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기습인 듯 기습 아닌 기습 같은
창궁무애검진.
현재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창응대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검진이다.
달리 소창궁무애검진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위력이 워낙 대단하기에 ‘소’ 자를 빼고 창궁무애검진이라 부른다.
다만 좀 더 많은 인원으로 펼치는 대창궁무애검진이 따로 있긴 하다.
어쨌거나 창궁무애검진은 소가주의 직속 타격대인 창응대가 주로 사용하는 검진이다.
과거 남궁세가 창응대가 강호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바로 이 창궁무애검진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창응대 개개인의 능력만 놓고 본다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하나 이들이 창궁무애검진을 펼치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지간한 초절정고수가 여럿이 덤벼도 창궁무애검진을 깨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한데 남궁세가가 몰락한 후로 창응대는 해체됐고, 창궁무애검진을 펼쳐본 적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된 상황.
이에 남궁천은 이현으로 오기 전, 창응대에게 창궁무애검진을 한번 펼쳐볼 것을 주문했고, 견식을 마친 후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손발을 맞춘 지 오래되긴 했어도 창응대는 창응대. 나름 견고한 검진을 펼쳐서 내심 감탄하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궁천은 지금 담벼락에서 시종 앞뒤로만 움직이면서 창궁무애검진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을 알려주고 있다.
창궁무애검진은 스무 명의 창응대가 각자의 위치에서 직선으로 이동하며 움직이는 게 가장 기본이다.
반면 팔의 움직임은 좀 더 자연스럽게 베기와 찌르기가 고루 섞여 있었는데, 물러서며 모여드는 순간에는 찌르기 위주로, 밖으로 뻗어 나가는 순간에는 베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찌르기!’
손우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예상대로 남궁천이 담벼락을 밟으며 빠르게 물러나면서 벽라검을 여러 번 내질렀다.
쉭쉭쉭쉭!
파바밧!
곧이어 화살처럼 튀어 나간 남궁천이 검신을 크게 휘두른다.
쒸이잉! 쒸이이익!
쩌어어엉!
고막을 터뜨려 버릴 것 같은 굉음에 손우곤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손우곤이 뒤에 선 창응대를 향해 소리쳤다.
“주군을 잘 보아라! 호흡 하나가 곧 지침이 된다!”
“예, 대주!”
창응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손우곤은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했다.
“어쩐지 전투 방식이 묘하다 싶었더니…… 그런 깊은 뜻이 있었나?”
원래 검을 사용하게 되면 나아가면서 찌르게 되고 물러나면서 휘두르는 게 보통이다.
주로 찌르기는 공격으로 이루어지고, 휘두르는 것은 방어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한데 남궁천은 처음부터 그 반대로 싸웠다.
나아가면서 베고, 물러나면서 찔렀다.
그 과정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처음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데 조금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살폈더니…….
‘그게 다 창궁무애검진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어.’
이젠 헛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남궁천이라는 저 신룡의 끝은 어디인가?
저토록 젊은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루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소가주?
모르긴 해도 당장 가주의 자리에 올라도 무공 하나만큼은 손색이 없으리라.
완벽하다.
모든 움직임이!
곱씹고 곱씹어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한 검로.
좁은 담벼락 위에서 싸우기 때문에 모든 공방은 직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여주기가 어디 있을까?
손우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남궁천의 모든 동작을 뜯어 살폈다. 뇌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무공이 고강한 것과 검진의 묘리를 파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남궁천은 무공도 고강하나 검진의 묘리를 너무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마치 모든 공력의 흐름을 눈으로 그리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지금 저 동작은 일 열에서 이루어질 공방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이 열!’
신기한 일이다.
한 사람이 검진을 구성하는 모든 자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일깨워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한편 혜광은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처음의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다.
연이어 터진 철탁의 공명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느낌이다.
공명을 버티기 위해 공력을 집중하면 오히려 더 큰 내상을 입어 버렸다.
‘니미럴! 똑같아! 너무 똑같아! 그 빌어먹을 대살성 놈과 너무 똑같단 말이다!’
철탁채를 휘두르고, 철탁으로 내려찍고.
콰아앙!
마침내 담벼락 하나가 통째로 뜯겨져 날아가듯 터져 버렸다.
사람 한 명이 장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한 공간이 생겨 버렸다.
그 공간을 사이에 두고 남궁천이 건너편 담벼락에서 서서히 기수식을 취했다.
혜광은 차마 남궁천이 있는 담벼락까지 몸을 날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남궁천과 손을 섞는 것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어째서냐? 이것이 피의 무서움인가? 아비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이냐?’
원래 강한 자와 무서운 자가 별개인 법이다.
혜광에게 있어서 진천랑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자였다. 한데, 그 아비의 얼굴이 자꾸만 저 애송이의 얼굴에 겹쳐진다.
‘이제…… 어쩐다?’
조금 더 시간을 끌다가 무승부로 마무리 지은 다음 승부를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는 게 최상책이리라.
한데 그 순간,
“혹시나 무승부 따위 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남궁천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저……! 지독히도 똑같은……!’
등골이 서늘해진 혜광이 입을 딱 벌리는데, 남궁천이 거짓말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들었다.
파바바밧!
“이익!”
혜광이 이를 악다물고 철탁채를 수직으로 쳐올렸다. 하나, 남궁천은 그마저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철탁채 끝을 사뿐히 밟더니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손우곤이 짤막한 탄성처럼 입을 열었다.
“역지(易地)!”
분명하다.
담벼락이 무너져 내려 어쩔 수 없이 허공을 날아서 이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저 동작은 창궁무애검진에서 직선상의 대원들끼리 서로 자리를 바꿀 때의 움직임과 똑같다!
