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09화 (109/508)

109. 절대 말이 안 되는데

순간 객점의 분위기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물론, 주변의 다른 손님들도 수저질을 멈추고 그대로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히꾹.

갑자기 이목이 집중되자 윤종승이 딸꾹질을 했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듣다못해 술기운에 나섰는데, 이런 분위기가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남에게 정식으로 비무를 청한 건 난생처음이 아닌가?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 노인이 눈살을 슬그머니 찌푸렸다.

그는 가주 남궁검의 둘째 아우인 남궁원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가인(家人)들 중에서는 제일 윗사람.

“황산윤가라고 하셨는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자, 윤종승은 내심 뜨악하면서도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황산윤가 막내 윤종승입니다!”

황산윤가라는 말에 남궁원의 표정에 언뜻 가소로움이 스친다.

황산윤가라니.

언제부터 황산윤가가 감히 남궁세가 앞에 이리 나서서 뻣뻣하게 말을 걸었던가?

예전 같았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졸가이건만.

하나 시대는 변했고 남궁세가는 기울어질 대로 기울었으니, 작금의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미 황산 인근에서는 남궁세가보다도 황산윤가가 더 권세를 누리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윤 공자를 이리 만나게 되어 반갑네. 노부는 남궁원이라 하네.”

“예, 반갑습니다. 어르신.”

윤종승은 취기를 풀풀 풍기면서도 나름 예를 다했다.

이어서 남궁현도와 남궁진이 차례로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두 사람은 남궁원의 아들과 손자였는데, 남궁진이 바로 윤종승에게 비무 신청을 받은 청년이었다.

그 옆에는 방계에 속하는 장원식과 장손덕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차례로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한 차례 통성명이 끝나자 윤종승은 새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하게 됐다.

“어음…… 제가 낮술을 하다 보니 다소 결례를 저지른 것 같…….”

“무연회에서 팔 강까지 오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잖아도 무연회의 영웅들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리 한 수 배울 기회를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남궁진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이제 와서 어딜 빠져나가려고?’

보아하니 취기에 객기가 발동한 모양인데 남궁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굴러온 호박이 아닌가?

이 자리에서 비무 신청을 받아들여서 황산윤가의 코를 납작하게 해둔다면 가문의 위신을 조금이나마 세울 수 있으리라.

게다가 무연회 팔 강 진출자라니.

‘황산윤가의 막내가 어지간히도 망나니라던데. 이번 무연회 수준은 정말 형편없었던 모양이군.’

잘만 하면 이 기회에 가문의 정회를 앞두고 자신의 인지도까지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더불어 남궁천처럼 자신이 무연회에 나갔더라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는 걸 증명할 기회이기도 하고.

반면 윤종승은 조금씩 술기운이 달아나면서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뭐 굳이 나한테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남궁세가라면 충분히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오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하하.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설마 저 같은 녀석은 무공을 논할 가치도 없다는 뜻인지요?”

“그건 아니고…….”

“그럼 모쪼록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제안을 주시니 이 남궁모는 그저 감개무량할 뿐이외다.”

히꾹.

참았던 딸꾹질이 다시 나오는 윤종승이었다.

* *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여?”

“쉿. 비무를 한다잖아”

“갑자기 뭔 비무여?”

“남궁세가 사람과 황산윤가의 막내 공자가 한판 붙는다는구먼.”

“황산윤가의 막내 공자라면…… 그 개망나니?”

“쉿! 듣겠네, 이 사람아.”

황산객점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비교적 너른 대로에는 남궁진과 윤종승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윤종승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주눅이 들어 상기가 된 것인지, 취기 때문인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반면 시종 미소를 짓는 남궁진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남궁진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무연회 팔 강에 오르신 윤 형께서 한 수 가르침을 주시겠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인다.

“뭐? 윤 공자가 팔 강이라고?”

“아니, 남궁천이 우승했다는 소식은 들은 것 같은데, 저 개망나니도 팔 강에 올랐었어?”

“도대체 이번 무연회는 어떻게 된 거야? 수준이 너무 떨어진 것 아냐?”

다분히 예상했던 반응에 남궁진이 내심 웃었다.

반면 윤종승은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제길, 이놈의 주둥이가 방정이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래도 상대는 남궁세가가 아닌가?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들이 익힌 무공도 저물진 않았을 터다.

물론 남궁세가 무인이라고 죄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아니겠지만, 기본적인 무위가 있지 않겠는가?

‘그 남궁천만 봐도 말이지.’

긴 한숨이 절로 토해진다.

하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 쫄지 말자! 이래 봬도 오대세가의 자제들을 꺾었고, 무연회에서는 팔 강까지 오르지 않았더냐?’

윤종승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궁천이 준 토시를 아직까지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토시값은 백무극이 다 치렀다. 당분간 네가 써라.”

남궁천이 자신에게 남긴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완전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남궁천이 자신에게 뭔가를 베풀었다는 것만은 분명했기에 내심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남궁천, 내 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기…… 려나?’

조금 자신은 없지만 최선은 다하리라.

윤종승을 보면서 남궁진도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시퍼런 날붙이가 빛을 받아 번쩍인다.

남궁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권법인가? 아니면 장법?’

토시를 차고 있는 걸 보면 권장법으로 맞서리라.

갈수록 가관이다.

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모를까, 후기지수끼리라면 아무래도 병장기를 든 쪽이 조금이나마 유리할 수밖에 없다.

