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이보게. 괜찮은가?”
“아무래도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 같습니다.”
“잔경련만 남은 상황입니다.”
“비켜라. 응급 침을 놓을 테니 안정이 되면 곧바로 이송해라.”
“네, 의원님!”
환호성이 차오른 대연무장 한쪽에서는 쓰러진 백무극을 살피는 의원들로 분주했다.
입에 거품까지 문 백무극은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의식은 없지만 근육이 일으키는 잔 경련이었다.
의원이 백무극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찢어진 옷가지들과 멍든 피부, 부러진 뼈와 긁히고 베인 상처들까지.
‘쯧쯧.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어. 한데도…….’
놀랍지 않은가?
이 정도로 얻어터지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사지육신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치명상은 없다.
놀랍게도 전신의 요혈을 가격당하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도록 힘 조절을 했단 뜻이다.
‘어찌 이런…….’
의원이 침을 놓으려다 말고 몸을 돌려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군.’
의원이 멍하니 서 있자 의생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의원님?”
“음?”
“응급 침을…….”
“아, 필요 없네.”
“예?”
“응급 침을 놓을 필요가 없단 뜻이네. 어서 옮기게.”
“아, 예. 알겠습니다.”
의생들이 얼른 백무극을 들것에 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백무극의 표정은 묘하게 평온해 보였다.
한편 최종 결승전이 치러진 대연무장의 분위기는 신룡의 탄생을 축하하느라 한껏 들떠 있었다.
비무대에서 내려온 남궁천은 비량의 손에 이끌려 용천관 생도들 앞으로 이동했다.
“녀석, 잘했다. 동기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줘.”
“피곤합니다.”
“자자, 그래도 네 덕분에 우리 학관이 모처럼 명성을 날리고 있잖아? 뭐라도 한마디 해라.”
비량이 남궁천을 데리고 오니 용천관 생도들이 저마다 손을 흔들며 외쳐댔다.
“오오! 남궁천! 우리 학관의 자랑! 용천관의 자부심! 용천관의 대표!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용천관 생도들이 남궁천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하자 그 울림이 점점 번져나갔다.
남궁천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등지고 도망 다닐 때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누구 하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자가 없었다.
살갑게 웃으며 다가오던 자들도 자신이 무림공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차갑게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곤 했다.
한데 지금은 서로가 공을 나눠 가지며 즐거워한다.
“역시…… 이런 꼴은 못 봐주겠네.”
남궁천이 중얼거리자 비량이 얼른 손을 들어 생도들의 환호를 제지하고는 물었다.
“응? 뭐라고 했느냐?”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 용천관 생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도들도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다들 쉿! 남궁천이 한마디 하려나 봐!”
“조용히들 해. 우리의 영웅이 한 말씀 하시려고 한다!”
“남궁천! 한마디 해줘라!”
그렇게 원한다면 한마디 해줘야지.
남궁천이 입매를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본 윤종승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어째 징조가 좋지 않은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남궁천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모두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발언이었으니까.
“착각들 하지 마라, 새끼들아.”
“……?”
“나쁜 건 다 떠밀면서 좋은 것만 나눠 가지겠다고? 하여튼 기생충 같은 새끼들.”
“어어……?”
“내가 호구 생활할 때도 좀 그러지 그랬냐?”
“…….”
“용천관의 승리? 용천관의 위상을 드높였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너희들이 한 게 뭐가 있어? 내 우승은 오롯이 나의 차지다. 용천관이 아니라 나의 승리고, 용천관의 위상이 아니라 나의 위상이, 본 가의 위상이 드높아진 거다. 알겠냐? 그러니 착각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해. 새끼들아.”
냉랭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용천관 생도들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인파들의 환호 속에서도 용천관 생도들만이 침묵하는 기이한 상황.
그때였다.
짝짝짝.
생도들 틈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생도들이 돌아보니 팽수혁이 입매를 비틀고는 박수를 치고 있다.
“과연 우리 집안 원수답다. 솔직히 저 녀석 말이 틀린 것 있나? 다들 분발하라고, 병신들아. 남의 우승을 마치 내 것처럼 여기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저 자리에 설 생각을 하란 말이다.”
팽수혁이 차갑게 일갈하자, 뜻밖의 반응이 일어났다.
“어엇! 그런 뜻이었구나! 역시 우리의 신룡은 생각부터 다르구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구나!”
“역시 남궁천이다! 그저 우승자로서 기쁨을 누리기만 해도 될 텐데, 우리 동기들을 일부러 자극해서 깨우침까지 주다니.”
“역시 남궁천은 난 사람이다! 남궁천, 너야말로 진정한 신룡이다!”
“존경한다,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용천관 생도들이 다시 남궁천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병신들은 도대체 뭐라는 건지.
‘이 새끼들은 전부 바본 가?’
분위기에 한 번 휩쓸리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멍청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옆에 서 있던 비량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남궁천의 등을 떠밀었다.
“뭐, 어, 어쨌든 잘됐구나. 하하. 이제 곧 시상식이 있을 테니 그만 준비하러 가야지? 어서 가자.”
데리고 올 때와 달리 조금이라도 빨리 남궁천을 이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떠미는 비량이었다.
* * *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을 무렵.
마침내 길고 길었던 무연회의 대미를 장식할 시상식이 거행됐다.
맹주로서는 정말이지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결말.
하나 어쩌겠는가?
모든 과정에서 정당한 승리를 거둔 남궁천이니.
