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절대 말이 안 되는데
저만치 마을 어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사두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남궁천이 먼발치 황산을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오악을 보고 나면 다른 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황산을 보고 나면 오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렇군.”
황산을 이번 생에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천하를 누비며 다니던 전생에도 황산이나 태산(泰山)처럼 명산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절경’이라는 것은 달리 말해 숨기 좋은 장소라는 뜻이었으니까.
때문에 명산을 명산으로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나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여유가 생기니 황산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저 ‘숨어들기 좋은 산’에서 천하제일경을 품은 명산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처한 환경에 따라 보는 눈도 달라지는 법이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깨닫는 것 또한 달라지는 것이고.
‘역시 이 와중에도 이런 깊은 생각이라니. 나란 녀석은 참.’
남궁천은 뿌듯한 마음을 다스리며 마차를 타고 온 길을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어딘지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는 발끝은 비교적 가볍다.
‘상당히 나아졌군.’
경공을 펼치며 쉼 없이 달려오는 자는 다름 아닌 윤종승.
그는 학관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를 타지 않고 경공만 펼치며 황산까지 달려오는 중이었다.
“헉, 헉, 헉……! 드디어…… 도착!”
바로 앞까지 도착한 윤종승이 쓰러지듯이 바위 옆으로 걸어가 그대로 뻗었다.
가슴이 연신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한다.
쌀쌀한 날씨 탓에 제법 두꺼운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도 온통 땀으로 젖어서 축축하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애썼다.”
“헉, 헉, 헉……! 그래도…… 갈 때보다 많이 발전했지?”
“만족하지 마라. 만족하는 순간 뒷덜미 잡히는 거야.”
“그래도 나도 성장하는 걸 좀 느껴야 보람이…….”
“보람 찾다가 도망칠 순간을 놓치는 법이야.”
아니, 그러니까 왜 도망쳐야 하는 거냐고.
윤종승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자, 남궁천이 손을 저으며 얼버무렸다.
“아무튼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까딱하면 추격자가 바짝 쫓아오니까.”
그러니까 누가 쫓아오는데?
윤종승이 괜히 왔던 길까지 되돌아보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다른 후기지수들 말하는 거다. 새끼가 문맥을 파악해야지.”
“아…… 난 또.”
윤종승이 헤실헤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좋은 변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학관으로 갈 때는 반강제적으로 윤종승이 달린 것이지만, 올 때만큼은 윤종승 스스로 달려오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윤종승은 며칠간 경공만으로 이동하면서 내공심법과 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중간중간 남궁천이 운기 방식에 대해 조언해 준 것 또한 상당한 도움이 됐다.
윤종승이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안 달려?”
“지긋지긋하니까.”
“아…….”
하긴. 내가 그동안 괴롭히느라 매번 학관까지 달려갔다가 오길 반복했었지.
윤종승이 제멋대로 오해하는 동안 남궁천이 황산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평생 달리기만 했으니…… 걸어도 보고, 마차도 타보고 해야지.”
그 말을 또 오해한 윤종승이 괜히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드는데 마침 저만치 언덕 아래에서 아스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니이이임!”
남궁천이 돌아보니, 복성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복성의 안면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공자니이임! 이게 얼마 만입니까요? 으허엉. 보고 싶었습니다요!”
언덕 위에 다다른 복성이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남궁천을 향해 방실방실 웃어댔다.
눈가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그래도 아들에게 가장 살갑게 대해주던 녀석.
남궁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잘 지냈느냐?”
“저야 늘 똑같지요. 공자님 소식 들었습니다요! 세상에! 무연회 우승이라니요? 저는 정말 공자님이 다시 힘든 생활을 하실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요. 매일같이 물 떠다 놓고 신령님께 빌고. 크흡. 그런데 무연회 우승이라니요? 정말 이게 꿈은 아니지요? 우리 공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복성은 이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감격에 겨워했다.
이렇게까지 걱정을 했다니 괜히 마음 한편이 짠하다.
“여어, 복성. 잘 지냈는가?”
마침 윤종승이 반가운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오자, 순간 복성이 움찔거리더니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간 남궁천을 괴롭혀 온 것도 모자라, 지난번에는 세가에 방문해서 자신을 구타한 윤종승이 아니던가?
남궁천이 무연회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윤종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복성이 감히 윤종승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떨었다.
“윤, 윤 공자님도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같이 계신 줄을…….”
따악!
순간 복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궁천이 냅다 윤종승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게 아닌가?
뒤통수를 쥐고 끙끙대는 윤종승을 보며 남궁천이 미간을 푹 찡그렸다.
“평소에 어떻게 했으면 애가 이렇게 쫄아?”
“그, 그게…… 커험! 복성. 지난번 일은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용서해 주게.”
“예? 아, 예. 예엣?”
“내 자네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네. 부디 용서해 주겠나?”
윤종승이 깍듯하게 허리까지 숙이며 사죄하는 것이 아닌가?
복성이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요? 아닙니다요. 괜찮습니다요.”
“괜찮긴, 개뿔.”
남궁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복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남궁천이 턱짓으로 윤종승을 가리켰다.
“이 녀석이 그간 잘못한 게 있으면 응당 사죄하고 용서를 받아야지. 그간 이 녀석이 널 얼마나 괴롭혔어?”
“그, 그야…… 말도 못하게 많지만…… 에이, 전 괜찮습니다요. 정말.”
“말도 못하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사과 한마디에 정말 괜찮다고?”
“공, 공자님 왜 이러십니까요? 저는 정말 괜찮은데…….”
복성은 이제 울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하나 윤종승도 그냥 물러나진 않았다.
“복성!”
“예? 옙!”
