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03화 (103/508)

103. 아직 삼천이백 냥치 남았다

움찔거린 백무극이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남궁천이 창틀에 척 걸터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백무극도 이번엔 많이 놀란 것인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저런 곳에……?

너무 황당하다 보니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여기엔 왜……?”

“왜긴. 지난번에 하던 말을 마무리 지으려고 온 거지.”

“지난번에 하던 말? 아니, 그보다 왜 그런 곳에…….”

“문이 잠겨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백무극이 예의 그 맹한 표정으로 입을 척 벌렸다.

‘도대체 언제 온 거지?’

아무래도 일극과 수다 떠는 일에 너무 집중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창틀에 떡하니 앉은 남궁천의 기척을 이제 눈치챌 리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이제야 눈치챘다고?

정말이지 귀신이 홀연히 나타난 것만 같다.

그래도 기감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남궁천이 턱짓을 하며 말을 툭 뱉었다.

“그거 또 해봐.”

“또? 뭘……?”

“아까 하던 거. 혼자 막 일인이역하고 그러는 거. 또 보고 싶어서.”

뭘 또 보고 싶어, 미친놈아!

아무리 무감한 백무극이어도 이 황당한 요구에 내심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

“호오, 그래? 신기하네.”

남궁천이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백무극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무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남궁천이 다시 불쑥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냐?”

“진짜 같은 건 없어.”

“그럼?”

“지금 나는 그냥 나야.”

“그럼 아까 그 발랑 까진 놈은? 말투가 영 싸가지 없던데.”

“일극도 그냥 일극이야.”

“한마디로 전부 진짜다, 이건가?”

“…….”

“그러니까 어딘지 맹한 너는 무극. 싸가지를 밥 말아 처먹은 그 녀석은 일극, 빙공 쓰는 새끼는 이극. 뭐 이런 건가?”

남궁천의 말에 백무극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이극의 존재를 알고 있어.’

‘뭐, 잠시나마 빙공을 썼으니 눈치챈 모양이군.’

‘네가 제대로 처리를 못하니까 이극까지 나선 거야.’

‘병신아, 너는 뭘 잘했는데?’

‘더 잘하란 말이 아니라 실수를 하지 말라는 뜻.’

‘인간은 실수를 하면서 크는 거다.’

내면에서 무극과 일극이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하! 너 진짜 웃긴 새끼구나?”

“……?”

“방금 속으로 일극과 대화한 거냐?”

“……!”

“아니, 뭐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까지야. 방금 네 표정이 막 이랬다가, 이랬다가 희한하게 휙휙 바뀌었거든.”

남궁천이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잡고 올렸다가 내렸다 반복하면서 흉내 냈다.

그 모습이 짐짓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백무극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확실히 평상시에는 무극이군. 그럼 네가 대장이냐?”

“이런 씨발, 누가 대장이라는 거야? 네 눈깔에는 이런 맹한 새끼가 대장처럼 보이냐?”

순간 백무극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면서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남궁천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백무극은 어느새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맹하니 대꾸했다.

“미안. 일극이 제멋대로.”

“와아, 이 새끼…… 세상 편하게 사네.”

“…….”

“뭐, 너는 심심할 일은 없겠다.”

“이딴 새끼랑 하루 종일 붙어 다녀봐라. 안 심심한가?”

“흐음.”

“방금도 일극.”

“그럼 너와 일극은 아무 때나 교대하는 건가?”

“거의 본능적으로 교대하는 셈.”

“그렇군. 그래서 어디까지야?”

“뭐가?”

“오극이, 육극이도 있어? 칠극이, 팔극이는?”

“몰라.”

“모른다고? 너도 네 안에 몇 명이 들어 있는지 모른단 말이야?”

“몰라.”

“진짜 재미있는 새끼네, 이거.”

비아냥이 아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탄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이 있다니. 나보다 더한 새끼가 아닌가?

다중으로 인격이 튀어나오는 것 같아서 ‘다중이’라고 불러봤지만, 진짜 이 녀석에게 딱 맞는 별명 같다.

백무극의 맹한 시선을 받은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혹시라도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말이다.”

“나이 별로 안 많은데.”

“그건 넘어가고.”

“왜 온 거야?”

“오늘이 마감이야.”

“마감?”

“은자 천삼백 냥. 내 자금줄인 윤종승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보증금을 내야지?”

“윤증승 회복해.”

“그래, 잘 회복하더군. 생각보다 명줄이 질긴 놈이야. 그런데 인생은 모르잖아? 그놈이 내일 아침에 갑자기 떡 처먹다가 목 막혀서 뒈질지. 그걸 대비하자는 거야.”

“돈 없어.”

“돈 안 내면 전에 말한 대로 사천육백 냥치 처 맞아야 할 텐데.”

“없어.”

“어쩔 수 없지. 사실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너…… 아니, 너희들 중 한 놈이 갑자기 불쑥 돈을 내밀까 봐.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

순간 남궁천의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해졌다.

“그럼 비무 날 보자고. 사천육백 냥치 받아내 줄 테니까.”

“이해가 안 된다.”

“원래 다 그래. 대개 인간은 처맞은 후에야 ‘아아’ 하는 거야.”

남궁천이 창틀을 밟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창틀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백무극의 입매가 어느 순간 길게 찢어졌다.

“저 새끼…… 좆나 웃긴 새끼네.”

* * *

후원의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궁천은 운기 조식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눈을 떴다.

휘이이잉.

늦가을 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흩날린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흩날리는 낙엽을 보았다.

