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시험은 찢어발기는 것
“뭣이? 뚫린 입이라고 일단 내지르고 보면 다 되는 줄 아느냐?”
남궁설희가 표독스럽게 쏘아보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될 건 있나요?”
“뭐, 뭣?”
“일단 내질러야 행동도 하는 거죠. 탁자에 둘러앉아서 이러쿵저러쿵 탁상공론만 펼치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저, 저……!”
“어차피 묘수가 나오지 않으니 지금껏 처리 못한 문제들 아닙니까? 제가 다 해결하겠다니까요?”
“네가 무연회 우승을 하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강호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느냐?”
“에이, 너무 나가진 마시고. 지금은 강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소가주 문제를 얘기하는 중이니까요.”
“저, 저……! 도대체 저놈의 버르장머리는 어떻게 된 거야!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 좀 봐!”
“회의하는 자리 아닙니까? 의견 제시를 말대꾸라고 표현하시면 회의를 어떻게 합니까? 윗사람만 말할 수 있는 거면 그건 회의가 아니라 하명이죠.”
“아니, 뭐 저런……!”
“게다가 그리 따지면 외고모 할머니께서도 가주님께 따박따박 말대꾸하시는 셈이 되는 거고요.”
이쯤 되자 남궁설희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남궁화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이 아이가 어쩌자고……!’
이젠 남궁천에게 좀 적응이 되려나 했는데, 여전히 낯설다.
자주 뵙지도 않은 고모님에게 이리도 대들다니?
남궁화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창응대를 재소집해도 유지할 수 있는 자금력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면 그걸 네놈은 해결할 수 있단 거냐?”
“그렇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딴……!”
“지켜보면 아실 겁니다. 제가 하는지 못하는지. 그리고 못하면 그때 가서 욕을 하시든 내치시든 마음대로 하셔도 될 일입니다.”
이젠 남궁화뿐만 아니라, 다른 수뇌 인사들마저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하나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옳은 소리니 뭐라고 딱히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
남궁천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창응대를 재소집해서 그들을 이끌고 이현의 상권 문제를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제 자격은 증명된 것 아닙니까?”
워낙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묘하게 남궁설희와 남궁천의 자존심 대결 양상처럼 보인다.
실제로 남궁천이 노린 것이기도 하다.
대개의 경우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 어느새 사실관계는 무관해지고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더구나 대립하는 상대가 지금처럼 한참 어리다면 더욱 그럴 터.
아니나 다를까, 화가 잔뜩 난 남궁설희가 버럭 소리쳤다.
“오냐! 그럼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물었다!
남궁천이 내심 쾌재를 부르는데, 남궁표가 깜짝 놀라며 말렸다.
“누님! 감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누님!”
“저 아이가 말하지 않았느냐? 창응대를 규합하고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겠다고.”
“그거야…….”
남궁표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남궁설희의 표정을 보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구나. 누님은 지금 저 아이를 아예 매장해 버릴 작정이시구나.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남궁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누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남궁설희가 다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분명 네 입으로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이니까 반드시 해낼 거라고 믿는다.”
“물론입니다.”
“하나!”
“……?”
“가주에 대한 신뢰에는 가문의 명운을 걸린 법. 만약 네가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어찌할 생각이냐?”
내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남궁천이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되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하시는데요?”
“나가거라.”
“예?”
“네 발로 나가거라. 본 가에서.”
“……!”
순간 장내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누군가 입을 열면서 술렁임이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본 가에서 나가라니.
한마디로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나 그 누구도 말이 지나치다는 의견을 내진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내심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고모님! 그건 지나친……!”
“뭐가 지나치다는 것이냐? 소가주가 될 녀석이 지키지도 못할 말을 생각 없이 툭툭 뱉어댄다면 장차 이 가문이 어찌 되겠느냐? 소가주는 장차 가주가 된다는 뜻이다. 본 가의 미래란 말이야. 한데 그 정도의 각오도 하지 않고 덤비겠다는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남궁화가 다시 나서려는데, 남궁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남궁검의 차가운 눈빛이 남궁설희에게 한 번 향했다가 다시 남궁천에게 날아들었다.
“설희의 말도 일리가 있다. 소가주는 본 가의 미래.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지. 스스로 뱉은 말에 책임 정도는 질 줄 알아야겠지. 어쩌겠느냐? 너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
이제 모두의 시선이 남궁천의 입으로 향했다.
남궁설희가 내심 조소를 머금었다.
‘어떠냐? 이놈아. 당장에라도 말을 주워 담고 싶을 테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라. 그럼 호적에서 파 버리는 일까진 없을 터. 아무리 본 가가 기울 대로 기울었다지만 소가주는 아무나 되는 줄…….’
“당연히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받아들이겠습니다.”
뭣이?
호적에서 파 버린다는데?
