연이 닿아 있었다.

한데 흑암회는 처음 듣는다.

신생 조직인가?

남궁천이 파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짜악!

‘오호?’

손에 감기는 감촉이 남다르다.

보통의 경우 뒤통수를 치면 퍽! 소리가 나거나 딱! 소리가 나게 마련인데, 파각의 뒤통수에서는 마치 뺨을 올려붙일 때처럼 차진 소리가 울린다.

이것이 민머리의 효능인가?

‘느낌이 좋은 대가리다.’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물었다.

“지령을 받고 행동했으면서 흑암회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라?”

“죄송합니다. 소승이 거기까진 관심을 두지 않아…….”

관심을 두지 않은 게 아니라,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었던 거겠지.

보통 이처럼 점조직 형태로 운영할 경우에는 보안이 철저하다.

놈들은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몸통을 숨긴다.

그런 의미에서 파각은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다.

놈들은 파각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파각이 ‘흑암회’라는 명칭을 거론했을지라도 그 이상 아는 바가 없기에 애써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운다고, 파각을 죽이려고 몸통이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터다.

‘아마 지금쯤 광승회가 풍비박산 난 사실도 알 거고, 이미 파각과 혜광은 잘라 버렸을 테지.’

결국 건질 게 없어진 셈인가?

흑암회라는 이름조차도 정확한 조직명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중요한 건 그 흑암회가 왜 이현의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냐는 것이다.

남궁세가의 완전한 몰락을 위해서?

아니면 남궁세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이현에 뭔가 먹을 게 있어서?

‘아으! 모르겠다!’

남궁천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다시 파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짜악!

“크윽! 왜, 왜……?”

“그냥. 느낌이 좋아서. 일종의 기분 전환 같은 거다.”

“아…….”

파각이 멍청하게 수긍하자, 남궁천이 턱을 괴고 잠시 장원식을 쳐다보았다.

‘저건 더 모를 테고.’

뭐, 어차피 상관없나?

이만해도 소가주의 자격을 증명하는 걸로는 충분할 테니.

어차피 흑암회는 때가 되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터.

그게 아니면…….

‘일단 파각과 색광을 감시하도록 사람을 좀 붙여놔야겠군.’

생각을 마친 남궁천이 다시 한번 파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짜악!

“윽!”

“저기 널브러진 색광 데리고 썩 꺼져라.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고.”

“감, 감사합니다!”

파각은 지옥에서 구사일생한 사람처럼 연신 굽실거리며 혜광을 등에 업고 달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남궁천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 대주.”

“예, 주군.”

어둠 속에서 손우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신 좀 하는 대원으로 꼬리 좀 붙여.”

“존명.”

모든 조치를 취한 남궁천이 이제 서늘한 웃음을 머금고 돌아섰다.

“헉!”

장원식이 헛바람을 삼키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었다.

“우리 할 말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잠, 잠깐만. 이보게! 그래도 내가 집안 어른인데…… 으윽, 으아아악!”

황산 기슭에서 장원식의 비명이 처절하게 솟구쳐 올랐다.

* * *

“일찍 일어나셨군요, 누님.”

동이 트자마자 찾아온 남궁표가 남궁설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궁설희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너는 식전 댓바람부터 여길 오느냐?”

“누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왔지요.”

“언제부터 네가 날 그리 챙겼다고.”

“허허, 왜 그리 섭섭하게 말씀하십니까? 저야 늘 누님 생각뿐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거라.”

남궁설희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남궁표가 이러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필시 소가주 문제 때문이리라.

남궁천이 이번 임무에서 실패하면 자신의 아들을 적극적으로 밀어달라는 뜻일 터.

남궁표도 그 속내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여드레만 남았군요.”

“하루하루 날을 세면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흐르는 법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할 일은 태산인데 이곳에 발이 묶여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인데 해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허참.”

“되지도 않을 일인지, 될 일인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설마 누님은 그 아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연회 우승을 한 아이다. 무연회는 하찮은 동네 비무가 아니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운이 따를 수도 있지요. 실제로 준우승한 아이도 무명 방파 출신입니다.”

