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26화 (126/508)

126. 공수래공수거

파각은 환호성을 지르는 양민들을 보며 해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얼른 혜광에게 달려갔다.

“이럴 수가…….”

혜광의 등짝은 그야말로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피가 배어 나온 글귀는 달밤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실력이 많이 줄었어.”

문득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파각이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남궁천이 옆에 서서 혜광의 등짝에 새겨진 글귀를 감상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시 한 수 적을 정도는 됐는데 말이지. 그 옆에 그림도 좀 그려놓고 말이야. 그런데 이번엔 글씨도 좀 비뚤비뚤하고 영 성에 차지 않아.”

남궁천이 턱을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파각은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천의 나이를 생각하면 허세가 분명할 것인데, 지금껏 놈이 싸운 과정을 지켜본 이상 허세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남궁천은 전생에도 적의 등짝에 시 한 수를 적는 일은 없었다.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여유롭게 시 한 수라니?

대체로 그가 적들의 등짝에 새겨 넣은 글귀는 이런 식이었다.

그만 좀 쫓아다녀라, 씹새끼들아!

너희들은 잠도 안 자냐?

밥은 먹고 다니냐?

물론 그 글귀가 추격자들에게 어떤 귀감이 되진 않았을 터다.

‘그러니 악착같이 쫓아다녔겠지. 빌어먹을 놈들!’

하나 그렇게 글귀를 적음으로서 어느 정도 분이 풀리곤 했다.

그리고 모처럼 다시 새겨놓은 글귀를 보니…….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연습을 좀 더 해야겠어.”

무심히 고개를 든 남궁천의 시선이 파각에게 향했다.

“헉!”

순간 파각이 뒤로 성큼 물러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아니 되오!”

“음? 뭐가?”

“시, 시키는 대로 하겠소. 본 회는 이현에서 물러날 테니 부디 자비를…….”

“왜?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가, 가렵지 않소.”

“거, 아쉽군.”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혜광을 발끝으로 툭 찼다.

“이 녀석 데리고 한 식경 안으로 이현을 떠난다.”

“하, 한 식경 안으로 말이오?”

“왜? 너무 기한을 넉넉하게 줬나?”

“아, 아니오. 알겠소. 한 식경 안으로 떠나겠소.”

“원래 성격대로 하자면 너희들을 벌써 갈아 마셨지만…… 부처님의 자비를 생각해서 내가 참는 거야.”

“고, 고맙소.”

“그럼 지금부터 짐 싸. 실시!”

“시, 실시!”

파각이 얼른 복창을 하고는 혜광을 부축해서 등에 업었다.

그제야 다른 승려들도 부랴부랴 움직이며 짐을 싸들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모든 승려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공력을 실어 외쳤다.

“땡중답게 옷가지와 몸만 챙겨서 떠난다, 실시!”

“시, 실시!”

승려들이 일제히 외치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무소유를 실천하란 말이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 * *

혜광과 파각 그리고 괴불자가 황산 기슭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군. 이제 쉬었다 갑시다.”

괴불자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혜광이 한옆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쿨럭, 쿠웨에엑!”

한 차례 선지피를 토한 혜광은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졌는지 고른 숨결로 돌아왔다.

그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난데없이 나타난 애송이에게 상권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장원까지 빼앗기다니.

계약서에 인장을 찍는 그 순간의 치욕감이 다시금 되새겨진다.

“젠장!”

콰앙!

일순 철탁채를 내리치는 바람에 앉아 있던 바위 한쪽이 부서져 나갔다.

옆에 서 있던 괴불자가 움찔거리고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회, 회주 스님. 고정하십시오. 몸에 무리가…….”

“시끄럽소! 어떻게 이룬 광승회인데…… 하루 아침에 이 모양 이 꼴로……!”

“…….”

괴불자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광승회 장원에 머물던 수십 명의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지경이 됐다.

그들을 끌어모으느라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나 혜광이라는 구심점이 쓰러지자, 파계승들의 결속력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렸다.

파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장 가주에게 여기서 보자고 한 것 아니오?”

“예, 그렇지요.”

파각이 혜광의 말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광이 심기가 불편한 듯 투덜거렸다.

“한데 그자는 어째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요?”

“곧 올 겁니다. 만약 배신을 한 것이라면 그땐…….”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소승이 죽는 한이 있어도 대가를 치르게 할 거요. 반드시!”

순간 혜광의 안광에 흉흉한 살기가 일어났다.

하나 곧 내상의 부작용 때문에 격하게 기침을 하다가 다시 한번 시뻘건 핏물을 왈칵 토해냈다.

“젠장! 염병!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한 번씩 기침을 할 때마다 내장이 가닥가닥 끊어질 것만 같다. 뿐만 아니라 갈기갈기 난자당한 등짝은 시시 때때로 화끈거리면서 몸에 열을 올린다.

어디 그뿐이랴?

비무 도중 지속적으로 울린 철탁의 공명음 때문에 머리가 아직도 띵하게 울리고 소리도 먹먹하게 들린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 어린놈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 있는데 마침 저만치 길이 아닌 곳에서 기척이 들렸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한 인영이 나타났는데, 승려들은 그를 보고도 아무런 경계심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파각이 다가서며 물었다.

“대체 왜 이리 늦었소?”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던지라…….”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는 자는 다름 아닌 장원식이었다.

애초에 이현의 상권을 광승회에 넘겼던 자.

그가 혜광의 상태를 눈치껏 살피다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걸 몰라서 묻소? 남궁천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것 아니오!”

“하, 하지만 그 아이가 정말로 이만한…….”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하면 회주께서 능력도 없는 아이에게 당해서 이리됐단 말씀이오?”