낙엽은 이내 싸늘하게 식으며 얼음알갱이로 변했고, 그 얼음 알갱이 너머로 백무극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게 보였다.

남궁천은 그에 맞서 남궁세가의 절기를 펼친다. 날아드는 칼을 정면으로 부딪쳐 가다가 순간 스르르 사라지더니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백무극의 옆구리를 베어낸다.

백무극이 허공에서 스러져 간다.

쇄도하던 얼음 알갱이는 이내 낙엽이 되어 작은 돌풍에 휩쓸리듯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힘없이 흩어진다.

그렇게 가상의 대결을 얼마나 펼쳤을까?

“스으으읍, 후우우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남궁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확인한 건 금, 화, 수. 그렇다면 최소한 목계와 토계의 기운을 운용할 수 있는 자아가 또 존재할 수도 있겠지.’

한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지만, 대비를 해둬서 나쁠 건 없으리라.

게다가 남궁검과 나눈 대화도 있고.

남궁천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가을 하늘이 노을에 물들어 아름다운 빛깔을 품었다.

그 언젠가 오늘과 닮은 하늘을 남궁선과 함께 올려다본 기억이 난다.

‘그날 당신은 노을보다 아름답게 웃었지.’

그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시름을 다 잊었던 기억이 난다.

영원 같았던 찰나.

그 기억이 없었더라면 지난 오랜 세월 자신이 버틸 수 있었을까?

지금쯤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까?

적어도 당신에게 떳떳한 남자가, 그리고 내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될게.

나랑 안 어울린다고?

사람이 어울리는 짓만 하고 사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나한테 빠졌던 것처럼.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선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것만 같다.

-내가 언제 빠졌어? 순수한 나를 당신이 꼬드긴 거지!

‘그게 빠져든 거야.’

그렇게 후원을 벗어나려는데, 마침 한 무리의 생도들이 모퉁이를 돌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붕대로 전신을 친친 감은 윤종승과 유현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팽수혁과 진소홍, 그리고 주연화도 함께였다.

“무슨 일로?”

“응원하려고요.”

주연화가 밝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남궁천이 윤종승과 유현에게 시선을 돌리니, 윤종승이 목발을 짚은 채로 다가오며 말했다.

“남궁천, 이겨라.”

“그럴 거야. 그런데 그거 부탁하려고 온 거냐? 복수해 달라고?”

“그런 게 아냐!”

윤종승이 버럭 소리쳤다.

느닷없이 큰 소리에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좁히자, 윤종승이 움찔거리고는 먼 산을 응시했다.

“정, 정말 그런 게 아니야. 단지…… 우리는…….”

“그냥 남궁 소협이 좋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을 하러 온 것입니다.”

“……?”

그러자 지켜보던 팽수혁이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나 같은 놈! 나는 결코 네놈 따위가 좋아서 응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내 원수라고 자칭할 정도면 무연회 우승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

자칭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네가 우승해라! 자칭 하북팽가의 원수라면 그 정도 자격은 되어야겠지.”

그러니까 자칭하지 않았다고.

주연화도 끼어들었다.

“저도 남궁 소협이 좋아요. 이건 순수한 응원이랍니다. 우리 모두 같은 뜻이에요. 뭐,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주연화가 힐끔 눈치를 주고 말하자, 팽수혁이 노발대발했다.

“누가 솔직하지 못하단 거야?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한데! 누구냐? 솔직하지 못한 놈은!”

“아, 네에. 네에.”

주연화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생소한 광경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응원한다라.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사방이 적이었던 암담한 세상을 살았기에 더 이해되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웃는 사람부터 의심해야만 했던 전생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건가?

자신을 바라보며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은 어떠한 악의도 없어 보인다.

‘이것도 당신의 안배인가?’

-맞아. 좀 더 세상의 따뜻한 면도 봐. 당신은…… 단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잖아.

‘하여튼 당신이란 여자…….’

보고 싶다.

사무치도록.

남궁천이 그리움을 애써 떨쳐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밟아줄 테니까.”

* * *

마침내 대망의 결승전 날이 밝았다.

무한 거리는 한산해졌다.

장사치들은 아예 가게 문을 닫아걸었고, 여행객들은 일찌감치 객점을 나서서 무림맹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무한의 모든 사람들이 무림맹으로 몰려온 것만 같았다.

대연무장의 관객석이 인파로 넘쳐나자, 대연무장 바깥에도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물론 그들은 대연무장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 관전석 꼭대기에서 비무 진행 과정을 낱낱이 보고 즉석에서 큰 소리로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한 상회에서 돈을 받고 중계를 하는 이들은 말재주가 워낙 좋았기에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모든 이들의 관심이 이 결승전에 집중된 날.

“남궁천이 이기겠지? 신룡의 탄생이니까.”

“그래도 무맹관일세. 화산의 후기지수를 꺾고 올라온 생도 아닌가? 나는 백무극 생도가 이길 것 같으이.”

“이거 참, 올해도 무맹관의 구파일방 제자와 정협관의 오대세가 자제들로 각축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고 있어.”

“그래서 나는 더 짐작조차 못하겠어. 도대체 누가 이길지.”

“일단 지켜보자고. 그래도 난 남궁천이 이기는 쪽에 걸었네.”

“응원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백무극이 이길 거라고 돈을 걸었어.”

저마다의 이야기가 구름처럼 대연무장의 허공에 떠돌았다.

그리고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마침내 남궁천과 백무극이 비무대를 향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앗!”

“누가 이기든 너희들은 신룡이다! 힘내라앗!”

“남궁천! 이겨라!”

“백무극! 난 너한테 걸었다!”

관전자들의 함성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