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아직 삼천이백 냥치 남았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백무극은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무공이 경지에 이르면 도신합일을 이루어 무아지경에 도달한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린 것은 단 하나.
‘수많은 자아 중에 누가 사라지고 누가 남을 것인가?’
대개의 인간들은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 무아지경이 가능하겠지만,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진 자신도 무아지경이 가능할까?
만약 그 모든 자아를 잊을 수만 있다면 그 단계를 한 번 꼭 이뤄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무공을 수련했다.
무극이 한계를 느끼면 일극이 나와서 수련했고, 일극이 한계를 느끼면 이극이 나섰다.
우습게도 수많은 자아를 잊기 위해서 수많은 자아를 총동원하며 무공 수련을 했다.
당연히 아직 도신합일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남들보다 빠른 성취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무아지경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요원한 수준.
한데 처맞느라 무아지경이 될 줄이야.
전신을 찢어발길 것 같던 고통은 이제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니, 느낀다.
하나 육체의 고통이 정신의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몸은 죽을 것같이 아프고 힘든데 정신은 오히려 평온하다.
수많은 자아가 오로지 하나의 통증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종국에는 모든 자아를 잊어버리고 그저 통증만 남았다.
처맞는 일이 이렇게 평온함을 가져다줄 줄이야.
지금은 맹한 무극도, 발끈하는 일극도, 냉혈한 이극도 아니다.
오롯이 고통받는 신체와 오감에 집중하는 정신만 남았을 뿐.
어떠한 반격도 떠오르지 않는다.
목검에 두드려 맞을 때마다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문득 의문이 든다.
이 의문은 누가 떠올린 것일까?
무극? 일극? 이극?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자아가 사라지고 상념만이 남아 떠돌 뿐이니까.
어쨌거나 떠올린 의문은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누구인가?’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결국 돌고 돌아서 ‘나’를 찾는 거라니.
하지만 우주에 떠 있는 것만 같은 이 고요함의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다.
오로지 통각에만 집중되는 이 시간을.
퍼억!
목검이 뺨을 후려치면서 백무극의 몸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회전했다.
“우아아아! 엄청난 속고오옹! 백무극 생도는 대응할 틈도 없습니다앗! 이대로면 반의 반각도 지나지 않아 남궁천 생도의 압도적인 승리이잇!”
중계자의 목소리만 대연무장에 쩌렁쩌렁 울려댄다.
“도대체가……!”
맹주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주먹을 쥐었다.
반각이다.
겨우 반각만 버티면 남궁천이 공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무난한 우승이 될 것이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남궁천을 확실히 폐기시킬 수도 있었다.
한데…….
‘어째서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까드득.
어금니가 갈리는데, 마침 옆에 서 있던 총관이 허리를 숙였다.
“맹주님.”
“크흠.”
총관의 주의에 맹주가 가까스로 평정심을 찾았다.
하나 속은 바글바글 끓는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됐다.
도대체 남궁천은 어찌 된 인간인가?
아니, 이쯤 되니 남궁천에게 문제가 있는지, 백무극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남궁천이 사용하는 검법은 분명, 앞서 운경에게도 사용했던 창궁검법이 아닌가?
남궁세가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검법.
멋들어진 기교가 들어간 것도 아니요, 변초나 허초가 난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직하게 휘두르는 검을 백무극이 전혀 감당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환술……?’
하지만 맹주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남궁세가에서 무슨 환술을.
환술이라면 백무극이 사용할 터.
방심한 것일까? 공진분이 흩뿌려진 것만 생각하다가 어이없이 당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확실히 보통의 창궁검법은 아니군.’
맹주가 눈을 가늘게 여몄다.
남궁천이 펼치는 검초 하나하나가 완벽하다.
물론 어려운 검술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이 곧 쉽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기본이기에 그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법.
한데 남궁천은 정확히 기본을 기본답게 펼치고 있다.
어떠한 더함도 뺌도 없다.
바로 이것이 ‘남궁세가의 검법이다!’ 하고 소리치는 것만 같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관전을 하면서도 이토록 침묵하는 이유는 남궁천의 검초에 홀렸기 때문이다.
정작 맹주 스스로도 남궁천의 검법에서 쉬이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남궁세가의 창궁검법을 눈여겨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한 가지를 확실히 느꼈다.
‘저 검법은 내공심법과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다.’
어찌 저렇게 군더더기 없는 검법을 펼칠 수 있을까?
상대가 대항 불능 상태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천만에.
군더더기 없는 검법을 펼치고 있으니, 상대가 대항 불능이 된 것이다.
남궁세가의 검법.
남궁천은 지금 이 비무에서 본인의 명성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의 위상까지 드높이는 중인 것이다.
남궁세가라.
맹주의 시선이 관전석에 앉은 남궁검에게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남궁검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궁천의 무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남궁검, 자네가 저 아이를 저리 키운 것인가?’
남궁검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화야, 보고 있느냐?”
“네…… 아버지. 창궁검법이 이렇게 완벽하게…….”
“저 아이가 지금 세상에 본 가를 알리고 있다.”
“아버지.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천이는 지금 저조차도 훨씬 뛰어넘었어요.”
남궁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죽음을 겪고 제 어미와 접신이라도 했던 건가?
남궁천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남궁선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마치 남궁선이 남궁천의 손목을 쥔 채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창궁검법을 펼치는 것만 같다.