“차라리 날 한 대 치게!”
“예엣?”
“한 대로 부족하다면 두 대, 세 대. 얼마든지 치게. 내가 맞아주겠네. 그걸로 자네 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나는 수련이라고 생각할 테니 어서 치게.”
“어어어…… 왜 자꾸…… 전 정말 괜찮은데…….”
그러자 남궁천이 다시 나섰다.
“아무래도 복성은 심약해서 내가 대신 나서야겠군. 종승, 내가 복성을 대신해서 치마.”
그러자 윤종승이 복성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고함을 질렀다.
“복서어어엉!”
“예? 예! 옙!”
“빨리 한 대 치란 말이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아,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찌…….”
“어서! 안 그러면 저 새끼…… 아니, 남궁천이 날 친다잖아! 어서 날 한 대…….”
퍼억!
순간 날아간 복성의 주먹에 윤종승이 그대로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날아든 주먹이었기에 코피까지 터졌다.
“죄, 죄송합니다요! 죄송합니닷! 죄송합니닷!”
복성이 거듭 사과하자, 윤종승이 손을 저었다.
“아닐세. 아주 잘했네. 자네 생각보다 손이 맵군.”
“아…… 그게 뭐 이런저런 잡일을 도맡다 보니 잔근육이 붙어서…….”
“아무튼 이걸로 날 조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겠나?”
“물, 물론입니다요.”
“고맙네.”
“저…… 코는 괜찮으신지……?”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엇!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무튼 이걸로 부족하겠지만, 이제 해묵은 감정은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세나.”
“물, 물론입지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남궁천, 나는 휴관기 동안 더 열심히 수련할 생각이다. 더 강해질 거야. 널 이길 순 없을지라도 너무 많은 격차가 나지 않도록! 개관하면 다시 보자.”
“그래, 욕봤다.”
윤종승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터벅터벅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남궁천이 타고 온 마차도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윤종승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복성이 남궁천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어…… 윤 공자님 혹시 죽을 병 걸린 건 아니죠?”
“뭐?”
“아니, 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속삭이는 복성을 보면서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어쩌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완전히 다시 태어나려면 자신을 한 번 죽일 필요도 있으니. 우리도 이만 가자.”
“아, 예.”
복성이 남궁천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뒤따르며 중얼거렸다.
“가주님이 정회를 소집하여 각지에서 세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요.”
“알고 있어.”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을로 들어선 윤종승은 곧장 객점으로 들어가 술과 요기할 음식을 시켰다.
“아으…… 그 녀석, 손이 맵네.”
윤종승이 콧구멍을 틀어막았던 헝겊을 빼내면서 콧잔등을 씰룩였다.
아직도 맞은 코가 얼얼하다.
내공 따위는 실리지도 않은 주먹이지만, 하필 코뼈를 정통으로 얻어맞는 바람에 코피까지 터질 줄이야.
‘뭐, 이걸로 그간의 과오를 씻어낼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
하마터면 남궁천에게 얻어맞을 뻔했으니 그 위기를 넘긴 것만 해도 다행 아닌가?
마침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내어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객점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다소 남루한 행색이지만, 허리춤에 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고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기품으로 보아서는 꽤나 격조 높은 가문 사람들로 보였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미루어 모두 같은 가문인 듯했다.
그들이 마침 윤종승 뒤편 탁자에 앉으면서 대화 소리가 자연히 들려왔다.
“소가주 자리를 정하시겠다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요?”
“이번에 남궁천, 그 아이가 무연회 우승을 했다잖은가? 그 일을 계기로 남궁세가에도 새바람이 불 수 있으니 이참에 소가주를 정하시려는 걸 테지.”
“저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세상에 남궁천이 무연회 우승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문의 수치라고만 생각했는데, 개똥도 약에 쓰이는 경우가 있긴 한 모양입니다.”
“운이 좋았을 테지.”
윤종승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계속해서 들리는 이야기에 저절로 신경이 쏠렸다.
남궁세가 사람들인가?
그런데 뭐? 개똥이라고?
기도 안 차는 비유에 절로 술잔에 손이 간다.
중년 사내가 말했다.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운이 좋아도 무연회 우승이라니. 이건 무연회 수준 자체가 많이 떨어졌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동감입니다. 남궁천 같은 녀석이 우승을 할 정도면 이번 무연회는 볼 것도 없었을 겁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이야기를 듣는 윤종승이 술잔을 채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때마침 약관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참가해 볼 걸 그랬습니다. 그럼 우승이 제 차지가 됐을 수도 있을 텐데요.”
“허허, 그러게 말이다. 하나 학관에 다니지 않는 자가 무연회에 참가할 수는 없어.”
“사실 정협관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안 가는 게 낫지요.”
청년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사내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협관에는 당가의 아이와 모용가의 아이도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무맹관에는 화산파의 후기지수가 제법 뛰어나다던데…….”
“결국 허장성세였던 게 아니겠습니까? 듣자 하니 결승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아이가 올라왔다더군요.”
“그게 아니면 대진운이 좋았던 거겠지요. 결승전은 어부지리로 오른 셈이고.”
들을수록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이래서야 작정하고 인정하기 싫다는 꼴이지 않은가?
‘아무리 남궁천이 밉다지만 어찌 저리도 답답한……!’
탁!
결국 참다못한 윤종승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미 취기가 잔뜩 올라 불콰한 얼굴이 된 그가 뒤편의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반갑습니다! 저는 황산윤가의 윤종승이라고 합니다!”
“……?”
“옆자리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무연회 수준을 몹시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거기 젊은 분께서는 제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참고로 저는 올해 무연회에 참가하여 팔 강에서 미끄러진 사람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