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습관이 무섭다
“남궁천?”
광승회주 혜광(惠廣)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승복을 대충 걸치고 있었지만 풀어진 옷고름 사이로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어딘지 달뜬 숨을 연신 몰아쉰다.
대낮부터 여인네들을 불러 한바탕 즐긴 게 틀림없었다. 그는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게 영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구긴 채 괴불자와 파각을 보았다.
‘한심한…….’
파각은 그래도 멀쩡한 모습인데 괴불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어디 동네 왈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찾아와 징징대는 어린애 같은 꼴이다.
파각이 가느다란 눈으로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예,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흐음. 남궁천이라면 얼마 전 무연회에서 우승했다는 그 신룡이 아니오?”
“그런 듯합니다.”
“과연. 한창 기세가 오를 때이긴 하겠구려. 그렇다 해도 괴불 스님을 이렇게까지 만들 줄이야.”
혜광은 시종 인자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지만, 무릎을 꿇은 괴불자는 좌불안석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회주님.”
“내게 죄송할 것이 뭐 있소? 스스로의 수양이 부족함을 자책할 일이지.”
“정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쯧쯧.”
혜광이 잠시 혀를 차고는 파각을 돌아보았다.
“한데 남궁천은 남궁가에서도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호위무사들까지 대동하고 있었다면 그것도 아닌 것 같군.”
“아무래도 무연회 우승한 후로 처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하긴. 어린애들 놀이터라고 해도 강호 명성으로 보자면 무시할 수준은 아니지. 그래서 뭐라 하더이까?”
“그것이…….”
파각의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어졌다.
“말해 보시오.”
혜광이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재촉하자 파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그 시각까지 협상하러 오지 않으면 쳐들어오겠다고 합니다.”
“어디를? 여기를?”
“예.”
“남궁천, 그 아이가 직접?”
“예.”
“…….”
“…….”
“미친놈이구먼.”
혜광이 실소와 함께 대뜸 말하자, 파각도 부정하진 않았다.
“예, 미친놈 같긴 했습니다. 하나 그 아이를 호위하는 자들의 무공이 제법 강해 보였습니다.”
“몇 명이나 되오?”
“스물 정도였습니다.”
“스물이라.”
혜광은 조용히 뇌까리면서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작 스물이다.
반면 광승회 본채에는 여든 명이 넘는 스님들이 머물고 있다.
고작 스물을 데리고 이곳 광승회를 쳐들어오겠다고?
진짜 미친놈이 아닌가?
아니면 어딘가 모자란 놈이거나.
기가 차니 말도 잘 안 나온다.
혜광이 묵직한 철탁을 두드리며 나직이 읊조린다.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부처의 뜻이려니.”
“어찌하실 건지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그래, 그 아이가 얼마를 제시했소?”
“그것이…… 오만 냥이었습니다.”
“오만 냥?”
“예.”
이젠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남궁천이라는 그 아이가 미친 것은 확실하다.
하나 마냥 방심할 수는 없다.
이 강호는 희한하게도 미친놈들의 명줄이 더 질길 때도 있으니까.
“파각 스님이 보시기에 그 아이가 정말 쳐들어올 것 같았소?”
“그게 좀 애매합니다.”
“어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을 것인데, 그 아이의 말투와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충분히 그럴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적어도 곱게 미친놈은 아니란 말이구려.”
“예, 호위무사들 역시 딱히 말릴 기색도 보이지 않더군요.”
“흐음. 혹시 모를 일이니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스님들께 경계에 주의하라고 알려야겠구려. 시주는 내일 아침에 다시 걷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내일은 반드시 받아오셔야 합니다.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 임무라는 걸 잊지 마시오.”
“예, 회주 스님.”
“나가보시오.”
“그럼.”
파각과 괴불자가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나려는데, 혜광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괴불 스님께선 남아주시오.”
“스, 스님…….”
괴불자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혜광이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정양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
“도와드리겠습니다.”
일순 혜광의 표정이 무감하게 변하자 괴불자는 차마 항변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두 사람을 남겨둔 파각이 얼른 방에서 빠져나오더니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각이 괴불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때마침 등 뒤로 괴불자의 처절한 비명이 솟구쳐 올라왔다.
* * *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이현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광승회 장원은 그 이름만큼이나 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빛에 싸인 광승회 장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각 지붕 위.
흑의에 복면까지 쓴 스물한 명의 사내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 선 자는 남궁천. 좌측으로는 손우곤이, 우측으로는 차무진이 서 있었다.
남궁천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아주 대궐이 따로 없네.”
“저어…… 주군.”
손우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복면은…… 왜 쓰는 겁니까?”
“뭐?”
남궁천이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듯 바라보자, 손우곤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면 쓸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궁천이 정말 모르냐는 듯 입을 척 벌렸다.
“야밤에 싸우러 가는 사람의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네. 복면은 무인에게 필수품 같은 건데.”
“하지만 신분을 숨길 때나 쓰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한데 지금 광승회에 쳐들어가면, 누구라도 우리라는 걸 알지 않을까요? 물론 이렇게 빨리 기습당할 줄은 몰랐겠지만, 낮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체를 금방 알아챌 것 같습니다.”