남궁화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아버지…….”
“그래, 오랜만이구나.”
남궁검의 목소리에도 희미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랜만이다.
이토록 완벽하고 고결한 창궁검법을 견식하는 것은.
그 오래전 남궁선이 펼치던 걸 본 이후로 얼마만인가?
남궁천의 검초에서는 제왕의 힘이 느껴지고 있다.
모든 검격 하나하나가 결정타.
만약 진검이었다면 남궁천이 휘두르는 일검마다 목숨 하나가 스러졌을 것이다.
허세가 아니었던 거다.
남궁천에게 일격 승부는 그저 하면 그만이었을 뿐.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궁검과 남궁화의 귀에 와 닿는다.
“대, 대단해. 저게 남궁세가의 검법……!”
“그러게 말일세. 내가 무공은 모르지만…… 저 검법이 대단하다는 것만은 알겠네.”
“한데 저 검법은 남궁세가의 가장 기본이라지?”
“뭐? 그게 정말인가? 그럼 남궁천은 기본 검법만으로 저 백무극을 저리도 내몬단 말이야?”
“최근 남궁세가가 몰락의 길을 걸어서 그렇지. 그래도 한때 천하제일가문이 아니던가?”
“그렇지. 역대 검황 중 세 명이 남궁세가 출신이라지. 기본이라고 무시할 순 없어.”
“그게 남궁세가라면 말이지.”
사람들은 남궁천의 검법에 취해갔다.
몰락한 가문이라는 오명이 조금씩 씻겨나가고 오롯이 남궁세가만 그 자체로 남는다.
바로 저 남궁천에 의해서.
‘천아……!’
남궁화가 가슴으로 부르며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이번 무연회를 통해서 남궁세가는 분명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리라.
끝없이 몰락하는 가문이 아니라, 바닥을 치고 다시 정점을 향해 솟구치는 가문이 되리라.
‘그것이 모두 네 덕이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은 마침내 마흔다섯 번째 검격을 펼치고 있었다.
퍼억!
남궁천이 휘두른 일검에 복부를 얻어맞은 백무극이 활처럼 휘며 그대로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
돌고 돌아 마지막을 장식할 검초는 창궁검법의 제일초 창궁일시!
파앙!
쉬이이이잇!
남궁천의 신형이 화살이 되었다.
곧게 내뻗은 목검은 남궁천의 손과 팔목 그리고 어깨까지 하나가 되었다.
바람을 타듯 날아간 남궁천이 그대로 백무극의 가슴을 내질렀다.
뻐어억!
슈우우우우욱, 꽈아앙!
그대로 장외까지 날아간 백무극이 관전석 벽에 부딪치면서 대자로 뻗었다.
투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 후, 백무극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경이 당하던 모습과 똑같다.
이는 모든 이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남궁세가와 겨룬 후기지수들은 한결같이 당하고 만다는 것을.
그것도 가장 기초적인 남궁세가의 검법에 의해.
그리고…….
‘그것이 남궁세가 소가주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남궁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대연무장을 빼곡하게 채운다.
천지가 격동한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무연회의 우승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심사관인 모용신은 넋이 나간 채로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다.
상관없다.
보일 건 다 보였다.
이걸로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남궁세가를 몰락하는 가문으로만 보지 않으리라.
환호하는 인파들 사이에서도 남궁세가주인 남궁검은 예의 그 싸늘한 시선으로 남궁천을 마주 응시했다.
기적을 일으킨 신룡의 탄생으로 세상은 난리가 났는데, 그 복판에 선 남궁천과 남궁검만은 고요한 대화를 눈빛으로 주고받는다.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오늘로서 남궁세가는 전환점을 맞이할 것입니다. 소가주의 자격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소가주가 되려는 것이냐?’
‘저는 더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궁세가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저는 발전하고, 무림 정점에 오를 것이기에 남궁세가 소가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광오한 포부다.
남궁세가라는 배경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궁세가를 끌고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긴. 배경으로 이용하기에는 과거의 남궁세가가 아니니.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정회를 열고 최종결정할 일.’
‘가주님의 의지만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 의지라면…… 두말은 하지 않는다.’
‘그거면 됐습니다.’
남궁천이 씨익 웃고는 돌아섰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귀빈석의 맹주에게 향했다.
맹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매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던 모든 대비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미리 뿌려둔 공진분이 영 아까운 모양이네.’
입자가 매우 고운 공진분.
모래알과 섞이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 남궁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불명회로부터 받은 정보 덕분이었다.
‘아쉽게 됐소. 맹주. 좀 더 발악해보시오. 나도 그럴 테니. 종국에는 누가 웃는지 두고 봅시다.’
마침내 모용신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남궁천…… 승!”
와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앗! 신룡의 탄생입니다아앗! 무연회 시작부터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남궁처어어언! 그가 가문의 위상을 끌어 올렸습니다아앗! 역시 썩어도 준치…… 아니, 정정합니다앗! 정통은 강한 것인가! 남궁천! 그가 이번 무연회의 최종 우승자가 되었습니다아아앗!”
중계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높아졌다.
남궁천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그런 남궁천을 보는 또 다른 시선들.
‘남궁천……! 너란 놈은 대체……!’
‘정말 대단하군요. 남궁 소협.’
‘나도 언젠간 반드시……!’
팽수혁과 유현, 그리고 윤종승을 비롯한 생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이 지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