‘쯧, 미안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지. 나를 위해 희생을 좀 해줘야겠다. 어차피 비무도 먼저 제안한 것이니 억울할 건 없을 터.’

옆을 힐끔 돌아보니 아버지 남궁현도와 조부 남궁원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궁진이 심호흡을 하다가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윤종승이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남궁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제법이군.’

의외로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가상의 검로를 그려보지만 양 팔에 차고 있는 토시가 영 거슬린다.

‘뭐, 한번 흔들어 보면 알겠지!’

생각을 마친 남궁진이 순간 바닥을 차며 튀어 나갔다.

찰나, 윤종승이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눈에 힘을 주었다.

‘온다!’

파바밧!

남궁진의 신형이 갈지자로 흐트러지며 어지러이 짓쳐들어온다.

‘이런! 엄청 빠르…… 지 않네?’

윤종승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희한하게도 남궁진의 움직임이 눈에 고스란히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간 남궁천과 대련을 하던 걸 떠올리면 마치 힘을 최대한 빼고 달려드는 것 같다고나 할까?

‘혹시 날 봐주는 건가?’

게다가 검에 실린 무게 역시 남궁천과 비교하면 나풀거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볍지 않은가?

딱히 피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윤종승이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뜻밖에도 정면으로 부딪쳐 오자 남궁진은 내심 당황했다.

‘뭣? 피하지 않아?’

쒸이익, 땅!

검이 윤종승의 토시와 부딪치면서 강하게 울렸다.

“크읏!”

손아귀를 타고 전해진 진동이 어깨까지 떨게 만든다.

윤종승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검을 완전히 뻗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남궁진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윤종승이 더욱 빠르게 품으로 파고들며 일장을 내질렀다.

슈우우욱!

‘완전한 연꽃을!’

창졸지간 남궁진은 독수리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기분을 느꼈다.

‘제길, 어딜!’

이를 꽉 다문 남궁진이 온 힘을 다해 몸을 회전했다.

쉬따앙!

불꽃이 터지면서 남궁진의 검이 윤종승의 토시를 가까스로 쳐냈다.

쉬퍼엉!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때린 윤종승의 손끝에서 장력이 폭발한다.

남궁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건 또 뭐야?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윤종승은 분명 황산윤가의 개망나니라고 소문나지 않았던가?

무공도 별로 강하지 않으면서 약자나 괴롭히는 몹쓸 녀석이라고.

한데 이게 별로 강하지 않은 무공이라고?

조금 전 일격은 한 대 잘못 맞았다간 골로 갈 수준인데?

옆에서 지켜보던 남궁원과 남궁현도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게 비무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윤종승이 기세를 타고 재빨리 남궁진을 쫓아갔다.

‘느리다. 확실히 느려! 남궁천에 비하면 이건…… 장난 수준이잖아?’

처음에는 남궁진이 자신을 봐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 지금 남궁진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보면 그건 아니리라.

그러고 보니 싸우면서 상대의 표정까지 관찰할 여유가 생기다니.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발전이 아닌가?

‘이거 어쩌면…… 정말 이길 수 있을지도?’

가슴 한편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파바바밧!

발끝에 공력을 실으면서 윤종승이 더욱 세차게 나아갔다.

펑! 쉬펑! 깡! 까강!

허공을 때리는 장력과 토시에 부딪치는 검격이 마구 소음을 터뜨린다.

의외로 박빙을 이루자 지켜보는 이들은 어느새 손에 땀을 쥐며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남궁진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검에 힘이 실리고 속도도 높아지면서 꽤 묵직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까앙! 쩡!

파바바밧!

거듭된 공격을 윤종승이 연이어 막아내며 물러났다.

토시를 착용한 양 팔뚝이 화끈거리면서 저릿하게 울린다.

하나 그럴수록 모든 감각이 선명해진다.

일전에 남궁천으로부터 들었던 조언, ‘잘 처맞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잘 맞으면 통증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격혈을 통해 내력은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윤종승도 몰랐던 가전 심법의 특징이다.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재미있어. 비무가 이렇게 재미있고 즐겁다니!’

남궁천과 함께한 대련은 지옥 같았다.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무연회에서 겪은 비무는 고통스러웠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저 즐겁다.

쏟아지는 검격을 양팔로 정신없이 막아내면서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낀다.

상대의 움직임이 낱낱이 보이고, 몸이 알아서 대응하니 그저 신날 수밖에.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반면 남궁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져갔다.

‘어째서…… 어째서 무너지지 않는 거냐! 그렇게 처맞고도 어째서!’

하나 그는 꿈에도 몰랐다.

이미 윤종승은 무연회 비무에서 그보다 수 배는 더 얻어맞고도 버텨냈다는 사실을.

결국 조급한 마음은 섣부른 검초를 펼치는 실수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걸 놓칠 윤종승이 아니었다.

‘지금이다!’

짧은 순간, 상대의 옆구리가 훤히 비었다는 걸 확인한 윤종승이 허리를 낮게 숙이면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쒜에에엑!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연꽃을!’

수태양소장경을 따라 이동한 공력이 다섯 손가락에 가닥가닥 응집하는 순간!

뻐어어억!

“끄아아악!”

남궁진의 비명이 폭약처럼 터졌다.

“……!”

지켜보던 남궁원과 남궁현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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