“운으로 창응대를 규합시킬 수는 없었을 터.”

“임시로 협조하는 거겠지요. 창응대도 그간 손이 근질근질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곧 그 아이의 바닥을 보고 돌아설 겁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그야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는 건 운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임시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니까요.”

“광승회가 그리 대단한 집단은 아니다. 만약 오라버니가 직접 나서면 그들은 진작 혼쭐이 났을 게야. 다만 본 가가 직접 상권을 넘긴 입장에서 그걸 다시 돌려받기가 난감하기에 해결이 안 된 부분이었다. 그러니 남궁천이라면 해결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남궁천이라도 광승회주를 상대로 내기 비무를 치러서 이기지 않는 이상 해결은 불가능할 겁니다. 만약 창응대의 힘을 믿고 무작정 습격해서 상권을 되찾는다면 본 가의 명성을 더욱 떨어뜨리는 일이니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고요.”

“그건 그래야겠지.”

남궁설희도 이번만큼은 반박하지 않았다.

광승회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상권을 양도받은 경우였다.

이걸 무력으로 되찾으려고 했다면 진작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남궁세가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진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정말로 백도 무림에서 완전히 매장당할 수도 있는 일.

그렇다고 말로 협상이 될 리는 만무하고.

역시 유일한 방법이라면 내기 비무라도 하는 것일 텐데.

광승회주가 남궁천과 내기 비무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나?

뭐든 빼먹을 게 있어야 내기가 될 텐데.

뭐, 가문의 존폐를 걸고 내기 비무를 한다면 받아들이기야 하겠지.

하나 그랬다간 비무에서 이겨도 문제가 된다.

장차 가주가 되려는 자가 가문의 존폐를 그리 쉬이 내기로 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솔직히 창응대를 규합한 건 좀 의외이긴 했습니다. 그 영악한 녀석이 무슨 말로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겠으나, 상권을 수복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요. 여드레만 지나면 그 아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테지요. 아마 제발 내쫓지만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빌지도 모르고요. 허허허!”

남궁표가 너털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렸다.

한데 그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누님! 아, 형님도 계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궁원이 방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너는 또 무슨 일이냐?”

남궁설희가 냉랭하게 되묻자, 남궁원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믿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남, 남궁천……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이현의 상권을 수복했습니다!”

“뭣이?”

“뭐야?”

남궁설희와 남궁표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궁표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상권을 수복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지금 창응대주만 돌아와 가주님께 보고를 올린 상황입니다.”

“남궁천은?”

“그 아이는 지금 이현에 머물면서 광승회 장원을 손보는 중이랍니다.”

“광승회 장원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것이…… 광승회 파계승들이 모조리 이현을 떠났다고 합니다.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무소유를 실천하겠다고 천명했답니다!”

“아니, 뭐 그런……!”

남궁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탐욕에 들끓던 광승회가 갑자기 무소유를 실천해? 뭐? 부처의 가르침?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그럼 광승회 장원은…….”

“본 가에 모두 양도하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그런 짓을?”

“광승회주 혜광이 내기 비무에서 패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궁표가 날카롭게 소리치고는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이현의 상권을 수복한 것도 모자라서 광승회의 장원까지 차지했다고?

이거 일을 처리해도 너무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 아닌가?

남궁표가 눈을 끔뻑이는데 남궁원이 더 기가 찬 말을 뱉어냈다.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간 매제가 광승회와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남궁천이 밝혀냈다는군요.”

“뭐야?”

“지금 장원식, 그놈을 창응대가 잡아두고 있답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직접 형님을 찾아뵙고…….”

“지금 여기 없으신데요?”

“뭐? 그럼 어디에 계신단 말이냐?”

“방금 이현으로 출발하셨습니다.”

“허어! 누님, 우리도 당장 이현으로 가봅시다.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원!”

남궁설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현으로 가보자. 뭔가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누님은 이게 재미있습니까?”

남궁표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남궁설희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다. 모처럼 재미있는 순간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