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02화 (102/508)

102. 이변의 이변

“왜? 뭐가?”

옆에 서 있던 팽수혁이 이맛살을 구기며 돌아보았다.

남궁천은 대답 대신 백무극을 빤히 노려보았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겐 분명히 보였다.

전신 혈맥을 타고 흐르는 수계(水界)의 기운이!

그것도 극음(極陰)에 가깝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계의 기운과 화계의 기운을 운용하던 백무극이었다.

한데 지금은 수계다.

지금껏 초절정에 이르지 않은 자가 이렇듯 오행의 기운을 제멋대로 바꿔가면서 운기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뭐, 가끔 그런 녀석들이 있긴 있다.

하나 대체로 두 가지 성질을 다루거나, 기운을 변환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저렇게 싸우는 도중에 휙휙 바꾸는 새끼는 좀처럼 없는데…….

‘나 같은 새끼인가?’

아냐, 그건 아니다.

초견파공안을 사용한다면 몰랐을 리가 없지.

초견파공안이 그리 흔한 재능도 아니고.

도대체 저 새끼 정체가 뭐지?

어쨌거나 백무극의 분위기가 또 바뀌었다는 건 유현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도대체 이자는……!’

유현이 눈을 크게 뜨는데, 백무극이 눈을 허옇게 뒤집더니 곧장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어딜!’

유현이 유려한 동작으로 백무극을 옆으로 흘려내는 것과 동시에 제육초식 매화낙락(梅花落落)을 펼쳤다.

하늘에서 무수한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듯하다.

만약 이십사수매화검을 대성했다면 정말로 떨어지는 매화 꽃잎이 보였으리라.

하나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후기지수들 중에는 이마저도 막아낼 이가 없을 테니.

슈슈슈슈슈슉!

한데…….

‘이건 무슨……!’

어지러이 떨어지는 검격을 향해 백무극이 오히려 몸을 던져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유현이 멈칫거리며 공력을 회수했다.

제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을 보니 저절로 움츠러든 것이다.

비무를 하다가 상대를 죽이고 싶진 않았기에.

하나 그 망설임은 유현의 명백한 실수였다.

타닷!

품으로 파고든 백무극이 순간 긴 숨을 뱉었다.

“하아아.”

새하얀 입김이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은빛 칼날이 솟구쳐 오른다.

쉬이이잇!

쩌저저저저정!

떨어지는 수십 자루의 검이 솟구쳐 오르는 도와 부딪치면서 와장창 깨져나간다. 아니, 깨져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의 도검은 멀쩡하다.

“뭐, 뭐얏?”

“빙공인가?”

“허어! 저 백무극 생도가 빙공도 사용한단 말이야?”

“도대체 저 생도는 정체가 뭐야?”

관전자들만큼이나 팽수혁도 놀랐다.

“저 새끼…… 운으로 올라온 놈이 아니었어!”

“그걸 이제 알았냐?”

남궁천의 말에 팽수혁이 휙 돌아보았다.

“넌 알고 있었냐?”

“당연히.”

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칫! 잘나셨군.”

팽수혁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남궁천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짜증이 났다.

한편 남궁천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이걸로 뒤집힐 지도 모르겠는데?’

역시 유현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도인으로서의 마음가짐 때문에 손속에 사정을 많이 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사기 치기엔 딱 좋은 먹잇감이란 말이지. 쯧.’

그 생각 그대로 조금 전의 일격은 유현에게 치명적이었다. 도신을 뒤덮었던 얼음 알갱이가 터져 나가면서 유현의 눈을 덮친 것이다.

‘눈이……!’

유현이 눈을 질끈 감고는 얼른 물러나는데, 백무극이 빠르게 쫓아오면서 도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끌어 올렸다.

콰가가가각!

도첨에 걸린 바닥이 깨져 나가면서 얼어붙은 파편이 그대로 유현에게 날아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유현이 본능적으로 검초를 펼쳐 파편들을 마구 쳐냈다.

콰차차차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마구 깨지며 튕겨 나갔다.

문제는 튕겨 나간 파편들이 관중석까지 날아가 양민들마저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우아악!”

“크억!”

“아악!”

갑자기 터져 나온 비명에 유현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몇몇 관전자들이 몸을 뒤집은 채 비명을 터뜨렸다. 낭자한 피도 보였다.

‘이런, 나 때문에……!’

하나 백무극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연이어 칼을 끌어 올렸다.

콰가가가각!

“헛!”

유현이 얼른 검을 휘두르면서 날아드는 파편을 다시 쳐냈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 쓰다 보니 좀처럼 검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움직임에 제약이 따르니 빈틈이 훤히 드러난다.

찰나, 백무극이 그 틈을 귀신같이 노리며 달려들었다.

가까이에 다가선 백무극의 표정이 다시 히죽 웃음을 지었다.

“이제 내 차례네?”

“……!”

쉬깡!

유현이 뒤늦게 검을 앞세웠지만, 한 차례 마찰을 일으킨 칼이 그대로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푸욱!

“사형!”

관전석에서 주연화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솟구쳐 올랐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숨죽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끄으읍!”

촤아아악!

옆구리를 베며 지나간 도신이 다시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쒸에에엑!

유현이 몸을 비틀면서 막아내려고 했지만…….

‘허초……?’

순간 도신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더니 전방에서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게 아닌가?

‘죽는다……!’

명백한 살기가 실린 칼날.

칼끝에는 자비가 실려 있지 않다.

“흐아아압!”