‘그렇다면 이어질 공격은 양극합격술(兩極合擊術)!’
그의 생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남궁천이 그대로 옆으로 이동하는 게 아닌가?
슈슈슈슛!
전면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닌, 게처럼 옆으로 치닫는다!
그 속도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
이는 창궁무애검진에서 사용하는 역지술에 따른 반동력 때문이다.
정면으로 달리지 않고 옆으로 치달리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방향 전환과 동시에 재빨리 치고 나가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검진에서 서로 자리를 바꾼 대원들이 상대를 도륙하면서도 서로에게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함이다.
촤촤아아악!
혜광의 배를 어슷하게 내찌른 남궁천이 피를 뿌리며 건너편 담벼락으로 되돌아왔다.
한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반동을 이용해 다시 혜광에게 쇄도하는 남궁천!
촤아아악!
이번에는 베어내기로 혜광의 가슴팍을 그어 버렸다.
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터지면서 혜광이 휘청거린다.
만약 혜광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가슴을 베이는 정도가 아니라, 목이 날아갔을 터다.
“아아……!”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입을 척 벌리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궁천은 지금 왕복으로 두 번을 움직였지만, 이는 원래 검진을 이룬 대원들이 단 한 번에 자리를 교차하며 보여줘야 할 기술이었다.
그걸 일부러 왕복하면서 홀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 사람은 찌르기로, 한 사람은 베기로 정확히 어딜 어떻게 노려야 하는지!
박창수가 눈을 끔뻑이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다. 진짜…….”
누구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고절한 무공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로 부족해 미쳤다는 말이 나온다더니.
이건 뭐랄까?
고절해서라기보다는 너무나 완벽해서?
단지 담벼락 위에서 직선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는데도 창궁무애검진 전체가 어찌 움직이면 되는지, 그 모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머릿속에서 상상이 가능하다.
박창수가 차무진과 손우곤 옆으로 다가갔다.
“저는 결정했습니다! 행여나 두 분이 저분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저분을 따를 것입니다.”
“언제는 나를 보고 돌아왔다더니.”
손우곤의 핀잔에도 박창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남궁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실수였습니다.”
“거참, 서운하면서도 다행이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너보다 먼저 내가 저분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대주, 이제 정말…… 남궁세가가 비상하려나 봅니다.”
“추락한 적도 없었다. 그런 적이 있다면 그건 우리 자신일 뿐. 남궁세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박창수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도 혜광과 무공을 겨루는 남궁천.
누가 봐도 이젠 혜광이 밀리고 있다.
아니, 일방적인 싸움에 가깝다.
박창수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가슴께로 가져갔다.
‘저분이…… 내 주인이다!’
한편 혜광은 이제 전신이 피투성이로 너덜너덜해졌다.
여기저기 베인 옷자락은 걸레 조각이 되어 버렸고, 온몸은 피에 절은 고깃덩이 같았다.
“헉, 헉, 헉……!”
촤촤아아악!
“크아아악!”
다시 한번 남궁천의 검이 아랫배를 베며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닥칠 때마다 혜광의 투실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 휘청거린다.
이 좁은 담벼락을 두고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다니.
그것도 몇 번씩이나.
‘이건…… 이미 날 가지고 논다는 증거렷다……!’
약이 바짝 오르지만 대응할 방도가 없다.
그렇게 정신을 막 차리는데,
슈우우우웃!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벽라검!
“제기라아알!”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철탁채를 얼른 내리쳤다.
뚜카아앙!
튕기면서 그대로 바닥을 찍은 벽라검이 담벼락을 박살 낸다.
콰아앙!
파바바밧!
혜광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돌덩이를 밟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휘리리리릭!
남궁천이 바람처럼 그 뒤를 쫓았다.
파바바밧!
휘리리리릭!
허공에서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 이내 다시 담벼락에 착지했다.
탓!
타닷!
남궁천은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벽라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이잇!
순간 혜광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끝이구나……!’
담벼락 위에 서 있으면 저 검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
결국 혜광은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기에.
마음을 굳힌 혜광이 담벼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한데 그 순간 남궁천이 벽라검을 거둬들이더니 왼손을 쭉 뻗어 혜광의 승복을 홱 낚아채는 게 아닌가?
‘뭐, 뭐야? 뛰어내리지도 못하게 막는 거냐?’
파바밧!
부우우욱!
승복이 길게 찢어지면서 혜광의 신형이 팽이처럼 팽그르르르 돌았다.
그 순간 남궁천은 한동안 잊었던 전생의 습관이 또 하나 떠올랐다.
지독하게 쫓아다니던 무림맹 놈들에게 이따금씩 경고문을 남길 때 썼던 그 방법.
‘어디 오랜만에 한 번……?’
찰나 벽라검이 현란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촤아악!
길게 찢어진 승복이 휘날리는 사이, 남궁천의 검신은 달빛을 튕겨내며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아아……!”
이젠 장원 밖에서 지켜보던 양민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팽이처럼 도는 후덕한 스님과 길게 늘어져 휘날리는 승복, 달빛을 튕기며 춤추는 벽라검!
야밤의 비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검무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촤촤아아악!
승복이 완전히 찢어진 혜광은 등짝이 난자된 채 천천히 기울면서 쿵, 떨어졌다.
“끄으윽……!”
눈을 허옇게 뒤집은 혜광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엎어진 그의 등짝에는 남궁천이 검으로 새긴 장문의 글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기습인 듯 기습 아닌 기습 대성공.
“남, 남궁천이…… 이겼어.”
“우와아아아! 남궁천이 이겼다!”
“엄청난 비무였어!”
양민들이 함성처럼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던 손우곤이 벅찬 감동을 느끼며 포권을 취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주군!”
창응대가 일제히 외치는 소리가 광승회 장원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