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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104화 (104/508)

104. 아직 삼천이백 냥치 남았다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맹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준비는 잘해두었는가?”

그가 나직이 묻자 옆에 서 있던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예, 맹주님. 비무대에 공진분을 뿌려두었습니다. 아마 비무를 시작한 후로 반각 정도 지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백무극은?”

“미리 피독주를 복용시켰습니다.”

“무극이에게 따로 언질은 두었나?”

“예, 일단은 알고는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잘했군.”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무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비무대 바닥에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원래 극적 효과를 위해서 일부러 비무대에 저런 모래 알갱이를 뿌려놓곤 한다.

비무대를 다소 약하게 만들어서 쉽게 부서지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다.

한데 지금은 저기에 단순히 모래 알갱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비무를 시작한 후로 반각 정도만 지나면 공진분 효과가 나타나리라.

그렇게 되면 남궁천은 모든 공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될 테고, 백무극이 무난하게 우승할 수 있으리라.

‘우승만이 아니라 앓던 이를 확실히 뽑게 될 테지.’

맹주는 흡족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다가 비무대 아래에서 대기하는 남궁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남궁천…… 네가 이리 클 줄 알았더라면 진즉 뿌리를 뽑았을 터인데. 내가 안일했구나. 하나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지. 너는 오늘 모든 꿈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운이 좋아 목숨이 붙어 있게 되더라도 더 이상은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되리라.

마침내 남궁천과 백무극이 계단을 따라 비무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서 계단을 밟아 오르는 백무극은 자꾸만 입매가 뒤틀리는 걸 억지로 참았다.

‘웃지 좀 마.’

‘저 깐죽거리던 새끼를 영원히 담가 버릴 수 있는데. 어떻게 안 웃냐?’

‘죽일 거야?’

‘맹주가 죽여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냥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건?’

‘햐! 이 새끼. 이럴 때 보면 착한 건지, 좆나 못된 건지 구분이 안 된다니까.’

‘그게 왜.’

‘무인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걸? 솔직히 말해 봐. 아량을 베풀자는 거냐? 아니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자는 거냐?’

무극이 대답하려는 찰나,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들 하신가? 다중이들.”

“…….”

“지금은 무극이군.”

“맞다.”

“처맞을 준비는 됐고?”

“…….”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한 대를 백 냥으로 계산하면 될 것 같더라고. 총 사천육백 냥이니까 마흔여섯 대만 처맞는 걸로 하자.”

백무극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만만한가?”

“너…… 독심술도 쓰는 거냐? 어떻게 알았지? 그걸?”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가 어디서 혓바닥을 함부로…….”

“엇! 일극이구나. 반갑다, 새끼야.”

“이 미친……!”

백무극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허리춤의 검을 들었다.

그 순간 백무극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주변도 고요해졌다.

몇몇 관전자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저게……? 목검이잖아?”

“설마 남궁천은 목검으로 싸우려는 건가?”

“무연회 본선은 진검승부 아니었어?”

“백무극은 진짜 칼이라고.”

사람들의 말대로 남궁천이 뽑아 든 것은 놀랍게도 목검이었다. 게다가 날이 무뎌서 검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운 느낌이 들 정도.

이를 지켜보던 금왕 진득랑이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가주님, 저건 목검이 아닌지요? 설마 남궁 소협에게 목검으로 싸우라 하신 겁니까?”

금왕은 일전에 남궁검과 남궁천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사람들의 환호성 때문에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남궁검은 매서운 표정으로 남궁천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소가주 자리를 걸고 나누는 대화였기에 어떤 까다로운 조건을 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목검일 줄이야.

한데 남궁검의 반응이 뜻밖이다.

“내가 시킨 게 아니오.”

“예? 하면 남궁 소협이 어째서 목검을…….”

말을 꺼내던 금왕이 입을 다물었다.

남궁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역시 몰랐던 게 분명하다.