유현이 온 힘을 다해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슈카아앙!

도검이 맞부딪치면서 어깨가 저릿하게 울린다.

그 순간 유현의 귓가에 희열에 찬 목소리가 나직이 스며들었다.

“끝이네? 흐흐.”

촤촤촤촤촤촤악!

수십 가닥의 도격이 그대로 유현의 전신을 덮쳐왔다.

관전석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 저건 너무한 것 아닌가?”

“저…… 유현이…… 저리 당하다니.”

“이건…… 좀 심한데……!”

윤종승이 당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백무극은 유현을 앞에 두고 화려한 칼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로 조각 예술이라도 보이려는 듯.

스스로의 도식에 취한 백무극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런……!”

보다 못한 화산파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그는 유현이 왜 멈칫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고한 양민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탓이다.

첫 번째로 멈칫한 것 또한 상대의 목숨을 배려해서였다.

한데 지금 저 백무극이란 생도는 오히려 그 점을 역이용해 상대를 유린하며 즐기지 않는가!

마침내 백무극의 칼이 사선으로 떨어지면서 유현의 가슴을 베려고 할 때,

쉬이잇, 까앙!

불현듯 나타난 검 한 자루가 백무극의 칼을 튕겨냈다.

순간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 백무극이 휙 돌아섰다.

‘웬 놈……!’

하나 그는 곧 상대를 확인하고는 얼른 험악한 인상을 지워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자는 다름 아닌 모용신.

“여기까지.”

모용신이 냉랭하게 말하자, 백무극이 언제 흥분했냐는 듯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와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정말이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 모습에 기가 찰 지경이었다.

한편 전신을 난자당한 유현이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거친 호흡을 내쉴 때마다 걸쭉한 피가 입가에서 늘어졌다.

워낙 잔인한 손속이었기에 대연무장에서 환호성은 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모용신이 다가가 물었다.

“괜찮은가?”

“괜…… 찮습니다.”

대답과 달리 유현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는 엎어지고 말았다.

쿵!

지켜보던 팽수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긴. 개뿔……!”

그의 시선이 백무극을 향했다.

유현과 깊은 친분을 쌓은 건 아니지만, 백무극의 잔인한 손속을 보니 저절로 반감이 생긴 것이다.

모용신은 의원을 불러 유현을 이송하게 한 후 곧바로 백무극의 승리를 선언했다.

또 한 번의 이변이 발생했지만 환호성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관전석 한쪽에서는 부상을 입은 양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의생들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부상자가 떠난 빈자리에는 붉은 혈흔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렇게 오늘의 마지막 비무가 끝난 대연무장에는 환호성 대신 나직한 술렁임만 채워지고 있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백무극은 침대 옆에 도를 세워두고는 동경 앞으로 다가갔다.

뺨과 목덜미에 묻은 핏자국.

유현의 몸을 난자할 때 튄 것이리라.

소매로 핏자국을 대충 닦은 백무극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떨어댔다.

어느새 입매는 길게 찢어지고 눈빛은 광기를 한가득 품었다.

“킥킥. 봤어? 그 녀석 얼굴 새파랗게 질려서 잔뜩 쫄던 거.”

“봤어.”

놀랍게도 백무극은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와 스스로에게 답을 했다. 그러더니 곧 희열에 찬 표정으로 자문하는 게 아닌가?

“아아, 조금 아쉽단 말이야. 완전히 끝장을 봤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넌 너무 지나쳐.”

“지나치긴. 우릴 우습게 여기는데 당연히 자근자근 밟아줘야지.”

“모용 단주가 말리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거야.”

“그러니까 지나쳐도 되는 거지, 병신아. 말려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도 맹주님이 싫어하실걸.”

“쳇, 그 영감탱이 기분 알 게 뭐야?”

“맹주님을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씨발, 잔소리 좀 그만해. 하여튼 답답한 새끼라니까. 그래도 내가 마무리 지었잖아!”

“넌 너무 즐겨.”

“그래도 내가 즐기는 선에서 끝나야지. 이극(二極)까지 나서면 말리기도 힘들어. 오늘도 겨우 잠재운 거니까.”

“애초에 나서게 하질 말았어야지.”

“됐다. 너랑 대화하면 속천불이 나서 제명에 못 살 것 같다. 무슨 애새끼가 나이만 처먹은 영감 같아 가지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무극이 침대로 걸어가더니 털썩 앉았다. 그의 얼굴이 이내 맹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천이 눈치챘을지도 몰라.”

“뭘?”

“이극이 나선 걸.”

“상관없잖아?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백무극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백무극이 다시 옆으로 돌아누우며 히죽 웃었다.

“아무튼 결승전에서는 제약이 없잖아? 맹주 그 영감탱이가 죽여도 좋다고 했고.”

“그런 말 안 했어.”

“그게 그 말이지, 병신아.”

“남궁천은…… 기분이 안 좋아.”

“넌 싸움을 기분으로 하냐? 병신아, 자신감을 가져. 우리가 있잖아.”

“…….”

“무극아.”

“왜?”

“넌 잔말 말고 이 형님만 믿어라. 내가 다 끝내줄 테니까.”

“난 아무도 안 믿어.”

나조차도.

마지막 말은 가슴으로 삼켰지만 이미 일극은 눈치채고 있으리라.

백무극이 입을 길게 찢으며 키들거렸다.

“하여튼 웃긴 새끼라니까. 킥킥.”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이거 좆나 웃긴 새끼네. 너…… 다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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