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줄을 서시오
“제법 바람이 쌀쌀해졌군.”
찻잔을 내려놓은 남궁설희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앙상한 가지에 남은 나뭇잎이 몇 개 없다.
늦가을을 넘어 초겨울이란 생각이 드는 날씨다.
“쯧.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겨울 맞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원.”
마주 앉은 남궁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궁설희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보름이면 결정될 일이니, 그새에 다시 돌아갔다가 올 수도 없고.”
“아니, 누님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까짓 게 무슨 수로 보름 만에 그 문제를 다 해결한단 말입니까?”
“젊은 객기겠지.”
“누님은 마음씨도 좋으시군요. 그걸 객기라고 포장해 주시고.”
“그게 포장이더냐?”
“포장이죠. 그건 객기가 아니라 제가 볼 땐 그냥 광기입니다. 미친 거라고요.”
“말에 품위가 없다. 비록 지금은 본 가가 움츠리고 있다지만 한때 강호 중심에 섰던 가문이다. 경박한 말투는 삼가거라.”
“솔직히 저는 그놈을 보면 말이 곱게 나가질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보름이라니? 벌써 닷새가 지났습니다. 운이 좋아서 무연회 우승한 걸 가지고 제 실력으로 착각하니 그런 무모한 말을 떠벌리는 거죠. 뭐, 이참에 호적을 파버리는 건 잘 된 일이긴 합니다만.”
“영악한 아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남궁설희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운이든 뭐든 무연회에서 우승하면서 신룡으로 떠오른 아이다. 그런 아이를 본 가에서 내치면 그것도 말이 떠돌 수밖에 없다. 그 아이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 상황에서 본 가가 그 아이를 내치면?”
“본 가가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어쩌면 그 아이는 거기까지 계산했을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면…….”
“아니면?”
정말 해낼 자신이 있거나.
하지만 남궁설희는 그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되기에.
벌써 닷새가 지났다.
앞으로 남은 기한은 열흘.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는 일은커녕 창응대를 재소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리라.
“누님.”
남궁표의 부름에 남궁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
“어차피 그 사생아 녀석은 창응대도 소집도 못 하고 끝날 겁니다. 그럼 놈을 내쫓진 못하더라도 소가주를 정하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필이가 요즘 무공이 꽤 올라왔습니다.”
“네 아들을 소가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냐?”
“누님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남궁설희가 피식 웃었다.
“소가주의 자리를 노리기에는 나이가 좀 많지 않으냐?”
“나이가 대숩니까? 형님도 늦은 나이에 소가주가 되셨었는데요. 뭣하면 제 손자 녀석도 있고요.”
“소가주 자리에는 관심도 없더니?”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남궁표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솔직한 모습이다.
하나 남궁설희는 나쁘게 보지 않았다.
원래 사람 심리라는 게 다 그런 법 아니겠나?
망해가는 집안에는 그림자도 드리우기 싫은 법이고, 흥하려는 집안에는 어떻게든 숟가락 하나 더 얹으려고 용을 쓰게 마련이다.
안 그런 척하는 것보단 이렇게 대놓고 협조해달라고 나오는 게 낫다.
남궁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것도 없다. 그게 순리에 맞으니.”
“감사합니다, 누님.”
“하나 그 아이가 행여나 보름 안에…….”
남궁설희가 말을 꺼내다 말고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그건 말이 안 되지.
그녀의 뜻을 짐작한 남궁표도 피식 웃었다.
“누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아이는 무연회에서 평생의 운을 다 쏟아부은 셈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기적이 그리 자주 일어나진 않지요. 아마 지금쯤 창응대도 소집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게 뻔…….”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남궁설희가 미간을 좁히고는 돌아보자, 막내 남궁원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남궁설희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힐책했다.
“너는 어찌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누님! 형님! 그놈이 모았습니다!”
“뭐?”
“무슨 말이냐?”
“허참, 글쎄 그놈이 창응대를 재소집했단 말입니다!”
남궁설희와 남궁표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남궁표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창응대가 어째서…….”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니까요? 지금 뒷산에 창응대원 스무 명이 다 모여 있다고요!”
“그런……!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남궁표가 성큼 나서려는데, 남궁설희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누님!”
“우리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이제 겨우 창응대를 소집했을 뿐이야.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
“끄음.”
“네가 놀라서 뛰어나가 구경하면 그 녀석은 더 기고만장해질 뿐이겠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힌 남궁표가 자리에 앉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지켜보자고. 그 아이가 어디까지 발버둥을 치는지.”
남궁설희의 눈길이 창밖의 앙상한 가지로 향했다.
* * *
언덕 위에 스무 명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험악해서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뺨에 칼자국이 길게 난 무인이 손우곤을 향해 투덜거렸다.
“대주님, 진심입니까?”
“그래, 진심이야. 더 이상 묻지 마라.”
“도대체 그 사생아가 뭘 어떻게 한 겁니까?”
“말조심해라. 너희들 주인이 되실 분이다.”
“대주님! 저희들은 대주님 보고 모인 겁니다! 아직은 그 사생아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요!”
“좋을 대로 생각해. 강요는 하지 않을 테니. 열흘 뒤에 여길 떠나도 되고 머물러도 된다. 그 이상은 나도 막지 않아.”
“쳇, 대주님 말씀이니까 딱 열흘만 버텨보죠.”
칼자국이 난 사내가 투덜거리는데, 마침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남궁천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손우곤이 남궁천 앞으로 다가가 포권했다.
“나오셨습니까?”