“그, 그건 아닙니다만…….”

장원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반응에서 파각을 비롯한 승려들도 장원식이 배신한 것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하나 일이 틀어진 것은 사실.

그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간 본 회는 장씨 세가에 여러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소. 상권을 넘긴 대신 쏠쏠한 재미를 보았을 거요.”

“인정합니다.”

“한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느 정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됐소. 최소한 한마디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가주 건으로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오?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괴물이 올 거란 말은 하지 않았지!”

“괴물이라니…… 대체 그 아이가 어째서…….”

그러자 이번에는 혜광이 벌떡 일어나더니 장원식 앞에 우뚝 섰다.

장원식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아이는 괴물이 맞소. 괴물도 그런 괴물이 없었소!”

“남궁천이 그리 강하단 말씀입니까?”

“강한 건 모르겠소. 다만 무서운 놈인 건 확실하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는 장 가주가 치러야 할 것이오. 우린 책임 추궁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아뢸 것이오. 일단은 장 가주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거요.”

꿀꺽……!

장원식이 마른침을 삼키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혜광을 비롯한 승려들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다들 동작 그만.”

귀에 익은 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혜광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파각과 괴불자, 장원식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꺾어 들었다.

슈우우웃, 쿵!

나무 위에서 뚝 떨어진 그림자.

남궁천이 목을 한 차례 우두둑 꺾더니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잡았다, 요놈!”

“자, 자네가 어째서 여기에……?”

장원식이 당황해서 슬쩍 물러나는데, 제멋대로 오해한 혜광과 파각이 소리쳤다.

“장 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정녕 우리를 배신한 것인가!”

“아, 아닙니다. 나는 정말 모르는…….”

장원식이 얼른 손사래를 치는데, 남궁천이 장원식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안내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이놈들에게 배후가 있다는 것도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역시 제게 말해준 게 전부 거짓이 아니었군요?”

장원식은 남궁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남궁천의 이 발언이 혜광의 심기를 건드린 것만은 분명했다.

남궁천의 말만 미루어보면 장원식의 배신이 분명했기에.

결국 혜광이 격노하면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장원식 이노오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가 장원식의 어깨를 철탁채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직!

“크아악!”

장원식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그 위로 혜광이 올라탔다.

“내 네놈을 죽이고 나락으로 떨어지겠다!”

슈우우웃!

한껏 솟구쳤던 철탁이 장원식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퍼어억!

“어어……?”

머리 깨지는 소리가 왜 나한테서 들리지? 세상은 왜 기울고 있지? 나 지금 날고 있는 건가?

혜광은 그 생각을 끝으로 바위에 부딪치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콰다앙!

혜광의 머리통을 후려친 남궁천이 손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적당히 할 것이지, 쯧.”

“…….”

이제 장원식은 턱이 입에 닿을 듯 벌어졌다.

그가 꿈을 꾸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어어…… 어……?”

“병신 같은 소리 그만 흘리고. 넌 조금 있다가 보자. 뒈진 줄 알아라.”

“어어…….”

장원식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차마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위기의식을 느낀 파각과 괴불자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하나 두 사람이 발을 구르기 직전에 남궁천이 힘을 주어 진각을 밟았다.

꽈아아앙!

“크읏!”

“컥!”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균형을 잃고 멈칫하는 두 사람을 향해 남궁천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퍽! 퍼억!

“크억!”

“아악!”

검집째로 얻어맞은 두 사람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남궁천이 파각과 괴불자에게 저벅저벅 다가가서는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어. 떤. 놈. 부. 터. 조. 질. 까. 요? 신. 령. 님. 께. 물. 어. 봅. 시. 다. 딩. 동. 댕!”

손가락이 지목한 사람은 괴불자.

“넌 참 운도 없다. 하긴 나만큼 운이 없을까?”

“살, 살려주시오.”

괴불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지금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남궁천에게 묘한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그 기도는 남궁천을 사람이 아닌, 사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죽음 따위는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남궁천의 친부가 누군지 들었기 때문에 편견이 생긴 걸까?

‘이건 마치…….’

대살성의 기운 같지 않은가?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질문은 한 번만 한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너는 운이 없는 편이니까 내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거야.”

“알, 알겠소.”

“괴불자. 너에 대해 알아봤는데 아주 쓰레기더군. 강간, 살인, 절도. 심지어 아녀자를 겁탈해서 죽인 후, 그 아이마저 죽였다지?”

“……잘, 잘못했소.”

“아니, 이해가 안 되는 게…… 인생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땡중이 안 되면 그런 쓰레기가 되는 거야?”

“용, 용서를…….”

“잘못은 엄한 곳에 해놓고 용서는 왜 나한테 빌고 지랄이야? 됐고. 배후가 누구냐?”

“……?”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이현에 뭐 처먹을 게 있다고 광승회라는 것들이 설치는 건지. 내 알기로 색광은 그렇게 복잡한 일을 꾸밀 만한 위인이 못 되거든. 자, 배후가 누군지 불어. 아까 뭐 너희들끼리 얘기하더만? 책임 추궁을 당하면 어쩌고, 저쩌고.”

“그, 그것만은…… 제발……!”

순간 괴불자는 남궁천의 눈빛에서 극한의 어둠을 읽었다. 그가 실수를 깨닫고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슈컥!

한 줄기 빛이 목을 지나친다 싶더니 세상이 천천히 기울었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

목을 잃은 괴불자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파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염불을 읊었다.

“아미타불…….”

남궁천이 그런 파각을 보며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지랄 염불하지 말고. 이젠 네 차례다. 기회는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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