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18화 (118/508)

118. 줄을 서시오

꿀꺽……!

박창수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휘이이잉-

때마침 찬바람이 불면서 박창수의 안면을 때렸다.

‘지금…… 뭐였던 거야?’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마치 목각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남궁천이 툭툭 칠 때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댔다.

만약 남궁천이 마음먹고 살수를 뻗었다면?

등골이 오싹하다.

우연인가?

그럴 리가.

우연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우연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법이다.

‘도대체 어떻게……?’

마주쳐 오는 바람에서 오래전에 맡았던 냄새가 난다.

죽음을 경계에 두었을 때 나는 냄새다.

죽음의 기운을 품은 바람의 냄새.

그야말로 시산혈해가 된 현장의 복판에 남궁천이 우뚝 서 있는 것만 같다.

단지 분위기만으로 이런 위압감을 주다니?

게다가 이건 마치 명문정파의 후기지수가 아니라, 시궁창 같은 강호 밑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흑도 무인에게서나 느껴지는 기운이 아닌가?

남궁천이 무심히 한 걸음을 내딛자, 박창수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뭐해? 내가 먼저 가?”

“그게…….”

박창수가 망설이자, 지켜보는 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그들 역시 박창수만큼이나 혼란한 기분이었다.

어떤 이는 박창수가 차마 공자에게 검을 겨누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한데 지금 박창수의 반응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박창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박창수가 남궁천을 향해 짓쳐 들어가다가 제때 힘을 거두지 못해 부대주와 부딪친 것으로만 보였다.

하나 박창수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남궁천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남궁천이 견정혈을 점했을 때 몸의 변화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검 끝에 무게가 실렸다.

뭐? 그 감각을 잘 기억하라고?

이래서야 무림 고수가 네 살배기 아이에게 검술을 처음으로 가르쳐주는 꼴 같지 않은가?

“뭐하냐니까?”

남궁천이 재차 묻자, 박창수가 표정을 굳히고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정신 차리자, 창수야! 운이든 뭐든 확인해보면 알 일!’

왼발을 앞으로 빼면서 자세를 낮게 숙이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자세를 갖춘다.

창궁검법의 제일초식을 준비하는 기수식이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무공 중에서도 이걸 선택한 건진 모르겠다.

다만 본능처럼 떠오르는 대로 기수식을 취했을 뿐이다.

한데…….

‘어……?’

박창수 눈이 휘둥그레진다.

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창응대원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의 자세.

왼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자세를 낮추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하다.

창궁검법의 창천일시!

“뭐야? 똑같은 기수식이잖아?”

“진검승부를 하겠단 건가?”

술렁이는 창응대원들.

박창수는 미간을 팍 구겼다.

‘날 너무 우습게 아는구나! 좋아, 그렇다면 제대로……!’

표정을 굳히던 박창수는 순간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싸늘한 날씨임에도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온다.

없다.

단 한 군데의 빈틈도!

화살처럼 튀어나갈 것 같은 벽라검은 단숨에 폐부를 찢고 들어올 것 같은 예기를 뿜어내고 있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남궁천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넌 이미 죽어 있다.’

그 말 그대로 송장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온다.

후우웅!

한 차례 바람이 일어나면서 남궁천의 장삼 자락과 머리카락이 풀썩 휘날린다.

한데 자연이 불러온 바람이 아니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불어 나가는 기풍이다.

‘이건…… 다르다. 완전히!’

같은 기수식을 취했으나 전혀 다르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난 기분이다.

찰나, 남궁천의 눈이 꿈틀거리는 순간!

‘제길! 온닷!’

남궁천은 번개처럼 날아들었고, 박창수는 미처 검을 완전히 뻗어내지도 못했다.

빛살처럼 날아든 벽라검이 그대로 심장을 뚫고 등으로 튀어 나간다.

아찔한 고통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그렇게 꺼져간다.

‘그렇게 나는…… 죽는다!’

이 모든 것이 눈 깜빡일 사이에 박창수의 뇌리에서 떠오른 전개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여 앞으로 일어날 미래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저 어린 나이에 보내오는 살기란 말인가?

어찌 이리 거칠고 패도적인……!

그 순간,

타앗!

이젠 진짜로 남궁천이 바닥을 차며 날아들었다. 동시에,

쿠웅!

박창수가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지켜보던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눈을 부릅떴다.

마침내 박창수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떨어졌다.

“졌습니다.”

매섭게 달려들던 남궁천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확실해?”

“똥인지 장인지 찍어 먹어볼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다음!”

남궁천이 돌아서며 말을 뱉자, 어금니를 꾹 씹던 차무진이 턱짓으로 한 사내를 가리켰다.

“네가 나서라.”

“알겠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맨 사내가 우렁찬 소리를 뱉어내며 성큼성큼 나섰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요!”

대검을 든 사내가 천천히 기수식을 취한다.

남궁천이 짝다리를 짚은 채 피식 웃었다.

“패기는 좋고. 눈치는 없고.”

“뭐요?”

“똥인지 장인지 먹어봐야 알고.”

“이익!”

순간 두건 사내가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쒸에엑!

조금 전 박창수와는 다르게 중검 위주로 검격을 펼친다.