남궁설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데, 마주 앉은 남궁표가 가만히 조소를 지으며 눈빛을 보내왔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저 녀석을 본 가에서 내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남궁설희는 영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너는 지금부터 창응대를 규합하고 이현의 상권을 수복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다시 불쑥 나선 사람은 남궁설희였다.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기한은요? 기한도 정해야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끝도 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네 생각엔 언제까지가 좋겠느냐?”
“글쎄요. 늦어도 석 달 안에는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궁설희가 말하자, 남궁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로 자신하면 두 달 만에도 해결할 겁니다. 두 달의 기한을 주도록 하지요.”
“형님, 누님들. 제 생각에는 두 달도 길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이 어떨지요?”
“그래도 한 달은 너무 촉박하지 않겠나?”
“하면 한 달 하고 보름의 시간을 더 주는 건 어떻습니까?”
남궁원의 말에 남궁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노인네들이 진짜 너무들 하네.
본인들은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하는 걸 나더러 뭐? 한 달?
이제 수뇌 인사들까지 나서서 한 달이냐, 두 달이냐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남궁천이 손을 짝 마주쳤다.
“그런 걸로 너무 진지하실 필요 있습니까?”
“……?”
“보름 안에 해결하지요. 못하면 제 발로 나가겠습니다.”
“……!”
* * *
황산 인근의 서현(歙县)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복성이 헐떡이며 올라섰다.
“헉, 헉……! 공자님. 천천히 좀 가요.”
“시간이 보름밖에 없잖아.”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집안사람들이 공자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데 보름이라뇨?”
“그럼?”
“예?”
“눈엣가시처럼 여기니까 얌전히 숨죽이며 살라는 거냐?”
“아이참,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적어도 빌미는 주지 말자는 거죠, 뭐. 보름 만에 그 일들을 해결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
“복성아.”
“예, 공자님.”
남궁천이 전에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부르자, 복성이 약간 긴장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남궁천이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세상이 날 시험에 빠트리면 어찌 해야 하는 줄 아느냐?”
“글쎄요. 그 시험에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맞다. 그럼 또 다른 질문.”
“……?”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과 한솥밥을 먹고 살려면 어찌 해야 하는 줄 아느냐?”
“…….”
“둘 중 하나다. 납작 엎드려서 평생 기어 다니거나, 아예 그들 위에 올라서 버리거나.”
“너무 어려운 문제네요.”
“세상살이 쉬운 게 어디 있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복성이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럴 때 보면 남궁천은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어른 같지 않은가?
남궁천이 정광 어린 눈으로 복성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워낙 시리고 단단했기에 복성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기다렸다.
“세상이 날 시험에 빠트리면, 그 시험을 짓밟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무난하게 통과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단 말이지.”
“그래도 보름은 너무…….”
“딱 적당해. 그 정도는 되어야 저들이 던진 시험을 찢어발기는 수준이 되지. 자, 가자.”
“예, 공자님. 그래도 조심하세요. 창응대주는 요즘 집안 사정으로 많이 까칠한 데다 공자님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고?”
복성이 부정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뭘 새삼스레. 상관없어. 호의를 가지든 말든 말만 잘 들으면 되니까.”
“호의가 없는데 말을 잘 들을까요?”
“잘 듣게 만들어야지. 네가 해준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잘 듣게 될 거야.”
남궁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복성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마을로 들어선 남궁천은 복성이 안내해주는 대로 창응대주의 집으로 곧장 찾아갔다.
한 세가의 대주씩이나 지낸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허름한 모옥이었다.
“계십니까?”
복성이 싸리문을 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손우곤 창응대주님 안 계십니까?”
한데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복성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모양인데요?”
“아냐, 있어.”
“예?”
때마침 낡은 문짝이 열리면서 깡 마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뉘시오?”
여인의 몰골은 차마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앙상했는데, 눈 밑으로는 짙은 그림자가 있었고, 양쪽 뺨은 푹 꺼져서 마치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여인이 헝겊을 대고 기침을 하자 거무죽죽한 핏물이 배어나온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복성이 안절부절못하자, 여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썩 좋지 않아서. 한데 뉘신지?”
“아, 남궁세가에서 왔습니다. 손우곤 대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복성은 굳이 남궁천을 소개하지 않았다.
남궁천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여인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는 답했다.
“그이는 지금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언제 돌아오실까요?”
“잘 모르겠어요. 어찌……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복성이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여인이 몸도 좋지 않아 보이니, 다음에 다시 오는 게 낫지 않겠냐는 표정이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나섰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지. 그 전에…….”
“……?”
“잠시 진맥을 해봐도 될까?”
“저를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그러시지요.”
남궁천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여인의 손목을 잡았다. 곧이어 한 줄기 공력을 불어넣자, 여인의 몸을 타고 흐르는 내력이 초견파공안으로 낱낱이 파악됐다.
‘꽤 심각하네.’
그때였다.
“웬 놈들이냐!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돌아보니, 구릿빛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의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창응대주 손우곤이었다.
손우곤이 남궁천을 알아보곤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네놈은 대살성의 사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