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절대 말이 안 되는데
금왕이 다녀가자, 남궁검과 남궁천에게는 더 이상 상인들이 접근하지 않았다.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금왕의 도움조차도 차갑게 뿌리치는 걸 눈앞에서 보았는데, 무슨 용단으로 남궁검 앞에 나설까?
결국 무한의 거상들은 신룡이 탄생한 가문을 그렇게 손가락만 빨면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남궁검과 남궁천은 모처럼 무한의 거리를 나란히 걸으면서 시간을 가졌다.
“집으로 올 것이냐?”
“예. 어차피 학관은 이제 휴관기에 들어갈 테니까요.”
무연회가 끝나면 무한의 모든 학관이 휴관기에 들어가게 된다.
휴관기가 끝나면 학관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팔 강 안에 든 생도들에 한하여 무림맹에서 견습 기간을 가지게 된다.
남궁천은 이 휴관기 동안 남궁세가로 돌아가서 소가주 문제를 확실히 정리해 둘 참이었다.
숙소로 걸어가던 남궁검이 예의 그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빚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뭐든지 요령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빚도 잘 이용하면 발판이 될 수 있겠지요.”
“양날의 검이지.”
“그래서 검이 만병지왕이지요.”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예전의 남궁천을 떠올려본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하긴.
그때였으면 무연회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
숙소 앞에 다다른 남궁검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멈췄다.
“우린 내일 아침이면 돌아갈 것이다.”
“예, 먼저 가십시오. 저도 정리가 되는 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남궁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다가 멈칫 섰다.
남궁천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자, 남궁검의 입에서 모래바람 같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네 어미가 대견스러워할 것이다.”
“…….”
영감, 하여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남궁천이 괜히 코를 실룩이는 사이, 남궁검은 전각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 * *
“남궁천이 명패를 받았다고?”
“예, 맹주님.”
모용신이 허리를 숙이고는 깍듯하게 대답했다.
맹주가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파창!
결국 찻잔이 깨지면서 찻물이 손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종이 얼른 달려 들어오려는 것을 모용신이 고개를 저어 제지했다.
맹주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금왕의 명패를 받았단 말이지.”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떼어내려던 혹이 더 커진 셈이 됐다.
이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아닌가?
마침 창틀에 걸터앉은 여인이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 맹으로서는 음모를 꾸민 게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할 일 아닌가요?”
맹주가 눈매를 가늘게 여미고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고양이 가면을 쓴 여인.
그녀는 하얀 비단옷을 걸쳐 입고 있었는데 치마 옆단이 길게 찢어져서 매끈한 다리가 아름답게 드러나 있었다.
심계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영혼마저 빠져들 정도로 아찔하고 고혹적인 자태였다.
그런 그녀를 타박한 사람은 모용신이었다.
“백묘, 어느 앞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그대의 주인이 나의 주인은 아닐 텐데.”
백묘가 새하얀 접선을 활짝 펼치더니 살랑살랑 흔들었다.
겨울을 앞둔 날씨인데도 백묘가 흔드는 부채에서는 온풍이 분다.
내공으로 공기를 일순간에 데운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번 일에 대한 실망이 크답니다. 벌써 두 번째지요? 얘기했던 것과 달라진 것이.”
“어차피 버릴 패 아니었나? 말했을 텐데. 일이 틀어지면 살인멸구도 가능하다고.”
“그랬죠. 한데 그 일이 우리 쪽에서 튼 게 아니라, 그쪽에서 틀었다는 게 문제죠.”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그 녀석들이 먼저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애초에 생도 하나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일 텐데요.”
“생도 하나도 죽이지 못해서 일을 이렇게 키운 것에 대한 책임은 느끼지 못하나 보군.”
“생도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신룡으로 떠받들어 준 건 누구인지.”
“백묘!”
“듣고 있답니다.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리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자, 맹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지.”
“죄송합니다, 맹주님.”
모용신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맹주가 손을 젓고는 백묘를 보았다.
“자네 주인에게 이번 일은 유감이라고 전해주게.”
“말로 빚을 갚기에는…….”
“전하게.”
“…….”
맹주가 싸늘한 눈초리로 백묘를 응시했다.
한참이나 그 시선을 받아내던 백묘가 피식 웃었다.
“많이 실망스럽네요.”
“더 실망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네.”
백묘의 가면 아래 표정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차가운 눈초리로 맹주를 마주 응시하며 답했다.
“그 말씀도 그대로 전해 드리지요.”
“모쪼록.”
“그럼.”
말을 마친 백묘가 열린 창문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모용신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저것들이…….”
“진정하게. 청랑단주.”
“죄송합니다.”
“자네, 사과하는 일이 잦아졌어.”
“죄송…….”
말을 뱉던 모용신이 움찔거리고는 그대로 굳었다.
맹주가 열린 창밖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키웠군. 조금은 눌러줄 필요도 있겠지.”
“명령만 내리시면…….”
“아니. 서두를 것 없네. 다음 학기부터는 신입 견습 기간이지?”
“아…….”
모용신이 곧 맹주의 속내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견습생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겠군.”
맹주의 눈빛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 * *
“어서 옵쇼!”
우렁찬 고함 소리가 마치 환영 인사가 아니라 윽박지르는 것만 같다.
귀왕반장에 막 들어서던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자, 귀왕이 얼른 다가오며 손을 맞비볐다.
“어이쿠, 오셨습니까요? 헤헤.”
남궁천은 대답 대신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한마디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물었다.
“먼저 온 손님은?”