남궁천은 이번에도 초견파공안으로 상대의 공력 흐름을 면밀하게 살폈다.

동시에 남궁천이 미끄러지듯이 움직이자 눈 깜빡할 사이에 두건 사내의 곁으로 그림자처럼 이동하는 게 아닌가?

‘치잇! 제법……!’

두건 사내가 휙 돌아서며 대검을 휘두르는데, 그보다 앞서서 남궁천이 벽라검을 검집쨰로 휘두르며 오금을 툭 쳤다.

“무릎을 조금 더 굽혀서 반동을 주고.”

“……!”

곧이어 날아든 검집이 이번에는 오른쪽 대둔근을 툭 건드렸다.

“공력을 오른발에 더 실어.”

“큿!”

“그대로 무소처럼 나아가라.”

펑!

이번에도 남궁천이 일장을 날리자, 그대로 튕기듯 날아간 두건 사내가 차무진을 향해 엉겁결에 검을 뻗었다.

차무진이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이런 썅, 자꾸 왜 나한테만……!”

쩌어어엉!

이번에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무진이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났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만…… 이거 어쩌면?’

조금 전 창수의 공격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다.

평소 자신이 까다롭게 여기는 쪽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나?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그렇다면 내 약점은 어찌 알고?’

물론 경험이 노회한 초고수들은 무인의 걸음걸이나 습관, 사사로운 행동만 보고도 약점을 유추하는 능력이 있다고도 한다.

하나 남궁천은 노회하기는커녕 아직 세상 구경도 제대로 못한 아이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이게 만약 자신에게도 뭔가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약점을 방어하는 방법이라도 일깨워주는 것이라면?

‘제길,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터.’

차무진이 어이없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 *

“누님, 지금 뒷산에서 난리도 아니랍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궁표가 싱글벙글 웃었다.

남궁설희가 미간을 좁히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새를 못 참고 살펴본 게냐?”

“제가 직접 간 건 아니고, 시종을 시켜서 슬쩍 보고만 오라고 일렀습니다.”

“쯧쯧.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일수록 심중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거늘.”

“심중은 무겁되 엉덩이는 가벼워도 되지 않겠습니까?”

“몸이 가벼우면 마음도 가벼워지는 법이니라.”

남궁설희의 빈틈없는 설교에 남궁표도 더 이상은 말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거나 지금 뒷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창응대가 불복 선언이라도 한 게냐?”

“비슷합니다. 글쎄, 창응대원들이 남궁천 그 아이를 상대로 비무를 치르고 있다지 뭡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공 실력이라도 증명하지 못하면 절대 따를 수 없다는 항명 아니겠습니까? 하하!”

“창응대라면 그리 나올 만도 하지.”

“역시 괜한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이걸로 속이 좀 후련해졌습니다. 이로써 대살성의 사생아가 본 가를 이끄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강호의 가장 큰 변수가 무엇인지 아느냐?”

“글쎄요. 소제가 식견이 짧아 모르겠습니다. 누님, 그게 뭡니까?”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

“그러니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잠자코 지켜만 보아라.”

“쩝, 알겠습니다.”

“시종 시켜서 염탐하는 짓은 그만하고.”

“예, 당분간 신경 끄고 지내겠습니다.”

남궁표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창응대의 대응 방식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남궁설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밖을 보았다.

‘비무라…….’

* * *

“졌습니다!”

손등에 화상 자국이 있는 사내가 포권을 하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패배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컸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궁천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말했다.

“다음.”

“잘 부탁드립니다!”

눈이 족제비처럼 찢어진 사내가 성큼 나서면서 포권을 한다.

남궁천이 사내 뒤로 도열한 창응대원들을 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희들 뭐냐?”

“예?”

“애초에 비무하겠다는 놈들은 일곱이었는데, 갑자기 다들 왜 이래?”

남궁천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던지자 다들 먼 산을 보며 딴청을 부린다.

이미 처음에 나섰던 일곱 명은 부대주 차무진을 포함해 모두 상대한 후였다.

한데도 창응대원들은 남궁천과 비무를 하겠다며 줄까지 선 상황.

어디 그뿐인가?

“야, 넌 또 뭐야?”

남궁천이 제일 뒤에 서 있는 박창수를 검집으로 가리켰다.

박창수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헤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하고 싶어서요.”

“뭐, 이런……!”

“부디 사양치 말아주십시오!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수 배운다는 의미는 진짜 말 그대로 배우겠다는 뜻이었다.

창응대원들은 남궁천이 앞서 일곱 명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단점을 보완하고, 깨달음까지 던져준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궁천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비무를 하겠다며 너도나도 줄을 선 상황.

‘하아. 이게 아닌데…….’

얼씨구? 박창수 뒤로 차무진도 슬쩍 다가선다.

결국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들이 날로 처먹으려고 하네. 오늘은 이걸로 끝. 불만 있는 놈들은 꺼져.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어엇? 제발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들은 아직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시끄럽다. 그러게 기회를 줄 때 나섰어야지.”

“어어? 공자님! 아니, 주군! 소가주님! 주인니임!”

언덕을 휘적휘적 내려가는 남궁천 뒤로 창응대원들이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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