“그래, 애들은 다 모았고?”
“예, 전원 소집했습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응대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창응대원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눈빛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대주의 명으로 모이긴 했지만, 아직 남궁천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역력하다.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 말도 더럽게 안 듣게들 생겼다.”
“……!”
창응대원들이 발끈하려는데, 남궁천이 먼저 말을 이었다.
“너희들, 나 마음에 안 들지? 원래 사내라는 게 그렇다.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겐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지. 암, 진정한 사내라면 그래야지.”
“……?”
“그래서 기회를 주려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나와라. 한 놈이든, 두 놈이든 상관없으니까 나와.”
“나가면 어쩌시려고?”
칼자국 난 사내가 빈정거리듯 물어보자, 남궁천이 그를 돌아보았다.
“원래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맞아야 말을 듣는 법이지.”
“하! 그래서 우리를 때리시겠다? 뭐, 이런…….”
“지위를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패겠다는 게 아니야. 정당한 비무를 치를 기회를 주겠단 거다.”
“비무?”
창응대원들이 웅성거리면서 서로를 보았다.
잠시 후 칼자국의 사내가 성큼 나섰다.
“한 번 해봅시다. 정말 내가 이기면 이대로 내 갈 길 가도 되는 거요?”
“물론이지. 이름이?”
“박창수요.”
“그래, 또 나올 사람 없나?”
대원들이 눈치만 보고 있는데, 마침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차무진이 슬그머니 나섰다.
“어……? 부대주님이?”
“그럼 나도 나가볼까?”
차무진을 시작으로 대여섯 명의 대원들이 더 앞으로 나섰다.
차무진이 남궁천을 노려보며 물었다.
“정말 비무에서 이기면 군말 없이 보내주는 거요?”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어?”
“좋소. 어디 한번 해봅시다.”
“더 나올 사람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회 줄 때 나와.”
하지만 더 이상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 손우곤을 힐끔 볼 뿐.
대주가 나서지 않으니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더 이상 나서는 이가 없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 일곱 명. 자, 그럼 시작하지. 누구부터 덤빌 거냐?”
상황이 급진적으로 변하자 박창수가 차무진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거 정말 하는 겁니까?”
“그런 것 같다.”
“하! 무연회 우승하더니 실전에서도 통하는 줄 아는 모양이네요.”
박창수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남궁천이 고개를 돌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덤벼보면 알 것 아냐, 이 새끼야.”
“뭐요?”
“왜? 너희들 어차피 내 새끼 될 것 아냐? 내가 낳은 새끼는 아니더라도 내가 거둘 새끼들이지.”
“제길! 좋소! 어디 해봅시다! 부대주, 제가 먼저 나가도 되겠습니까?”
차무진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심하지 마라. 그래도 무연회 우승자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박창수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 남궁천을 마주 보며 섰다.
휘이이잉.
두 사람 사이로 찬바람이 불면서 비쩍 마른 낙엽 하나가 거칠게 휘날렸다.
스르릉.
박창수가 검을 뽑아 들자 금방이라도 전신을 난자할 것만 같은 예기가 뿜어진다.
남궁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패기가 좋군.”
“여유 부리는 것도 이제 끝이오. 일은 그쪽에서 먼저 벌였으니 원망도 마시고.”
“넌 입으로 싸우냐?”
“이익……!”
박창수가 어금니를 빠득 갈더니 순간 바닥을 차며 튀어나갔다.
파바밧!
“어디 그럼 몸으로 싸우는 것도 한 번 보시든지!”
쩌어엉!
찰나지간에 뽑아 든 벽라검이 박창수의 검을 막아냈다.
‘쾌검이군.’
남궁천은 단박에 박창수의 특징을 알아보았다.
주로 사용하는 건 토계(土系)의 기운.
‘빠르긴 하나 무게가 지나치게 가볍다. 보법도 성급하고.’
진단을 끝낸 남궁천이 토계와 상극을 이루는 목계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남궁천의 손끝을 타고 검신으로 달려나간 공력이 박창수의 토계 기운을 파고든다.
나무뿌리가 흙을 파고들 듯!
순간 찌릿한 통증을 느낀 박창수가 짤막한 신음을 뱉어내며 물러났다.
카차앙!
“큿!”
이어서 남궁천이 박창수의 틈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파밧!
“헛!”
박창수가 놀라서 물러나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서 남궁천이 검신을 뻗어 박창수의 종아리를 검면으로 찰싹 때렸다.
“무릎을 좀 더 굽혀서 무게를 싣고.”
쉬이이잇!
박창수가 휘청거리는 틈에 배후로 돌아간 남궁천이 견정혈을 점했다.
탁!
“공력을 좀 더 뭉쳐서 운기하고!”
“크윽!”
이게 뭔 짓……!
박창수가 치미는 짜증을 눌러 참으며 몸을 홱 돌렸다.
한데 이미 남궁천은 그보다 빨리 뒤쪽으로 돌아선 후였다.
남궁천이 등 복판에 일장을 날렸다.
퍼엉!
“발끝은 가볍지만, 검 끝은 무겁게 가라.”
파바바밧!
등을 떠밀린 박창수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검을 내질렀다.
중심을 잡기 위한 동작이었으나, 졸지에 맞은편에 서 있던 차무진이 검격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
쩌어엉!
촤르르륵!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검을 막아낸 차무진이 뒤로 일 장이나 미끄러졌다.
엉겁결에 공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멍하니 보았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박창수의 등 뒤에서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수야, 지금 그 감각을 잘 기억해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