“예, 저기 안쪽 자리에 계십니다요.”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가니, 과연 구석진 곳에 먼저 와 있는 사내가 국수를 먹고 있었다.
남궁천이 아무 말 없이 맞은편에 척 걸터앉자, 사내가 힐끔 보더니 곧 자세를 바로 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불명회주가 이렇게 대낮에 돌아다녀도 되나?”
“괜찮습니다. 제가 회주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일 좀 하는 점소이에게 여기 애들 교육 좀 시키라니까.”
“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쉽게 바뀌진 않더군요.”
“그래서 포기했다?”
“그럴 리가요. 이만하면 괜찮지 않습니까?”
확실히 흑선의 말대로 귀왕반장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장사가 잘되고 있었다.
“딱히 식사 시간이 아닌 때인데도 만석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에도 귀소이들의 접객 태도는 여전했다.
손님들에게 윽박지르듯이 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요, 서로 험상궂은 표정으로 쌍욕을 하며 다투기까지.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손님들이 그런 귀소이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흑선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습관이라면, 하나의 설정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서, 귀왕반장을 아예 산적들이 운영하는 설정으로 잡아 버렸지요.”
“그럼 손님들은 저 불성실한 태도가 다 설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거군.”
“바로 그겁니다.”
“확실히 장사는 잘되네.”
“조만간 공사를 해서 건물을 높이 올려야 할 겁니다. 이만하면 숙수의 음식 솜씨도 꽤 수준급이라 괜찮은 장사가 될 겁니다.”
“그럼 내가 무한에 없는 동안 믿고 맡길게.”
“장차 황학루(黃鶴樓)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다음으로 가는 객점으로 키울 수는 있을 겁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왜? 황학루는 버거운가?”
“그럴 리가요. 불명회와 닿아 있는 줄만 해도 몇 가닥인데. 다만, 지나치게 튀어나온 돌은 망치로 두드려 맞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뭐든 적당한 선이 좋지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믿고 맡겨보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흑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는 사이 귀소이가 국수 한 그릇을 내어왔다.
“맛있게 처드쇼!”
탕!
거칠게 그릇을 내려두고는 삐딱한 자세로 인사하는 귀소이.
어째…… 이건 설정이 아니라, 약간 진심 어린 감정이 섞인 것 같은데?
뭐, 넘어가자.
* * *
다그닥…… 다그닥…….
비쩍 마른 백마가 힘겹게 언덕길을 올랐다.
백마 위에는 말만큼이나 비쩍 마른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성성한 수염이 가슴께까지 늘어져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과 비루먹은 말이 조화를 이루다 보니 그 행색이 몹시 초라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지친 기색처럼 보였다. 실제로 백마와 노인은 꽤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인의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어딘지 시린 기운을 그득 품고 있었다.
백마 옆에는 고삐를 쥔 시종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는데, 역시나 키만 길쭉할 뿐 깡마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백마가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노인이 긴 숨을 토해내며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잠시 쉬었다 가자.”
“예, 어르신.”
시종이 말을 멈춰 세우고는 한쪽 바위에 걸터앉았다.
노인은 말에서 내려와 저만치 펼쳐진 절경을 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황산이라. 역시 중원 제일의 명산이로다.”
“그러게요.”
“본 가도 저 황산과 같았을 진데.”
“…….”
노인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랬다.
남궁세가도 저 황산처럼 중원 제일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세상 당당한 가문이 아니었던가?
하나 이제는 아니다.
“황산은 여전한데, 본 가만 스러져 가는구나.”
“어르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내 무슨 낯이 있어 가주님을 뵙겠느냐?”
“어르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요.”
노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최선이라. 본 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금정각주(金政閣主)로서 한 일이라곤 전각을 야금야금 팔아먹은 짓밖에 없구나.”
“그리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본 가는 거리에 나앉을…….”
시종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에.
황산을 바라보며 시름하는 노인.
그는 바로 남궁세가 금정각주 남궁효였다.
가주 남궁검의 사촌 아우인 그는 쓰러져 가는 가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강호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하나 그를 대하는 이들은 모두 예전의 살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을 떠날 때만 해도 반드시 넉넉한 자금을 마련해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건만.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남궁세가에 투자하겠다며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마저 겪었다.
그야말로 세가의 자존심이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간 셈.
그렇게 오랜 여정 끝에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서를 받았다.
소가주 자리를 논하기 위해서 정회를 열겠다는 내용.
아직 무연회 소식을 접하지 못한 남궁효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하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요. 말 그대로 이젠 가주님이 소가주를 정하시려는 거겠지요. 때가 됐으니까요.”
“흐음.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신 건가?”
“주제넘은 소리지만 제 생각에는 왠지…….”
“왠지?”
“남궁천 공자님이 아닐까 싶습니다요.”
“뭣이?”
“외손자이긴 하나 굳이 사후양자로 남궁의 성씨를 물려주셨고, 또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가까운 직계라고도 볼 수…….”
“갈! 어디 망발을 떠드느냐! 가장 가까운 직계? 세상에 그런 셈법이 어디 있단 말이더냐!”
“죄, 죄송합니다요. 소인이 일자무식이라…….”
“본 가가 이토록 기울어진 게 누구 때문인데 그 아이를 들먹이느냐? 다른 사람은 다 되어도 그 아이만큼은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꼴은 절대 볼 수 없다!”
“예, 나리.”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궁효가 씨근거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 절대 말이 안 되지! 그 아이가 금왕의 재력이라도 등에 업으면 또 모를까?’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상상할 건더기조차 없다.
“그러니 그 아이만큼은 안 된다!”
남궁효가 마치 다짐을 받아내듯 단호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