‘도대체 남궁 소협! 자네는 어쩌자고 목검을 쓰는 건가?’

그가 떠올린 우려를 남궁화 역시 느끼고 있었다.

‘저 아이가 도대체 어쩌자고……!’

남궁화는 며칠 전 남궁천과 남궁검이 소가주 자리를 걸고 나눈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날 남궁천은 남궁검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승전에서는 가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겨보겠습니다.”

“무슨 뜻이냐?”

“스무 합이면 스무 합, 오십 합이면 오십 합. 부르시는 대로 맞춰 드리지요.”

당시 남궁검의 표정은 전에 없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부르는 대로 합을 딱 맞춰 이기겠다?”

“그렇습니다. 그게 확실한 실력 증명이 될 테니까요.”

“자신과 자만을 구분 못 할 나이는 지났을 텐데.”

“자신인지 자만인지 결과를 보면 아시겠지요.”

남궁검은 냉랭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하게 만든 외손자였다. 해서 나름 좋은 점을 보려고 했건만, 이렇게 광오한 말을 뱉을 줄이야.

결국 남궁검은 남궁천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 자신한다면 단 일 합으로 끝내보아라.”

그 순간 듣고 있던 남궁화로서는 어찌나 놀랐던지.

한데도 남궁천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단 일격으로 승부를 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

“대신 일격에 승패가 결정 난다면 소가주 자리를 제게 주십시오.”

“생각해 보마.”

“그거면 됐습니다.”

그렇게 남궁천이 떠난 후, 남궁화는 남궁검을 은근히 원망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 일 합이라니요. 너무하셨어요, 아버지.”

“어린 나이다. 겸손보다 자만을 먼저 익히면 이 강호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희망은 가지도록…….”

“더는 할 말 없다.”

결국 남궁화도 남궁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남궁검의 말대로 자만심을 어느 정도 고칠 필요는 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단 일격이라니…….’

그것만 해도 벅찬 조건인데 저 목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무인들은 무기에 혼을 담는다고 한다. 그만큼 무기와 신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목검을 든 자와 진검을 든 자는 마음가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사람이 똑같은 초식을 펼치더라도 목검을 사용할 때보다 진검을 사용할 때 훨씬 우수한 실력을 보이는 것 또한 그런 이유다.

‘그런데 어쩌자고 목검을……!’

남궁화가 한숨을 쉬는데, 마침 남궁천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 일격.”

“……?”

백무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단 일격으로 승부를 낸다. 하지만 마흔여섯 대를 처맞아야 하니까, 쉽게 끝내주진 않을 거야.”

백무극은 예의 그 멍한 표정으로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맹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수염을 쓸었다.

‘미친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목검을 들고 나와서 단 일격에 때려눕히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뭐라도 반응을 하지.

‘하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직은 어린 애송이지.’

이걸로 더 이상 볼 건 없으리라.

만약 이것이 남궁천의 격장지계라면 완벽한 실패다.

백무극은 그런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허술하지 않으니.

어쩌면 자신이 남궁천을 과대평가한 건지도 모르겠다.

‘뭐, 어찌 됐든 이 기회에 싹을 뽑는 셈 쳐야겠지.’

맹주의 예상대로 백무극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일극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저거 이제 보니 완전 미친놈이었네.’

‘자만일까?’

‘자만이든 뭐든 때려눕히면 돼. 어차피 조금 있으면 내공도 사용 못 할 텐데.’

‘그래도 방심은 금물.’

‘쫄지나 마, 병신아.’

혼자만의 대화를 끝낸 백무극이 스르릉 도신을 뽑아 들었다.

유난히 시퍼런 칼날이 햇빛을 받아서 반짝인다.

남궁천이 입매를 슬쩍 뒤틀더니 남궁검이 앉은 자리를 힐끔 보았다.

‘영감, 확실히 보쇼.’

다음 순간, 백무극이 먼저 바닥을 차면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파밧!