“아…….”
그제야 남궁천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다시 입을 벌렸다.
‘설마 모르셨던 건가?’
손우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남궁천이 복면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예?”
“네 말이 맞다. 우린 복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간단히 벗어 던진다고?
손우곤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습관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로군.”
남궁천은 다시 한번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전생에는 늘 도망만 다녔고, 어쩌다 습격할 일이 생겨도 무조건 흑의에 복면을 착용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야밤에 기습이라면 당연히 복면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우리는 대 남궁세가다. 복면 따위를 쓸 필요가 없지. 당당하게 정문으로 쳐들어간다.”
“그럼 기습의 의미가…….”
“그래도 저놈들은 방비가 되지 않았을 테니 먹힐 거다.”
“그건 그렇군요.”
손우곤이 적당한 선에서 이해하고 넘어갔다.
사실 제대로 된 야습을 하려면 정문이 아니라 담을 넘어야겠지만, 그랬다간 남궁세가가 비열한 행위를 했다며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정체가 드러날 게 뻔하다면 차라리 정문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남궁천이 뒤를 돌아보고선 아직까지 복면을 쓰고 있는 창응대원들에게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가자. 지금은 아무도 너희들을 몰라보지만, 오늘 이후 모두가 너희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뭘 그리 당연한 말을…….
손우곤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는 당차게 대꾸했다.
“예, 주군!”
남궁천이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자,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복면을 벗어 던지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남궁천을 비롯한 한 무리의 흑의인들이 저잣거리를 가로지르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남궁천은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흑의인과 저잣거리라니.
이 얼마나 묘한 조합인가?
보통 흑의인이라면 지붕이나 담벼락을 타고 달리거나, 뒷골목에 숨어 다니게 마련이다.
살수, 강도, 도적, 그리고 도망자들이나 입는 게 흑의다.
한데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당당하게 저잣거리 대로를 활보하다니.
‘내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남궁천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차무진이 손우곤에게 속삭였다.
“왜 주군이 감개무량한 표정이죠?”
“곧 상권을 수복할 거라는 확신 때문이시겠지.”
“과연 그렇군요.”
그렇게 저마다의 생각을 품은 남궁천과 창응대가 마침내 광승회 장원 앞에 도달했다.
그들의 행보가 워낙 특이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으로는 구경꾼이 한가득 모였다.
“뭐야? 뭐야? 웬 흑의인들이 이리 많아? 전쟁이야?”
“글쎄. 저 사람들 누구지? 광승회와 한판 하려는 건가?”
“남궁세가라는 말도 있던데.”
“남궁세가? 남궁세가에서 왜?”
“광승회가 가져간 상권을 되찾으려고 한다는데.”
“에이, 남궁세가가 왜 저렇게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니는 건데?”
“그러게. 진짜 살수 아냐?”
온갖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남궁천이 정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스님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을 내걸었기 때문인지 문을 지키는 거구의 무사 따위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남궁천이 정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파바밧!
순간 허공으로 솟구친 남궁천이 정문에 큼직하게 내걸린 편액을 발로 걷어찼다.
콰자앙!
광승회라 새겨진 편액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비산했다.
“헉! 편액을……!”
“도대체 저자는 누구야? 꽤 어려 보이는데?”
사람들의 궁금증은 남궁천이 직접 해결해주었다.
“남궁세가에서 온 남궁천이 광승회로부터 이현의 상권을 돌려받기 위해 왔다!”
사자후가 터져 나오자 밤공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곧이어 안에서 누군가 우르르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빤히 정문을 노려보던 남궁천이 때를 맞춰 발을 내질렀다.
콰다앙!
공력이 실린 발길질에 문짝이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 그 바람에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오던 승려들이 문짝에 부딪히면서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이 모든 과정을 이현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지켜보았다.
남궁천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읊조렸다.
“대머리 새끼들, 마중이 늦네. 가자!”
그러자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함성을 내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장내로 달려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
“어우씨! 깜짝이야.”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앞장 서 있던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보았다.
떼로 몰려와 옆을 지나치는 창응대원들을 보며 남궁천이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몰려오는 함성만 들어도 몸이 반자동으로 달아날 준비부터 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젠 당당히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가도 되는 상황.
그렇다.
더 이상 예전처럼 숨죽이며 귀신처럼 다니던 시절이 아니다.
당당하게 소리쳐도 좋지 않은가?
남궁천이 심호흡을 하더니 사자후를 터뜨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퍽! 슈캉! 촤아악! 빠악!
주먹과 발이 날아가고, 검신이 춤을 춘다.
밤하늘의 별이 빛나고, 남궁천의 검신이 빛나고, 땡중의 대머리도 빛나고.
내 목청은 너무 좋고.
“우와아아아!”
푹! 촤아악! 퍽! 빡!
“우와아아아!”
스님들 사이에서 종횡무진하는 남궁천을 보며 차무진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손우곤에게 말했다.
“저어…… 주군께서 너무 신나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