비무대에 오른 맹주는 계단을 따라 오르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궁천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래, 지금은 웃어라. 오늘은 너의 승리다. 인정하마. 하나 강호는 네 생각보다 더 혹독한 곳이지. 천하의 독종이라는 네 아비도, 천하제일룡이라던 네 어미도 허망하게 떠나 버린 곳이 바로 강호다. 네 부모의 길을 뒤따를 날이 머지않았을 것이다.’
맹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일별하고는 관전자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자신의 입으로 남궁천을 한껏 띄울 차례다.
가장 내키지 않는 연설을 해야만 하는 순간.
“오늘 본 맹은 기적을 이룬 신룡의 탄생을 목격했소. 용천관 생도 남궁천은 납치를 당한 동기를 구한 공을 세운 것도 모자라, 무한연합용봉대회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소. 이에 본 맹은 관례대로 우승자인 남궁천 생도에게 만년설삼(萬年雪蔘) 한 뿌리를 부상으로 수여하는 바,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한마음으로 신룡의 탄생을 축하해주길 바라오.”
“와아아아아아아!”
관전자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남궁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맹주가 만년설삼이 든 목함을 내밀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목함을 맞잡았다.
“다시 한번 축하하네.”
알겠으니까 이제 좀 놓지?
목함이 맹주의 손에 척 달라붙은 것처럼 꿈쩍을 하지 않는다.
이 늙은 구렁이가 진짜……!
남궁천이 목함을 쥐고는 힘을 주자 손등에 핏대가 불거져 나온다.
꽈악……!
맹주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늙은 구렁이가!
“구하기 어려운 만년설삼일세.”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손 놓으라고!
맹주가 뺨을 씰룩이며 애써 웃는다.
남궁천도 입매를 틀어 올리면서 바르르 떨었다.
“자알 씹어 먹겠습니다. 꼭꼭…… 야무지게…….”
“그래야지. 소화하기 어려운 영약이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부들부들.
마침내 맹주가 손에 힘을 풀었다.
“끝이라고 생각하진 말게.”
“……?”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
조언을 가장한 경고다.
“새겨두지요.”
“앞으로 맹에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네.”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궁천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무연회에서 본선 팔 강까지 진출한 생도들은 다음 학기부터 곧바로 무림맹 견습 기간에 들어가게 된다.
맹주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맹주의 시선과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혀든다.
부상을 수여 받은 남궁천이 돌아서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번 차올랐다.
“와아아아아! 신룡 남궁천! 흥해라!”
* * *
또로로롱.
맑은 찻물 소리가 찻잔을 채운다.
점소이가 물러간 방에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셔라.”
남궁검이 무감한 목소리로 뱉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생했다.”
불쑥 떨어진 첫마디에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영감, 칭찬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뭐, 이나마도 칭찬이라고 뱉은 말이리라.
그렇게 다시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던 끝에 남궁검이 본론을 꺼냈다.
“소가주 문제는 정회를 열어 논의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대살성의 자식이다.
게다가 직계도 아니다. 사후양자로 들여 억지로 남궁의 성씨를 물려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소가주 자리로 보면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아마 반대 여론이 거셀 터.
그래도 가주의 지지가 뒷받침되면 해볼 만하지.
두 사람은 결국 찻잔을 다 비울 동안 별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만약 이 자리에 남궁화가 있었더라면 진작 숨이 막혀 뛰쳐나갔을지도.
“그만 일어나지.”
남궁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천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다루에서 나서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남궁세가 가주님이시다!”
“남궁 대협, 감축드리옵니다!”
“남궁 소협, 축하하네!”
“남궁 가주님, 그러잖아도 한 번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본 상단이 이번에 황산 쪽에 볼일이 있는데…….”
“거, 비켜보시오. 아이고, 남궁 가주님, 그리고 남궁 소협.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무한표국을 이끌고 있는…….”
“거, 순서 좀 지킵시다!”
거상들이 너도나도 몰려들면서 자신을 소개하느라 바쁘다.
당연한 현상이다.
남궁세가에서 신룡이 탄생했다.
몰락하던 가문이 신룡의 탄생으로 다시 평가받게 됐으니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무엇이든 저평가되어 있을 때 선점하려는 것이 상인들의 본능이니까.
그런데 마침 빽빽하게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물길이 갈라지듯 양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저, 저분은……?”
“그러고 보니 본선이 치러지던 내내 남궁 가주님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던데…….”
“맙소사, 그럼 금왕이 직접 나선다는 건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나타난 이는 금왕 진득랑.
장강 이남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직접 남궁검 앞에 나섰으니 어지간한 거상들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마침내 금왕이 남궁검 앞에 멈춰 서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감축드립니다, 가주님.”
“내가 축하받을 일이 아니오.”
“하하. 그렇습니까? 축하하네, 남궁 소협.”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맙네. 내 딸을 구해주어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오글거리는 대화는 사양이지만, 남궁천은 최대한 격식에 갖춰 대답했다.
마침내 금왕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만금상회는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입니다.”
“사양하겠소.”
남궁검이 칼처럼 자르자, 사람들이 움찔거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궁검의 성품이 대쪽같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금왕의 면전에서 무안을 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게다가 상대는 금왕이 아닌가?
한데 금왕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는 대신 뜻밖의 말을 꺼냈다.
“가주님,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제가 돕겠다는 건 남궁세가가 아닙니다.”
“……?”
남궁검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자, 금왕이 남궁천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무엇이든 말만 하게.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설 것을 약속함세.”
말을 마친 금왕이 소매에서 명패를 꺼내 건넸다.
금왕의 명패!
사람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중원인이라면 꿈에서라도 한번 쥐어보고 싶은 것이 바로 금왕의 명패가 아니던가?
저 명패 하나면 만금상회의 손길이 뻗친 곳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으리라.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명패를 받아들었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