쉬이이이잇!

‘무극이군.’

금계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게 보인다.

남궁천은 곧장 상극을 이루는 화계의 기운을 운용하면서 맞부딪쳐갔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과연 목검으로 얼마나 할까?”

“정말 일격으로 승부를 낼까?”

“일격에 당하지나 않아야 할 텐데.”

사람들의 기대와 걱정을 한 몸에 받은 남궁천이 백무극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밧!

순간, 남궁천의 시야에 백무극의 공력 흐름이 잡힌다.

‘저건 환술!’

아니나 다를까, 백무극의 신형이 옆으로 흩어진다.

하나 남궁천은 속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는 듯이 공력을 흔들어 환술을 되받아쳤다.

짧은 순간 백무극은 남궁천의 신형이 땅으로 쑥 꺼지는 것을 느꼈다.

‘……?’

도신을 뿌리려던 백무극이 멈칫했다.

‘사라졌어……?’

‘사라지긴 뭘 사라져! 정신 차려, 병신아!’

‘뒤다.’

백무극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자아들이 소리친다.

백무극이 휙 돌아서는데, 다시 한 번 남궁천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

‘씨발, 방금 누가 뒤라고 했어?’

‘너도 도움 안 되긴 마찬가지.’

‘닥쳐!’

‘시끄럽다, 이 잡것들아! 집중 좀 해!’

백무극의 머릿속에서 난리가 난다.

그 순간, 좌측에서 남궁천의 벼락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일겨어어억!”

백무극이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목검이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정수리를 때렸다.

빠아아악!

순간 백무극은 영혼마저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끄아아아악!”

수십 개의 자아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서 허우적댄다.

처절한 비명이 울리자 지켜보던 관전자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대신 관전석 꼭대기에서 중계를 하는 이가 목청껏 소리쳤다.

“우아아앗! 남궁천이 정말로 단 일격에 백무극의 대가리…… 아니, 머리를 쪼갰습니다! 지켜보는 제 머리통이 다 아플 지경입니다! 진검승부였다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어마어마한 일격임에도 백무극의 머리가 깨지지 않은 걸 보면, 저 머리는 만년한철처럼 단단한 것인가아아!”

한편 이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남궁검은 눈을 부릅뜨고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아, 아버지…….”

“일격이군.”

“……!”

남궁검이 눈에 힘을 준 채 입을 꽉 다물었다.

틀림없는 일검 승부다.

백무극의 머리가 깨지지 않았지만 진검이었다면 목숨이 날아갈 상황.

어디 그뿐인가?

“일부러 손속에 사정을 두다니.”

“네에? 천이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고요?”

남궁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화가 멍하니 시선을 돌려 남궁천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백무극의 머리가 진즉 깨지지 않았을까?

너무 놀라서 거기까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침 중계자가 목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아앗!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닷! 이어지는 남궁천의 공겨어억!”

중계자의 말대로 남궁천은 백무극이 쓰러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창졸지간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더니 그대로 허물어지는 백무극의 옆구리를 목검으로 후려치는 게 아닌가?

빠아악!

“크허어억!”

백무극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옆으로 휘청거렸다.

그대로 정신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

하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쉬이익, 빠아아악!

뻑! 꽈앙!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뇌리를 들쑤시는 충격이 온몸을 뒤흔든다.

전신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 의식을 놓으려고 하면, 기가 막히게 요혈을 때리면서 정신을 깨워 버린다.

“크아아악! 젠자아아앙! 이 개새끼야아악!”

백무극의 입에서 일극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가 뭘 어찌할 틈도 없이 남궁천의 목검이 명치를 찔렀다.

푸욱!

“끄어어억!”

백무극이 각혈을 하며 고꾸라지려는 순간,

턱!

남궁천의 목검이 백무극의 상체를 받쳐 들었다.

동시에 백무극의 귓가에 남궁천의 싸늘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아직 삼천이백 냥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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